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39화 (139/334)

EP.139 십사장 - 청룡비무회 (9)

* * *

계절이 붉게 저물어간다.

무한의 전경 또한 어딜 가나 붉어 묘한 아련함과 씁쓸함을 일게 한다.

그런 계절임에도 아직 지난 여름을 잊지 못하는 듯 분위기만은 뜨겁다.

아니, 잊지 못한다기보단 그 열기가 너무 뜨거워 좀처럼 식지 않는 것이리라.

청룡비무회의 본선이 시작된 차, 이 회가 끝나기 전까지 강호의 열기는 영영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었다.

“목 소협.”

그런 한가운데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목리원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연무장 입구엔 당화서가 서 있었는데, 그 곁엔 일전 만난 일 있던 맹의 야장이 긴 함을 품에 안은 채로 웃고 있었다.

목리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저 함이 무엇인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바로 목리원인 까닭이다.

아무렴, 그다지도 기다려온 함이 아니던가.

“드디어!”

“오랜만이오. 묵룡. 내 본선의 시작에 맞춰 이 검을 전해줄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쁘오.”

만년한철로 의뢰한 검을 완성해 온 것일 터였다.

야장이 걸어왔다.

목리원 또한 야장의 앞으로 섰다.

“받아보시오.”

야장이 함을 열자 목리원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이건…!”

함 속에 고이 모셔진 것은 칼날이 새까만 검이었다.

빛을 반사하는 부분은 하얗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검은데, 목리원은 이에 마치 밤하늘을 보는 듯한 감상을 떠올렸다.

“영감이 떠오르지 뭐요. 내 묵룡의 검술을 듣다 보니 꼭 이런 검을 만들어보고 싶었소.”

목리원은 그때까지 멍하기만 했다.

홀렸다고 말해도 좋을 터다.

매끄러운 검신이 너무 요사스러워 꼭 사내를 홀리는 요녀 같다면 설명이 될까.

목리원은 뺨을 붉게 만든 채로 손을 뻗었다.

손잡이를 쥐니 한기가 올라오는데, 그것이 참 찌릿하게만 느껴져 목리원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한번 휘둘러 보시겠소?”

들어 올리니 무게는 적당하다.

쥐는 감각이 꽤 편안한데, 휘두르면 또 어떨까 싶어 목리원은 바로 허공을 그었다.

후웅―

공기를 찢으며 검이 곧게 빠져나간다.

무게중심 또한 완벽했다.

야장이 목리원의 얼굴을 가만 살피다가 말했다.

“내 작품을 만들어버린 것 같구려.”

자부심과 뿌듯함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

야장이 다녀간 직후부터의 일이었다.

당화서는 새 검을 받고 온갖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떠는 목리원의 모습에 기쁨을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엔 배신감을 느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소저! 우리 흑야(黑夜) 좀 보시오! 검신이 너무 어여쁘지 않소?!”

호들갑도 적당해야지, 저 ‘검신이 너무 어여쁘지 않소?!’만 벌써 수십 번째였다.

저것 말고도 많았다.

쥐는 감각이 너무 부드러워서 녹아내릴 것 같다느니, 밤에 끌어안고 자면 목소리가 들려온다느니, 하다하다 검이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다는 말까지.

…숨겨 무엇하랴.

당화서는 스스로의 옹졸함에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검에 질투하고 있었다.

온종일 목리원이 속삭이는 사랑을 독차지하는 검이 철천지원수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좋습니까?”

당화서가 서늘하게 물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눈치를 보고 아니라고 말하는 게 맞았다.

한데 목리원이 그런 눈치가 있던가? 절대 아니었다.

“그렇소! 나는 흑야가 너무 좋소! 이런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오!”

당화서의 표정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길을 가던 제갈산은 ‘히익!’ 소리를 내며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 정도로 험악한 표정이 되었건만, 눈치가 없어도 이리 없을 수가 있을까.

목리원은 또 검에 뺨을 비비기만 했다.

‘부러뜨릴까?’

검을 부러뜨려야 하나.

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당화서는 지워냈다.

암만 해도 그건 너무한 것 같다는 생각 탓이었다.

해봐야 목리원의 원망밖에 더 못 받을 것이다.

사고를 조금 전환해보자.

당화서는 저 관심을 제게로 돌릴 방법을 강구했고, 이내 꽤 좋은 화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본선의 대진 발표가 아닙니까.”

“아, 그렇소!”

“준비는 다 하셨는지요?”

흑야인지 뭔지가 낄 수 없는 대화 주제를 선정한 것이었다.

당화서가 대충 예상한 반응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정도였고, 그랬기에 돌아온 반응은 조금 낯설었다.

목리원이 씨익 웃었다.

그것은 꼭 큰일을 치르기 전에나 보이는 미소였고, 당화서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작은 당황을 띄워 올렸다.

“완벽하게 해냈소.”

완벽.

목리원이 좀처럼 내뱉지 않는 단어였다.

묘하게, 당화서는 기대감이라 할 것이 속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

다음날이 되어 대진표가 발표됐다.

용봉단의 단원들은 모두가 한데 모여 대진표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보인 이름은 목리원이었다.

“찾았소! 본선 첫 경기구려!”

“예, 주목도가 높은 경기에 배정되셨군요.”

당화서의 말에 혜운이 말을 덧붙였다.

“개막이 중요하잖아요? 당장 강호 전체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이 목 시주님이니 당연한 거죠.”

“확실히 그렇긴 하구려.”

제갈산이 동의했다.

목리원은 머쓱해 하면서도 대진표를 쭉 살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은 일운의 이름, 상대는 절정 무인인 듯했다.

목리원은 바로 일운에게 말을 내뱉고자 했다.

하지만 일운은 이미 제 이름을 발견하고 가라앉은 얼굴을 할 뿐이었다.

왜 저러는 것일까.

목리원은 일운의 대진표를 좀 더 세심히 살핀 끝에야 답을 알 수가 있었다.

“…아, 저 다음이 선룡과의 비무로구려.”

128강에서 일운이 승리하면 64강에서 만나는 상대가 선룡 현공이다.

이제 일운이 이번 비무회에서 노리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목리원은 더 말을 더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저 응원하는 것이다.

부디 일운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기를.

“내 이름도 있군.”

와중 남궁진천이 말했다.

목리원은 고개를 돌려 대진표 끝자락을확인했다.

남궁진천의 상대는 초절정의 무인이었다.

하나 그는 그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아 보였다.

자신감이 얼핏 보이는 것이다.

“묵룡.”

남궁진천이 말했다.

목리원은 그를 바라봤다.

“왜 그러시오?”

“16강이다.”

남궁진천의 검지가 대진표를 향했다.

“네놈이 16강까지 올라오면 우리가 만난다.”

그의 말대로 목리원과 남궁진천의 대진은 16강에서야 서로 만나고 있었다.

“이번엔.”

남궁진천의 목소리에 결의와 닮은 것이 묻어났다.

바라본 눈동자는 투기가 잔뜩 맺혀있었다.

“이번엔지지 않는다.”

으르릉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목리원은 간질간질한 감상을 떠올렸다.

함께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언젠가 목선오가 해준 말이었다.

-함께 경쟁하며 성장하는 호적수의 존재는 무인에게 참 중요한 것이란다. 그것이 적이고 아군이고를 떠나서도 그렇다.

-성장의 동기가 되어주기 때문이죠?

-그래, 사실 가장 좋은 호적수는 친우인 것이 좋다. 그러니 원아, 온 힘을 다해 찾아보거라. 너의 재능을 단지 시기의 대상이나 경외의 대상으로 보지않고 넘어서야 할 벽으로 여기는 경쟁자를 말이다.

‘스승님, 찾은 듯합니다.’

목리원은 희게 웃었다.

남궁진천은 참 멍청하고 성격 더러운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목리원에겐 유쾌하기만 한 친우였다.

그것뿐이던가, 목리원도 알았다.

자신의 성장은 일반적인 궤도에서 아득히 벗어난 기형적인 속도라는 것을.

이들 모두를 추월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임을.

하지만, 남궁진천만큼은 그런 목리원의 속도를 쫓아 함께 성장하는 유일한 사내였다.

“기대하겠소.”

“말투가 건방지다.”

“지금은 내가 이겼지 않소? 승자로서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오.”

남궁진천이 울컥하는 기색을 보였다.

부릅 뜨인 눈의 흰자위로 실핏줄이 돋아났는데, 여간 화가 난 게 아닌 듯했다.

목리원은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엔 승자가 되어보시오.”

남궁진천의 이가 빠드득 갈렸다.

“…언제까지 기고만장할 수 있나 지켜보지.”

“쉽지 않을 것이오. 내겐 이제 흑야가 있으니.”

검을 보였다.

근래 목리원의 가장 큰 자랑인 검이었고, 그것에 남궁진천은 제 허리에 찬 검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저것도 만년한철로 지어진 물건이었다.

남궁진천의 얼굴 위로 무언가를 골몰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흑야, 유치하다.”

그는 그런 말을 남기고 뒤돌아 떠나갔다.

그 순간까지도 그의 얼굴엔 골몰의 기색이 떠나지 않았다.

*

본선의 개막전이 시작됐다.

본선부터는 한 시간대에 하나의 비무만이 시행된다.

그리고 참여자들의 경지가 경지인 만큼, 비무대의 크기 자체도 여태까지와는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었다.

“와아아아아아!!!”

흥분의 도가니.

그보다 이 분위기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으리라.

그들의 얼굴엔 온갖 기대가 가득했다.

갈망 또한, 기대만큼이나 가득했다.

고수의 비무란 그런 것이다.

순간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수, 하나의 걸음에 수많은 오묘함과 가르침이 담겨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배워가는 게 있었다.

즉, 이곳에 작지 않은 돈을 들이밀고 들어온 무인들 중 대부분은 단순히 비무를 즐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저 즐기고자 온 이들도 있었다.

“곽형! 드디어 묵룡의 첫 시합이오!”

“그래 동생! 이 강호도 아는 거지! 묵룡 대협이 얼마나 비중을 둬야 할 인물인지를 말이야!”

바로 목리원의 추종자 왕허와 강호협객전의 저자 곽칠표였다.

객잔에서 우연히 만나 술을 기울이던 중 의형제까지 맺은 두 사내는 오늘 개막전의 암표를 구하기 위해 가진 자산을 탈탈 털어온 참이었다.

그만큼 기대가 컸다.

바로 시작되는 것은 지루한 개막 의례나 연설.

그것들이 지나니 맹의 무인들이 마지막으로 비무대를 점검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저기 올라온다네!”

“오! 그렇구려!”

목리원이 비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참 현실감각이 사라질 정도의 미남이다.

그의 등장에, 여느 때처럼 여인들의 찢어질 듯한 함성이 비무장을 가득 메웠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곽칠표는 화들짝 놀라 귀를 막았다.

이미 이런 경험이 익숙한 왕허만이 껄껄 웃었다.

“곽형도 참! 익숙해지시구려!”

용봉지회 때 이런 홍역을 겪어본 게 그가 멀쩡한 가장 큰 요인일 터였다.

왕허는 비무대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사내를 확인했다.

“화산의 화검(華劒)! 그가 상대로구려!”

“오… 저 사내라면 나도 알고 있네. 화산의 대제자가 아닌가.”

두 사람의 속에 긴장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첫 상대부터 강적, 목리원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두 사람으로서도 ‘혹시?’하는 생각이 떠오르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주변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이젠 숫제 괴성으로까지 느껴지는 소음이 온통 비무장을 휩쓸었다.

“이, 이길 수 있겠지!”

곽칠표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왕허 또한 미친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양측! 위치로!]

심판이 외쳤다.

그것에 일순 비무장이 고요해졌다.

검을 뽑아 드는 두 무인.

그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초절정의 압박감이 비무대를 넘어서까지 전해져 오며 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개(開)!]

그 정적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형태로 끝맺었다.

채애애앵―!

삼류 무인인 곽칠표와 왕허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오직 하나였다.

목리원이 검을 휘둘렀고, 직후 화검이 무릎 꿇었다.

다만 드러난 것은 그뿐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

비무장이 광기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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