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3 십사장 - 청룡비무회 (13)
* * *
무림맹의 맹주전.
그곳의 심부 사백운의 앞으로 네 명의 사람이 도열 해 있었다.
당화서와 기태운, 권표월과 제갈무연이 바로 그 넷이었다.
이리 모인 이유는 하나.
당화서가 서예에게 들은 정보를 보고한 까닭이었다.
“아직 참가자 중에 마인이 남았다. 게다가 그들이 천하상단의 후원을 받고 있는 듯하다. 내가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나?”
사백운이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단 들은 정보는 그렇습니다.”
“출처가 하오문주라?”
“예.”
“우리를 직접 만날 생각은 없는 듯하군.”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백운은 이해했다.
“…그래, 제아무리 마인이 연관된 일이라곤 하나 하오문주 입장에선 섣불리 손을 내밀어올 수 없겠지.”
백도와 흑도.
그 입장 차이는 두 집단 사이에 생각보다 더 큰 골을 만드는 성질이었다.
무엇보다 현 흑도의 수장인 만악(萬惡) 도은강이 타협을 모르는 사내인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마 이 사실이 그의 귀에 들어가면 하오문은 당장 흑도 전체의 공격을 받게 되리라.
그걸 무시하고 만남을 강행하는 것은 정보를 건네준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군사.”
“예.”
“정보의 신뢰도는?”
“아주 높습니다. 사실 맹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했던 조사에서도 천하상단은 의심도가 높은 집단으로 분류되고 있었습니다. 상단의 규모 탓에 함부로 더 조사하지 못했지만, 조금만 무리를 해본다면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질 듯합니다.”
사백운은 눈앞에 들이밀어진 두 개의 선택지를 바라봤다.
‘이대로 눈 감고 넘어가느냐. 그게 아니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조사에 심혈을 기울이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맹과 백도 무림 전체의 안녕이 걸린 일.
고작 상단 하나의 눈치를 보느라 그 일에 미진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알겠네. 진행하도록 하지.”
혹여라도 있을 작은 가능성이라도 모두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이끄는 자로서의 덕목일지라.
사백운의 말에 제갈무연이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내겠습니다.”
“그래, 내각에도 전달을 부탁하네.”
“예, 허면 본선은 어떻게 진행하실 계획이십니까?”
“변동 없이 가게. 잊지 마시게. 이 임무는 극비에 부쳐지는 임무라는 것을.”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된다.
비단 철저함을 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 비밀을 유지하며 알아내야할 것은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이 작전이 유출될 경우, 의심해야할 사람이 더 늘어나선 곤란할 것일세.”
만약의 상황, 이 작전이 유출된다면 맹에 세작이 숨어있을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상황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넷이나 내각의 무인 몇이 용의선상에 오를 터.
이 이상 더 용의선상을 늘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들 고생해주게.”
은밀한 회담은 그리 끝맺고 있었다.
*
청룡 비무회의 본선은 성황리에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128강을 모두 끝마치고 시작된 64강.
용봉단 내에서의 이번 대진 순서는 128강과 반대였다.
가장 먼저 남궁진천, 그 뒤로 권룡 일운과 마지막이 목리원이다.
다들 날짜도 다르게 전달받은 터라 개인 수련으로 바쁜 중에도 단원들은 서로의 비무를 응원하기 위해 다 같이 자리한 와중이었다.
“검룡 형! 힘내시오!”
“에이, 목 아우도 참. 남궁형 자존심에 여기서 패배할 리가 있나. 16강이 목 아우와의 승부인데 벌써부터 응원받는 것도 모양 빠질 걸세.”
“제갈 시주님은 마음 참 옹졸하게 쓰시네요. 응원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거 혜운 스님은 요즘 말을 참 섭섭하게 하시는구려?”
그새 제갈산과 혜운이 기 싸움을 시작했다.
아직도 제대로 화해를 하지 못한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이렇게 으르렁대는 와중이었다.
나선 것은 일운.
오늘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운 당화서를 대신해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자자, 다들 그만하고 진정해주십시오. 당 시주님이 또 크게 혼을 내실 겁니다.”
두 사람이 움찔하더니 이내 서로에게서 눈을 돌려버렸다.
그 모든 장면을 바라보며, 서예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야 했다.
‘이 사람들이 백도 무림의 미래라….’
백도 무림, 이대로 괜찮은 걸까.
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이윽고 서예는 고개를 털었다.
고민할 이유도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흑도에 속한 자신이 이들의 미래를 걱정해서 뭘 어쩌겠단 것인가.
서예는 가만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다, 이내 싱긋 웃으며 남궁진천에게 말했다.
“기대해도 되는 것이죠?”
“기대조차 아깝다. 제갈산이 말하지 않았나. 이 대진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함을.”
남궁진천은 팔짱을 낀 채로 답했다.
굳은 얼굴로 비치는 오만은 그가 가진 무공에 대한 자신감이리라.
서예는 생각했다.
‘오늘 대전 상대가….’
남궁진천과 같은 오대 세가 중 하나, 도(刀)의 하북팽가의 소가주다.
소가주라곤 해봐야 서른이 넘은 나이라 후기지수로 따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래도 같은 세가의 소가주인데 그렇게 말씀하셔도 돼요?”
“그 누구도 내게 직위를 이유로 동등함을 바랄 수는 없다.”
“맹주님이라도요?”
“…맹주님은 초월의 무인이다. 동등하지 않다.”
남궁진천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오호라, 곤란한 질문은 저리 피해버린다는 것일 테다.
꼴에 무게를 잡으려 노력하는 꼴이 꽤나 앙증맞다.
서예는 킥킥 웃으며 남궁진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속삭였다.
‘우리 내기, 안 잊었죠?’
응원과 도발을 겸한 말.
남궁진천의 눈이 부릅 뜨였다.
얼굴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옅은 홍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연한 걸 묻는군.”
남궁진천이 몸을 홱 돌려버렸다.
“다녀오겠다.”
걷는 걸음은 글쎄, 서예가 보기엔 꽤 달아오른 듯한 걸음이었다.
‘응큼하긴.’
꼴에 사내는 사내라는 것일 테다.
그에게서 시선을 뗀 서예가 뒤를 돌았다.
단원들이 요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서예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싱긋 웃으며 물었다.
“왜요?”
단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휙휙 저어버렸다.
*
“와아아아아아!!!”
함성이 비무장 가득 울려 퍼진다.
예선과 본선을 통틀어 목리원의 개막전을 제외하면 이리도 열기를 띤 일이 없었으리라 여겨질 정도의 거대한 함성이었다.
아무렴, 이번 대진은 이런 열기가 조금도 과분하게 느껴지지 않는 대진이지 않던가.
바로 오대세가의 소가주끼리의 대진.
그것도 다음 세대의 주인이라 일컬어지던 남궁진천과 도법으론 다음 세대에서 그 누구도 감히 따라갈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 하북팽가의 소가주, 극도(極刀) 팽도월의 비무란 말이다.
당장 강호에서 이 비무를 두고 평하는 말은 그랬다.
승자를 알 수 없는 비무.
물론 남궁진천의 재능 자체는 팽도월에 비해 경이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시간은 두 사람에게 공평하게 흐르지 않았다.
제아무리 재능이 넘치는 남궁진천이라 한들, 그보다 10년은 앞서 태어나 온갖 호화로운 보조를 받으며 성장한 팽도월을 당장은 이길 수 없으리란 평이 나온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진천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을 우둔하다 이르며 팽도월의 승리를 거듭 점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상황이면 무엇이겠는가.
이 청룡비무회 어딘가에서 내기판을 벌인 이들의 장사에 큰 호황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번 비무에 정확히 5대5로 표가 갈렸다지!”
“나는 극도에 걸었네! 자네는?”
“무조건 검룡이지!”
곳곳에서 그런 말들이 오갔다.
그리도 수많은 열기와, 금전이 걸린 긴장감이 한데 어우러진 비무대 위.
팽도월이 말했다.
“오랜만이군. 지난 용봉지회 때 구경을 갔었는데 기억하고 있나?”
남궁진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만난 일이 있었던가?
모르겠다.
그 당시의 남궁진천은 회가 시작하자마자 자신을 도발해온 목리원에 관한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
남궁진천은 무어라 답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고, 팽도월은 그 기색만으로 무언가를 눈치챈 것인지 허허롭게 웃었다.
“…여전하군. 내 자네의 관심사가 될 수 있도록 승부에 최선을 다해야겠어.”
“극도 팽도월. 잊은 적 없다.”
“이름은 기억해주니 이걸 또 감사하다 해야 할까.”
스릉―
팽도월이 도를 뽑아들었다.
남궁진천 또한 검을 뽑았다.
와중 팽도월이 물었다.
“아참, 묵룡은 잘 지내고 있는가?”
“음?”
“내 누이가 묵룡에게 푹 빠져버려서 말일세. 기억하는가? 예전엔 자네와도 혼담이 오갔지 않나. 자네가 어린아이에겐 관심 없다며 차버린 아이 말일세.”
기억하고 있다.
팽가의 하나 있는 여식 팽지월.
묵룡에게 빠져 있다라, 남궁진천은 코웃음을 쳤다.
“지아비를 엿바꿔먹듯 바꾸는 지조 없는….”
“…내 앞에선 그러지 말아주시게. 그래도 동생 욕을 함께 해줄 순 없다네.”
“유념하지.”
팽도월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여간 참 한결같단 말이지.”
자세를 잡았다.
남궁진천 또한 검을 앞으로 치켜들었다.
심판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위로 든다.
다른 말이 더 오가지 않을 것을 직감한 듯, 심판이 손을 아래로 휙! 떨군다.
“개(開)!”
바로 팽도월이 쏘아져 나온다.
검과 검이 맞닿으며 챙! 하는 소리가 인다.
그리고 곧장 기파가 터져나와 공간을 휩쓸기 시작했다.
초절정의 무인이 행하는 비무라, 그것은 그 아래 경지의 무인들이 싸우는 것과는 꽤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서로의 심상, 의, 기의 밀도와 마음의 굳건함이 맞닿은 검을 통해 서로에게 전해진다.
그런 것들이 더욱 심장을 날뛰게 한다.
남궁진천은 팽도월의 거센 공력을 받아내며 눈빛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역시 오대세가의 소가주.
여느 상대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아마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기지 못했리라.
목리원을 만나기 전, 그 오만에 찌들어있던 자신이라면 지금은 때까 아니라며 패배를 수용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기리란 자기합리화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그럴 순 없다.’
하나 이젠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의 남궁 진천은 패배가 얼마나 쓰라린지, 넘어야 할 벽이 얼마나 높은지, 그리고 멈춰 서는 것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 내기, 안 잊었죠?
서예가 직전 속삭였던 말이 남궁진천의 머릿속에 가득 맴돌고 있었다.
남궁진천의 뺨에 홍조가 깃들었다.
팽도월은 순간 의아함을 내비쳤다.
그 순간 팽도월의 검이 흔들린다.
남궁진천은 틈을 노려 크게 기파를 터뜨렸다.
쩌어어어엉!
제왕검형의 묘리를 담은 검이 팽도월을 크게 밀쳐낸다.
그리고 기파로 그를 억류, 검을 내리찍는다.
콰아아아아앙!
단번에 끝내진 못했다.
하나 유의미한 타격은 생겼다.
남궁진천은 멈추지 않았다.
검을 연신 휘둘렀고 그리하며 승리에 대한 의지를 더욱 확고히 태워 올렸다.
그리 할수록 진해지는 갈망이 있는 까닭이다.
‘내기.’
내기라 함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일.
즉, 패자가 되어 비참함에 몸을 떨지도 모르는 일이다.
남궁진천은 앞서 말하기를 더 이상 패배 따윈 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었다.
지금 노력하는 것은 그런 이유라고 남궁진천은 속으로 뇌까렸다.
‘그저 지기 싫을 뿐이다.’
입맞춤엔 큰 관심 없다.
진짜다.
생각하며 검을 휘두르던 중.
채애애앵!
“검룡!!! 스으으으으응!!!”
어느새 승부가 끝났다.
고개를 돌려 관객석 어딘가를 보니, 서예가 빙긋 웃으며 입술을 검지로 톡톡 치고 있었다.
남궁진천의 얼굴이 더욱이 붉어졌다.
“…검룡? 어딜 보는 건가?”
팽도월은 그저 답답하고 의아해 그리 물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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