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2 십사장 - 청룡비무회 (12)
* * *
한결 같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발전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 서예는 이리 말할 것이다.
“갈수록 철이 없어지시네요.”
남궁진천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눈꼬리가 조금 솟은 게 화가 난 것처럼도 보여, 서예는 쿡쿡 웃어버렸다.
말은 이리 해도 반가운 기분이 들어버리는 까닭이다.
아무렴, 남궁진천을 만나러 오며 했던 고민이 참 많지 않았나.
그가 자신을 잊었으면 어떡할까, 혹은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으면 어떡할까.
떠오른 여러 고민에 그를 미행하는 순간까지도 속이 타는 기분이었다면 설명이 되겠는가.
하지만 다행히 남궁진천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서예가 턱짓하며 말하자 남궁진천이 황급히 검을 거뒀다.
머쓱하기라도 한 건지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와중에 보이는 것은 살짝 붉어진 뺨이었는데, 그것이 묘하게 서예의 기분을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뭣하러 여기까지 왔나. 흑도 계집.”
“서예에요. 흑도 계집이 아니라.”
“흥, 흑도 계집이다.”
“되게 특이하시네. 검은 이름까지 붙여가면서 부르는 주제에 사람 이름은 제대로 안 불러요?”
남궁진천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이윽고 말했다.
“…검에 진심인 것뿐이다.”
저것도 변명이라고 하는 걸까.
서예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다가 말을 이었다.
“알려드려야 할 일이 생겨서 왔어요. 겸사겸사 당신 얼굴도 보고.”
남궁진천의 뚱한 얼굴 위로 홍조가 진해졌다.
“날 봐야 할 이유가 있나?”
기분 좋은 주제에 숨길 거면 제대로 숨기기나 하지.
서예는 저 멍청한 얼굴에 지난 날의 입맞춤을 떠올려버렸다.
사실 반쯤 억지로 한 것이었지만, 그는 입맞춤을 피할 수 있는 무력이 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으니 아주 싫어했다곤 말할 수 없을 터.
“이유가 필요해요?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장난기를 더해 말하자 남궁진천이 괜히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
입꼬리에 힘이 가득 들어가 있는데, 웃음을 참는 것도 같았다.
조금 더 괴롭혀보고 싶은 얼굴.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냥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라 서예는 ‘큼’ 헛기침하고 말했다.
“마교에 대한 정보를 얻었어요.”
남궁진천이 바짝 굳었다.
고개가 홱 돌아갔다.
서예는 진중한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비무회 참가자 중에 마인이 있다는 첩보예요.”
본론에 들어갔다.
*
해가 다 저물어가는 시간.
그제서야 서예는 용봉단 전원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변하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이별한 후 그리 큰일을 겪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행스럽게도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정보가 무엇이오?”
용봉단 전각의 집무실에서 당화서가 물었다.
서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들으신 대로예요. 이번 비무회 본선에 마인들이 출전했다는 첩보가 있다구요.”
“그건 알고 있소. 실제로….”
“맹 쪽에서도 마인을 잡으셨었죠. 단주님도 한 건 하셨다면서요?”
당화서가 움찔했다.
다른 단원들은 깜짝 놀라 당화서를 바라봤다.
그것을 통해 서예는 알 수 있었다.
“아, 단원들한테도 비밀로 하셨나요?”
어지간히 극비로 처리한 듯했다.
“소저! 그게 무슨 말이오? 이번 비무회에 마인이 있다니….”
“…극비 사항이라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목리원에게 답한 당화서가 한껏 날카로워진 얼굴로 서예를 노려봤다.
꽤 무서운 얼굴.
서예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한발 물러섰다.
“죄송해요.”
“어떻게 아셨소?”
“너무 얕보시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나 하오문주인데.”
“맹 안에 세작을 심어두셨다는 말로 들리오만.”
“꼭 맹 안이 아닐지도 모르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잖아요.”
정보의 출처까지 밝힐 생각은 없기에 돌려 건네는 말이었다.
당화서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지만… 어쩌겠는가.
서예는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맹이 아닌 당화서를 찾아온 것이고.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서예는 팔짱을 꼈다.
“중요한 건 저희가 얻은 정보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정보가 맹에 꽤 유익하게 정보라는 거고.”
“알려주는 이유는?”
“빚 청산, 그리고 이이제이 정도로 하죠. 마인들은 저도 골치 아파서요.”
당화서의 가라앉은 눈길이 전신을 쿡쿡 찔렀다.
서예는 그것들을 최대한 흘려넘겼다.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니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일단 들어보지.”
당화서가 수긍했다.
서예는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내뱉었다.
“처음은 작은 이변이었어요.”
꺼내는 것은 얼마 전, 이들이 한창 사천을 뒤집어놓던 시기의 일이었다.
“하오문을 정상화하려고 귀주 전체를 다 돌던 시기였죠. 거래가 끊긴 거래처와 다시 계약을 해야 했고, 죽어버린 문도들도 다시 채워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금이 필요해진 거예요.”
“그 얘기가 지금 관련이 있소?”
“있죠. 그 자금 관련 내용이 지금 우리가 하는 대화의 핵심이 될 텐데.”
“…말해보시오.”
“천하상단.”
당화서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천하상단에서 다가온 거예요. 우리가 자금을 대주겠다고 하면서요.”
중원 무림의 모든 정보를 취급하는 게 하오문이다.
지금이야 세가 약해졌다곤 하나, 그럼에도 그 문주 자리에 정도 앉아있으면 서예도 아는 게 있었다.
“수상하더라구요. 그네들이 세가 기운 하오문에서 뭘 뽑아낼 수 있다고 자금을 대주겠다고 하는 건지가.”
“투자일 수도 있지 않소.”
“상인은 바보가 아니죠. 그것도 15년만에 중원 전체를 아우르는 대상단이 된 천하상단의 주인이라면 더욱 그럴 거예요. 그치들은 하오문에 투자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정보망을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인 집단이란 말이에요. 그런 자금력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거절했죠. 그러고도 마음이 영 안 놓여서 따로 찾아봤어요. 천하상단의 자금 흐름이 어느 쪽을 향하는지.”
톡, 톡.
서예는 상 위로 펼쳐진 지도 중, 이곳 호북 무한을 가리켰다.
“여기로 집결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인간들이 후원한 무인들 중 비무회에 참가한 무인들이 있었구요.”
“상단이 무인을 후원하는 것은 흔한 일….”
“그 후원한 무인들이 마인이라면요?”
당화서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서예는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맹에서 잡아들인 마인. 그것들 모두가 천하상단의 후원을 받고 있어요. 직접 받은 게 아니라 삼 단계, 사 단계를 거친 우회 경로로.”
그러니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말하는 것이다.
“하오문은 천하상단이 마인들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판단하고 있어요.”
공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
당화서는 그 길로 보고를 위해 떠났다.
서예는 굳이 당화서를 따라가지 않았는데, 이유는 즉슨 하오문주의 얼굴을 맹 사람들에게 밝힐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당화서 또한 그 점을 이해한 듯 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고, 그렇게 서예는 전각에 남아 정원을 바라보며 남궁진천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정보, 확실한 건가.”
남궁진천이 물었다.
서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과정에서 얻은 정보가 거짓 같진 않아요. 물론 그걸 믿고 따로 조사할지 말지는 맹이 결정할 일이지만.”
“….”
“왜요?”
“중원 무림이 참 안일했다는 생각을 했다.”
“되게 의외네요.”
“무엇이 말인가.”
“당신이 진중한 고민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요.”
남궁진천의 입이 꾹 다물렸다.
서예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에요. 어쩔 수 없죠. 그만큼 치밀했으니까요. 저는 무림맹 입장도 이해는 되거든요.”
“무림맹의 입장?”
“그렇잖아요. 천하상단이 좀 큰 상단인가요? 중원 제일하면 가장 먼저 오르락내리락하는 상단에, 그치들과 연관된 마인이 흘러들어온 경로도 삼중 사중으로 우회되어 있어요. 그걸 조사하려면 맹이 상단과 척을 지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 위험성을 감내하면서까지 상단을 조사하려면 부담이 됐겠죠.”
“모르겠군.”
“네, 이해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칼부터 뽑는 인간이니 어련할까.
서예는 작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여하튼 저도 이젠 이 일에서 손 놓을 거예요. 괜히 알아낸 사실이 찝찝해서 찾아왔고, 목표를 달성하기도 했으니까요.”
“바로 돌아가는 건가?”
“글쎄요.”
남궁진천의 얼굴 위로 아쉬움이 얼핏 보였다.
서예는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당신 비무나 좀 구경하다 갈까, 그런 생각 중이에요.”
남궁진천의 눈이 슬쩍 커졌다.
“그렇게 자랑하는 무공 실력 구경이나 실컷 하다 가려구요.”
남궁진천의 입꼬리에 힘이 들어갔다.
또 웃음을 참으려는 듯했다.
그는 이윽고 시선을 전방으로 던지며 말했다.
“…후회하진 않을 거다.”
자신감이 짙게 묻어나는 말이었다.
이것은 서예가 보기에 그가 그나마 사내답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어울리기도 하고, 또 어색하기도 해서 서예는 장난스레 물었다.
“그래 놓고 지면 어쩌려구요?”
“지지 않는다. 나는 패배를 모르니까.”
“아시잖아요. 용봉지회 준우승이시면서.”
남궁진천이 눈을 부릅뜨며 노려봤다.
흰자위로 핏발이 서 있었다.
서예는 아랑곳않고 이어 말했다.
“제 말 틀렸어요?”
답하지 못하는 걸 보면 기억에서 지운 건 아닌 듯하다.
와중 남궁진천이 말했다.
“…감당할 수 있겠나? 그 말을.”
“제가 그걸 왜 감당해요? 제가 진 것도 아닌데.”
남궁진천은 저러다 눈알이 빠져나오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눈이 더욱 부릅 떴는데, 서예는 그 생김새가 너무 웃겨 까르륵 웃어버렸다.
“진짜 바보 같아요. 하지 마요.”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럼 어린애로 해요. 칼에 이름이나 붙이는 어린애.”
“나는 스물둘이다.”
“네, 저는 스물다섯이구요. 저한테는 애 맞잖아요?”
하여튼 오냐오냐 자라서 그런지 연장자에 대한 예우가 없는 인간이다.
서예는 그저 빙긋 웃으면서 남궁진천의 답을 기다렸다.
남궁진천은 부르르 주먹을 떨다, 이내 말했다.
“…내가 이기면 어떡하려고 그러나.”
“내기라도 하잔 건가요?”
“그렇다. 나는 내 전승에 걸지. 결승까지 올라가며 단 한 번도 지지 않을 것이다.”
“저는 음… 묵룡한테 패배한다에 걸게요.”
아, 화났다.
묵룡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게 보여서 해본 도발이었는데 잘 맞아 떨어진 듯하다.
와중 배신감까지 느끼는 얼굴이 됐는데, 퍽 귀여운 면이 있었다.
서예는 한마디를 더했다.
“제가 이기면 원하는 거 하나를 들어 주세요. 세가의 이름을 걸고.”
“승낙하지.”
“빠르네요?”
“그래, 하나 내가 이기면….”
“입맞춤 해드릴게요.”
남궁진천이 덜컥 굳었다.
얼굴은 세상에 저런 바보천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멍해졌다.
입이 슬쩍 벌어졌는데, 지금이라면 파리가 들어가도 모를 듯하다.
서예는 빙긋 웃었다.
“입맞춤 해준다고요. 당신이 그만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반쯤 장난이었다.
서예는 그가 당장에라도 헛소리하지 말라고 역정을 낼 걸 예상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예상 외였다.
“…입술이 헤프다.”
떠듬떠듬 남궁진천이 말했다.
왜인지 얼굴이 홍당무 같다.
서예는 답했다.
“당신한테만 헤픈 거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어요?”
그 말에 얼굴이 더욱 붉어진 남궁진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부끄러워서 도망이라도 가는 걸까.
“어디 가요?”
쿵쿵 걷는 걸음이 우스워 물었고, 돌아오는 답에 서예도 멍해졌다.
“수련하러 간다.”
벌써부터 검을 뽑고 있었다.
서예는 그가 떠나간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참….”
성질 급하고, 응큼하다.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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