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8 십사장 - 청룡비무회 (8)
* * *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내각주 견궐과는 이번이 처음 얼굴을 맞대는 것인 까닭이다.
혹 그의 손자 되는 진원단주 견동과의 갈등이 못마땅한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사그라들었다.
직전 들은 바에 의하면 중원 무림 전체를 위해 스스로의 명예까지 포기한 이라 하지 않던가.
그런 이가 사사로운 갈등에 이런 감정을 내비칠 리는 없다는 생각이 치미는 것이다.
당화서는 잠시 이를 앙 물다, 이내 몸을 돌려 떠나가는 견궐에게 포권을 취했다.
“내각주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깊게 숙여 위는 볼 수 없었다.
하나, 멈춰서 돌아선 그의 발은 보였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직후 견궐이 답했다.
“정진하라.”
그는 한 마디만을 남기고 바로 떠나갔다.
당화서는 여전히 멍한 기색이었다.
도통 알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와중, 기태운이 당화서의 어깨를 두드렸다.
“표현이 서툰 분이시네.”
당화서는 기태운을 바라봤다.
여태껏 봐온 그는 매사에 시큰둥하며 진중한 사람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동경하던 영웅을 마주한 소년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차기 내각주 자리에 대한 욕심이 큰 분이셨지.’
견궐을 아주 존경하는 듯했다.
당화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표현이 서툰 분이라….’
썩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보다야 기태운이 그에 대해 더 잘 알 터다.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군요.”
무조건적인 공감은 대부분의 상황에 좋은 대처가 된다.
*
며칠 뒤였다.
다른 단원들이 본선 준비로 분주한 와중에도 당화서만큼은 다른 일에 바빴다.
다름 아닌 이번 작전에서 생포한 이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취합하는 일 탓이었다.
기밀로 부쳐진 임무라는 것이 그랬다.
함부로 인력을 확충할 수 없는 만큼, 이미 그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업무를 도맡아야 하는 것이다.
제갈무연과 권표월, 기태운과 당화서까지.
내각의 무인들은 이번 일 말고도 은밀히 진행 중인 사항이 많아 도움을 줄 수 없는 만큼 그들은 살인적인 업무량을 소화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도통 그럴싸한 정보가 나오지 않는군.”
권표월이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태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퐇나 초절정의 마인을 심문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그는 마인에게서 어떠한 말도 듣지 못했다.
이유는 즉슨, 그의 혀가 잘려있는 까닭이었다.
“내각주님과 싸우던 중 혀를 깨문 것으로 보이더군. 독기가 보통이 아닐세.”
“다른 마인들은 어떻습니까?”
“역시 입을 열지 않네. 하여 그들이 비무회에 출진하며 들이민 소속을 쫓아봤는데, 하나 같이 위장 신분이었네.”
기태운이 은근한 말로 물었다.
“용봉단주. 혹시 자백을 받아내는 독은 없는가?”
“없진 않습니다만….”
당화서는 곤란함을 표했다.
“…자백 독은 상태가 멀쩡한 이에게 사용해도 급사로 이어지는 극독 중 하나입니다. 한데 마인들 상태가 좋지 않지요. 아마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죄다 죽어 나빠질 것입니다.”
“흐으… 쉽지 않군.”
기태운이 마른세수를 했다.
당화서는 고개를 숙였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네의 일도 바쁠 텐데 괜한 부탁을 했어.”
“자자, 다들 힘내시게. 아직 시일이 많이 지나지 않았나. 결과를 내보아야지.”
권표월의 말에 그새 분위기가 소강됐다.
맹의 어딘가.
그렇게 은밀한 작업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
천하상단은 중원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원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 중 하나였다.
겨우 15년만에 일궈낸 기적.
누군가는 한때의 파랑일 뿐이라 천하상단을 깎아내리지만, 그럼에도 사실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나날이 세를 불려 나가고 있었고,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 청룡비무회는 그 규모가 범상치 않다.
당연 이런 커다란 비무회를 열고 관리하기 위해선 그만한 자금력이 필요했고, 그 자금력은 맹 내부에서만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곳곳의 후원이 필요한 것이다.
천하상단은 개중 가장 큰 후원 집단 중 하나였다.
상단이 내건 조건은 하나, 무한에 지부를 내달라는 것.
무림맹은 흔쾌히 그 조건을 승낙했고, 그 결과 비무회가 펼쳐지는 장소에서 조금만 걸으면 보이는 자리에 천하상단의 무한 지부가 설립되었다.
달빛조자 구름 뒤로 숨은 어둔 밤.
그 천하상단의 무한 지부로 은밀히 들어가는 사내가 있었다.
현공이었다.
“육문의….”
“어허.”
현공이 장난스레 다그쳤다.
“무당의 현공입니다. 상단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경계를 서던 무인… 아니, 마인이 흠칫했다.
눈동자는 형편없이 떨렸고 턱에선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현공은 그 모습에 ‘푸흡’ 웃어버렸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무당의 도사가 되어 이런 곳에서 살계를 펼치기야 하겠습니까?”
속삭임에 마인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뫼시겠습니다.”
상단 내부로 들어갔다.
향하는 곳은 전각 벽 뒤에 숨겨져 있는 공간.
마인이 벽을 밀자 깊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생겨났다.
마인은 고개를 숙였다.
현공은 그를 지나쳐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채 열 걸음도 옮기지 않은 순간부터 풍겨오는 미약의 냄새.
갈수록 꿉꿉해지는 공기와 그 속에 끼어드는 달뜬 신음들.
이곳을 찾을 때마다 현공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숨까지 참아가며 얼마나 깊이 내려갔을까.
현공은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피로 지어진 마굴이었다.
바닥엔 어딘가의 기녀로 예상되는 이들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고 있었고, 침상 위엔 한 사내가 핏물에 절여져 나른하게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새 다 죽여버린 것일까.
하나 둘 스러지는 숨이 모두 잦아들어 이 공간에 현공과 사내만이 남은 후에야 현공은 무릎을 꿇었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찾은 이유를 말하라.”
“소군이 당했습니다.”
“소군이 누구더냐.”
“비무회에 초절정의 무인 신분으로 참여하려던 첩자입니다.”
“경위는?”
“맹에서 함정을 판 듯합니다.”
“쓸모없는 것들.”
사내, 소교주가 ‘쯧’ 혀를 찼다.
“생포되었나?”
“예.”
“고독(蠱毒)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현공은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냈다.
그것을 바닥에 세우자, 호리병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고독(蠱毒).
두 마리가 쌍이 되어 완성되는 작은 오공인데, 그것은 한 마리가 죽으면 다른 한 마리도 죽는 기묘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 경우, 고독이 사람의 몸에 들어가 있다면 그 고독은 죽는 순간 독을 뿜어 숙주까지 사망에 이르게 한다.
마교에서는 하나를 교인의 몸에 심고 다른 쪽을 관리인이 소유하며 혹시 모를 변절자를 경계하는 용도로 쓰고 있었다.
“당장 사용해라.”
“구하시지 않으십니까?”
“패배자에게 기회를 두 번 줘야할 이유가 있나?”
소교주의 눈이 데구르르 굴렀다.
말라붙은 검붉은색의 눈동자가 현공을 꿰뚫었다.
짙은 살기와 권태.
오로지 그 두 가지만이 눈동자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현공은 고개를 숙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호리병의 마개를 열자 오공이 기어나왔다.
현공을 내기를 발하여 그것을 터뜨렸다.
파삭―
오공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지금쯤 잡혀있던 소군은 사망했을 터.
새삼 동정 따위를 느끼는 일은 없었다.
현공은 그저 기운을 갈무리하곤 소교주를 바라봤다.
“이제 어찌하실 계획이신지요.”
“무엇을?”
“외람되오나, 이번 본선에 최소 두 명의 진출자가 필요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죽었으니 대체할 초절정의 무인이 필요합니다.”
“…그놈의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더냐.”
“예, 애초에 위장신분을 이용하기도 했고, 소군의 심사를 치렀던 맹의 무인은 모두 암살해둔 상황이니 그 신분을 그대로 이용해 다른 인물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톡, 톡.
소교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현공은 물었다.
“육마를 이용하면 되겠습니까?”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엔 못쓰는 것들이지.”
“…위장 신분을 포기하면 될 일입니다.”
“아니, 그것들은 그곳에 더 오래 있어야 한다.”
소교주가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직접 가지.”
“…초절정 정도라면 다른 교인들을 사용해도 됩니다.”
“그놈들이 해봐야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
“임무 정도는….”
“그것조차 못해 나가떨어진 버러지들이 참 많더군.”
현공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은 실로 아픈 구석을 찌르고 있었다.
중원에 침입한 지 이제 15년.
그간 만들어둔 기반 중 대부분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하고 무너져내렸다.
끄나풀 정도 되는 집단이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소교주에게는 오로지 결과만이 중요한 까닭이다.
실패의 이유는 준비가 모자란 것도, 서두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백도 무림이 너무 강했다.
그저 20여년 전 혈사로부터 꾸준히 강세를 이뤄 와 황금기를 맞고 있는 이 시대가 문제였다.
“버러지들에게 더 맡겨둘 수만은 없다.”
“소교주님의 얼굴을 아는 자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죽여라.”
“혼란이 일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일을 끝낸 후겠지. 중원을 빠져나갈 것이다.”
“…성급하다 사료 됩니다.”
“감히.”
화아아악―!
마기가 소용돌이쳤다.
현공은 숨을 흡! 들이켰다.
찢어질 듯 커진 눈은 대신 말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살기와 마기에서 오는 압박감을.
“감히, 설교를 하는 것이냐?”
소교주가 다가왔다.
그럴수록 압박감은 짙어져만 갔고 현공의 고개는 더욱 아래로 처박혔다.
“…결례를 용서하시옵소서.”
소교주의 손이 현공의 정수리에 닿았다.
어떤 행동도 더하지 않았음에도, 그 속에서 현공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떠올렸다.
한때 천살성을 품었던 이의 기세는 그리도 두려운 구석이 있었다.
“두 번 말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채비하라.”
속삭임이 있었다.
현공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처박았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항거를 용서치 않는다.
그렇다면 복종만이 있을 뿐.
“소교주님의 명을 따릅니다.”
소교주가 그를 지나쳐 갔다.
*
같은 날 용봉단의 전각.
목리원은 연공실에서 긴긴 명상을 이어간 끝에 눈을 떴다.
그 눈 속엔 청아한 별이 깃들어 있었고, 입가엔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보였다.”
그리 말한 목리원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향하는 곳은 마당이었다.
연못과 들꽃이 자라 아기자기함을 자아내는, 목리원이 이 전각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자리.
고개를 들어보니 구름 뒤에 숨은 달이 보였다.
목리원은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구름이 다 지나가고 달이 빛을 발하는 때가 되어서야 검을 뽑았다.
스릉―
검에 묵색의 빛이 아스라이 깃든다.
목리원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이내 발을 디뎠다.
검로가 허공을 수놓는다.
그 움직임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미 완성된 무언가를 쫓는 듯한 검로라 평해야 할 터다.
실로 옳은 말이었다.
탁―!
목리원이 진각을 밟았다.
그 순간 검기가 주변을 사뿐히 흔들었다.
만련이검의 3식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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