EP.144 십사장 - 청룡비무회 (14)
* * *
64강의 첫 비무가 끝났다.
당사자가 된 남궁진천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곤 하나 그것이 어디 무림 전체에 중요한 일이던가.
이들에겐 다만 첫 승부였던 세가 소가주끼리의 대결이 끝나고, 그것이 술자리의 아주 그럴싸한 안주가 되었다는 게 중요할 뿐이었다.
“잔을 들게!”
밤이 깊어감에도 무한의 객잔은 불이 꺼질 틈이 없다.
곳곳에선 새로운 안줏거리를 준비하며 솟는 연기가, 거리를 다 절이는 주향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그 속 어딘가로 들어가 보면 오가는 대화는 그랬다.
“역시 검룡이라 하지 않았소! 극도라고 해도 제왕성엔 안 된다니까?”
“에잉, 어찌 그리만 평하겠소? 형장은 보지 못했소? 그 최초의 수에서 극도의 기세가 순간 흐트러졌잖소. 분명 검룡이 극도의 심상을 흩트리기 위해 뭔가 수를 썼을 것이란 말이오.”
“어허! 지금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비겁한 수를 썼단 말인가?!”
“그, 그것은 아니지만서두….”
비겁이라 해야 할까.
남궁진천의 홍조에 팽도월이 당황한 것은 맞았다.
하나 그것은 이들이 알지 못할 뒷사정.
진실은 오늘도 땅 밑에 묻히고만 있었다.
그런 중 다음 대진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다.
“내일은 권룡과 선룡인가!”
“아암! 오늘만큼의 폭발력은 없겠지만 보는 맛 정도는 있는 비무일 것이오! 무엇보다 구파의 대자제나 되는 이들의 비무가 아니오! 무공 자체가 가진 깊이만 따져도 아주 심오한 수가 오갈 수밖에 없단 말이지!”
“그것 참 기대가 되는군!”
“아시오? 내일 비무 또한 그 승패에 관한 내기로 1대1의 배당이 걸렸다더군!”
“흠, 쉽지가 않아…. 자네는 어디에 걸었나?”
승패를 점치는 이들조차 향방을 알 수 없기에 지난 승부와 같이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얼마나 그 기세가 험악했던지 싸움을 하는 이까지 나왔다면 설명이 될까.
여하튼, 그런 상황 속에서 당사자인 일운은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은 낯을 한 채 연무장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내일이다.’
내일이 바로 결전의 날.
용봉지회에서의 치욕과 이리도 속을 어지럽히는 번뇌에 종말을 고하는 날.
속으로 읊조리며 승리를 확신한다.
그것은 남궁진천의 오만과는 다른 자기암시였다.
일운은 연신 결심을 되새기는 것이다.
이 번뇌를 끝으로 다시는 같은 번뇌에 빠지지 않겠다고.
그저 불자로서의 마음을 한가득 속에 새기겠다고.
“스으….”
숨을 내쉰다.
일운의 몸 주변에 역근경(易筋經)의 기운이 금빛으로 떠올랐다가, 이내 갈무리되었다.
이윽고 눈을 뜬 일운의 동공 속에는 채 갈무리하지 못한 투기가 잔뜩 억눌려 있었다.
*
날이 밝았다.
오늘 또한 비무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열기가 가득하다.
일운은 그 순간까지도 불경을 외며 속을 다스렸다.
그러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가슴 속에 깃든 열기가 그리도 뜨겁기만 한 것이다.
마음이 향하는 방향 끝에 있는 것은 그러했다.
‘승리.’
그저 승리를 원한다.
일운은 이 승부에서 승리 외의 것을 수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에 자괴감을 띄워 올리면서도 계속해 감정에 젖어 들어가니, 이것이야 말로 심마와 닮아있을 것이었다.
일운은 생각했다.
오늘 승리를 쟁취하지 못한다면 못다한 미련이 필시 심마가 되어 이지를 삼키게 될 것이라고.
와중 목리원이 말했다.
“일운 스님! 내 열심히 응원해 보겠소! 꼭 승리를 쟁취하셔야 하오!”
“맞아요! 아시죠. 스님? 저희 불자예요! 무당한테 지면 면이 안 선다고!”
혜운 또한 우습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가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일운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예, 꼭 승리해야지요.”
그리고 합장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일운이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
현공은 비무대에 올라서는 그 순간까지도 지난 일을 되새기고 있었다.
일운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일운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후기지수 하나일 뿐이니.
‘맹에서 눈치를 챘다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오늘 아침 세작에게 들은 맹의 향방에 관한 것이다.
드디어 맹이 천하상단에까지 도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중원에 나온 교인들을 아우르는 입장인 현공으로선 꽤 곤란한 사실이었다.
현공은 다시 한번 상황을 되새겼다.
‘책잡힐 만한 요소는 옛적에 다 치워뒀다.’
최초 상단을 만들며 전대가 사용했던 자금의 출처는 세탁했다.
상단의 세를 불리며 사용한 금전도, 그 과정에서 피를 묻힌 일도 모두 묻었다.
지금의 천하상단은 그저 천운이 겹친 청년이 피땀 흘려 만든 상단에 불과했다.
들켰다던 마인들, 그들을 후원한 일조차 상단에선 모르는 일로 치부하면 그만인 것이다.
천하상단엔 그만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냥 두고 보자니 불안한 점은 존재했다.
무엇보다 날이 갈수록 광증이 심해지는 소교주.
지금 이 비무회에 직접 참가한 그가 혹여 광증에 마기를 드러낸다면 그만한 낭패도 없을 터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고민이 이어졌고 이윽고 답이 나왔다.
‘내가 여기서 떨어져야겠군.’
비무회에 시간을 뺏길 순 없다.
소교주를 더 가까이에서 관리해야 했다.
그러니 오늘 비무는 대충 검을 휘두르다 기권하면 되겠지.
현공은 결정을 내리고 싱긋 웃었다.
맞은편에 일운이 존재했다.
“오랜만입니다.”
딱 봐도 투기가 맺혀 있는 얼굴이 스님답지 않다.
하기야, 용봉지회 때마다 몇 해째 봐온 일운은 스님보단 차라리 투귀가 어울리는 사내였다.
본인은 불자다움을 추구하려 하는 듯하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언제나 성질을 죽이고 있을 적에나 드러나는 특성이었다.
‘다 보이는데 말이지.’
마도육문의 마가(麻家).
대대로 마교에서도 두뇌의 역할을 맡았던 그곳의 후계자로 태어나 평생 스스로를 숨기며 살아왔다.
자연스레 현공은 사람의 표정을 읽는 훈련을 거의 평생에 걸쳐 해왔고, 그런 만큼 일운의 얼굴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채 숨기지 못하고 언제나 억눌러오는 투기를.
“용봉지회 이후 또 이렇게 승부하게 되는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일운이 싱긋 웃었다.
그럴수록 투기가 진해진다.
‘참….’
귀찮은 상대다.
현공은 생각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
“개(開)!”
심판의 말과 함께 비무가 시작된다.
일운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떠올리는 것은 이제껏 그와 겨룰 때면 첫수로 있어 왔던 양상들.
‘선룡께선 절대 먼저 검을 휘두르는 일이 없다.’
선룡 현공은 허허로운 성정에 따라 비무에서도 느긋함을 보이는 면이 있었다.
다만 자신감에 의한 것이라기보단, 무당이 추구하는 무학의 묘리가 이화접목(移花接木)에 있는 까닭이다.
태극혜검(太極慧劍).
무당의 대제자나 전수받는 절기이고 현공은 그 전승자다.
상대가 공격을 가하면 그것을 뒤틀어 배에 달하는 힘으로 받아치는 것이 현공이 즐기는 수법이니, 아마 초장부터 큰 초식을 사용했다간 쉽사리 당해버릴 터다.
‘일단은 경계.’
일운이 진각을 밟았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며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가 됐다.
이윽고 정권.
쿵!
충격파와 함께 옷깃이 휘날린다.
“반격하지 않으십니까?”
“인사를 나누는 듯하여.”
현공이 싱긋 웃는 것에 일운은 눈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얕은 수에 넘어오진 않는군.’
생각하며 곧장 반대쪽 주먹을 뻗었다.
직후 검면에 주먹이 막혔고, 그것을 예상한 일운이 몸을 빙글 돌려 팔꿈치로 현공의 허리를 노렸다.
그 순간 현공의 몸에서 기파가 흘러나왔다.
백청색의 맑은 기운이 피부 위로 닿는다.
일운 또한 역근경의 기운을 일으켰다.
‘휩쓸리면 당한다!’
태극혜검은 흐름을 끌고 오는 무학.
저 기파가 이끄는 길에 홀렸다간 그대로 무릎을 꿇게 될 터다.
일운은 이를 악 물며 기파를 더 진하게 풀어냈다.
‘버틸 수 있다!’
역근경의 부동(不動)의 무학이다.
그 무엇보다 단단하게 뿌리 내린 나무가 되어 마음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무학이다.
그러니 흐름을 끌고 가려는 무당의 무학에 능히 버틸 수 있을 터다.
의지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하!!!”
기합과 함께 흐름을 털어냈다.
멈추지 않았다.
흔들리는 현공의 기파를 느낀 일운은 곧장 권을 뻗었다.
현공이 그 기세에 빠르게 물러났으나, 일운에게 중요치는 않은 일이었다.
뻗은 주먹에 맺힌 기파가 쏘아져 나간 까닭이다.
백보신권(百步神拳).
소림 칠십이종 절예 중 수위에 해당하는 무공으로 그 경지에 따라 제 자리에서 백보까지의 거리를 타격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일운이 타격할 수 있는 거리는 약 20보에 달했고, 그 순간 현공이 물러난 거리는 약 8보였다.
충분히 맞출 만하다는 것이다.
현공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내 원래의 기색으로 돌아왔다.
그러는 중 현공의 검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공간을 그어 내린다.
그 궤적에 따라 일운이 쏘아낸 기파가 그대로 그에게 돌아왔다.
“예상했습니다!”
바로 저 수에 당했는데 어찌 예상하지 못했을까.
일운은 되돌아오는 기파를 향해 권을 뻗었다.
쾅!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금빛 기류가 폭사한다.
시야가 가려졌다.
하지만 기척은 느껴진다.
일운은 멈추지 않고 다시 권을 뻗었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네 번을 넘어 이어진 권이 어느새 열 세 번까지 이어짐에 공간이 온통 기파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
관객석의 함성이 짙어졌으나, 일운은 외면했다.
그것 말고도 날뛸 때마다 두근대는 심장 또한 외면했다.
그저 권을 뻗는 것이다.
이 가슴 속에 자리한 혈기를 털어내고 싶은 이유였다.
콰아아앙!
또 한 번 권을 뻗었다.
직전의 것들보다 더 큰 공력을 담은 권이었고, 그것이 시야를 흐리던 흙먼지와 금빛의 기류를 모두 흩어냈다.
현공은 멀쩡했다.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일운은 작은 낭패감을 느꼈다.
하나 그것이 포기는 아니었음에, 곧장 다음 수를 준비했다.
한 손은 펴고 다른 손은 주먹을, 그리고 다리는 어깨 너비로 벌린 뒤 고개는 정면으로 향한다.
일운은 기파를 정련했다.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한 무공.’
하지만 도전해야 했다.
아무렴, 백보신권으로 쏘아낸 기파는 태극혜검에 되돌아올 뿐일진대 어찌 그것을 계속 고수할 수 있겠는가.
이 수가 아니면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니 도전해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일운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종소리의 형태로 맑게 울려 퍼지는 기파가 일운의 반경 1장을 모두 감쌌다.
그리고 쏘아내려는 찰나였다.
챙그랑.
현공이 바닥에 검을 떨궜다.
“기권하겠습니다. 공력의 소모가 극심하여 더 검을 쥘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군요.”
그리 말하며 머쓱하다는 듯 싱긋 웃었다.
잠시, 일운은 멍한 얼굴을 만들었다.
그가 내뱉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어라 말도 더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린다.
기파는 그런 심상을 대변하여 이미 다 흔들려 허공에 흩어져버린다.
아니었다.
이런 승부를, 결말을, 미진함을 바란 게 아니었다.
일운이 바란 것은 모든 것을 내건 투쟁과 그 끝에 손에 쥘 승리였다.
거절, 항변.
그따위의 것들이 순간 머릿속에 떠올라 무어라 말을 더하려던 시점.
그보다 빠르게 심판의 말이 이어졌다.
[승! 권룡 일운!]
현공이 목례하곤 자리에서 떠나버렸다.
일운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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