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6 십사장 - 청룡비무회 (6)
* * *
일주일이 지난날, 본격적인 청룡비무회의 예선이 시작되었다.
강호의 끓는 피가 부딪치는 비무대.
오늘 그곳으로 오르고자 하는 사내가 있었으니 바로 진원단주 견동이었다.
내각주 해파검 견궐의 손자이자 맹의 천덕꾸러기로도 이름 높은 그는 여느 때엔 보이지 않던 결연한 얼굴로 단원들 앞에 서서 말했다.
“다녀오겠네!”
견동의 염소수염이 빨딱 섰다.
단의 단주씩이나 되어 비무회의 준비에 참여하지 않고 내내 수련에 빠져있었으니 단원들의 표정이 안 좋을 법도 하지만, 그들은 그저 웃는 얼굴로 견동을 응원할 뿐이었다.
“다녀오십시오!”
“단주님! 이번엔 믿습니다!”
“옳소! 어디 가서 진원단 소속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게 해주십쇼!”
목리원과의 비무가 있던 날 이후, 견동은 확실히 변했다.
권모술수보단 원래의 천성대로 남에게 친절을 베풀기 시작했고, 그걸 가장 가까이서 본 것이 바로 이 단원들이니 어찌 그를 나무라겠는가.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그랬다.
견동은 확실히 단원들의 모범이 되고자 단의 수련에서 가장 열심히 뛰었고 그것을 앞선 첫날 비무에서 증명했다.
견동의 별호는 더 이상 둔검이 아니었다.
“동강불괴(銅姜不壞) 견동!”
“절대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사나이!”
“자자! 다들 너무 치켜세워주지 않아도 된다네!”
견동이 씨익 웃었다.
새로운 별호는 동강불괴(銅姜不壞).
그 어떤 난적을 만나도 특유의 끈기로 끝까지 서서 버틴다 하여 붙여진 별호였다.
굳이 동인 이유는 간단했다.
금이라기엔 염치가 없고 은으로 치기에도 무력이 너무 보잘것없는 까닭.
물론 견동은 개의치 않았다.
뭐가 됐든 그 둔한 검이라는 별호보단 낫다는 생각이었다.
견동은 속으로 소박한 목표를 되뇌었다.
‘꼭 예선 64강에 들어야지!’
목표는 예선 64강.
이번 청룡비무회가 초절정의 참가자만 일백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고작 일류의 경지로 오를 수 있는 한계가 그 정도였기에 설정한 목표였다.
아무렴 이런 커다란 대회의 16강 정도라면 어디가서 얼굴 정도는 들 수 있지 않겠나.
“그럼 다녀오십시오!”
단원들이 하늘이 떠나가라 함성을 내질렀다.
견동은 뭉클한 얼굴을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응원해주다니!’
감동스러워도 이렇게 감동스러울 수가 없겠다.
자신같이 못난 것도 단주라고 항상 따라주는 단원들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내 오늘 이겨서 꼭 술 한잔 돌리겠네!”
“와아아아아아!!!”
견동이 멋들어지게 돌아서서 비무대 위로 올랐다.
그리고 견동의 꿈이 좌절됐다.
“진원단주님,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야 밝혀진 오늘의 대진 상대는 용봉단의 권룡 일운.
동강불괴로는 어찌할 수 없는, 금강불괴를 문파 무공으로 전수하는 중원 무림 태산북두 소림의 대제자였다.
견동은 눈꼬리에 눈물을 단 채로 단원들을 돌아봤다.
단원들은 쩝 입맛만 다셨다.
“개(開)!”
비무가 시작됐고.
빠악!
견동은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동강불괴의 꿈은 정확히 예선 256강에서 좌절되었다.
그에겐 64강도 과분했다.
*
그날 저녁 용봉단 전각의 식당.
오늘도 둘러앉은 단원들은 낮의 비무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진원단주님은 갈수록 안색이 피시더구려. 단원들하고 사이도 아주 좋아 보였소!”
“음? 목아우는 그치를 꽤 좋아하나 보군!”
“나는 노력하는 사람은 다 좋다오!”
“오호, 확실히 진원단주가 수련하는 모습을 자주 보긴 했네.”
목리원의 싱글벙글한 말에 제갈산이 맞장구를 쳤다.
남궁진천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봐야 일류, 단주로서 모자라다.”
“저러니까 친구가 없지.”
남궁진천의 눈이 부릅 뜨여 제갈산을 향했다.
제갈산은 딴청을 피웠다.
당화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사람을 제지했다.
“그런 자리 아닙니다.”
서슬퍼런 한마디에 두 사람의 입이 다물렸다.
일운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리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매번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좋아서 하는 것인데 뭐 어떠오.”
“그래도 매일 이럴 순 없지 않겠습니까?”
겸손을 가장한 말이었지만 속내는 그랬다.
자신은 앞으로도 계속 이길 것이니 이렇게 축하했다간 매일 축하만 받게 될 것이라고.
목리원과 남궁진천을 제외한 인원은 그 뜻을 알아챘다.
와중 혜운이 말했다.
“수련 되게 열심히 하셨네요?”
샐쭉한 얼굴이었는데, 일운이 보기엔 배신감 같은 게 묻어있는 듯했다.
일운은 곤란한 듯 웃었다.
“그래도 대제자인데 대충할 수는 없지요.”
“대제자 주제에 수련도 안 하고 놀러 다닌다고 흉보는 거예요?”
“그, 그런 말이 아니라….”
“백봉, 그만하거라. 그리고 맞는 말이 아니더냐?”
이번에도 당화서가 말렸다.
아니, 말렸다기보단 타박하는 꼴이었다.
혜운은 무엇이 그리 억울한지 입까지 쩍 벌리며 당화서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그녀는 끄떡도 안 했다.
여하튼 심심할 틈이 없는 사람들이라, 일운은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벌써 가시오?”
“예, 다음 비무를 대비해 명상을 조금 하려 합니다.”
“아, 힘내시오!”
“그럼 편히들 쉬시지요.”
일운은 합장하곤 돌아섰다.
식당을 나와 걷는 복도는 적막했다.
조금 지나니 목리원이 자주 앉아 있던 마루에 왔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꽤나 정취가 묻어있는 자리였다.
어둑한 정원에 들꽃과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에 달빛이 반사되어 흐릿하게 빛나는데, 창백한 빛이 왜인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달빛을 보며 수련하는 것이 그리도 좋더구려.
오늘은 여기서 해볼까.
어쩌면 목리원의 빠른 성장에 이런 정취가 도움이 됐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운은 자리에 앉았다.
한참이나 풍경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떠올리는 것은 불공도 무공도 아닌 남은 예선 일정이었다.
‘32강이 끝이다.’
총 28명을 뽑아야 하는 만큼 대진은 32강까지만 진행한다.
거기서 경지가 가장 낮은 4명을 탈락시키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일운은 예선 참석 인원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드는 터라 그쪽은 걱정이 없었다.
거의 본선 진출이 확정된 상태.
하나 있을 변수라 해봐야 선룡 현공을 32강 전에 만나는 것.
걱정이 되느냐.
일운은 자문했고, 이내 답했다.
‘차라리 일찍 만나는 것도 좋겠구나.’
굳이 이런 번잡한 예선까지 나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뒤처질 수만은 없다는 위기감과 오기였다.
그리고 선룡은, 적어도 일운에겐 하나의 벽으로 자리한 사내였다.
돌이켜 보면 그랬던 까닭이다.
지난 몇 해의 용봉지회 동안 단 한 번도 시원스레 현공을 이긴 일이 없었다.
대부분의 승부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현공이 기권해 버렸고, 마침내 제대로 붙은 올해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분하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많은데.
생각이 이어질수록 감정이 들끓는다.
일운은 주먹을 꽉 쥐며 차오르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아미타불.”
불공을 왼다.
생각을 멈추고 이어 왼다.
어느새 손을 합장하고 있었다.
감정과 혈기를 억눌러 부동심을 바로 세운다.
그리하며 운기조식을 시작한다.
사아아―
금빛의 기파가 청명하게 일운을 감쌌다.
마치 종소리가 퍼지는 형태가 있다면 이것과 같으리라.
‘방장님.’
전대 맹주이자 현 소림의 방장인 불성(佛星) 원명.
그의 말을 되새긴다.
-비우거라. 그것이 소림이 강한 이유다. 감정의 찌꺼기와 때 묻은 욕심을 비워내야만 공이 들어갈 자리가 생김이니, 다만 비워내고 비워내어 망아(忘我)를 이루거라.
일운은 미간을 좁혔다.
‘쉽지가 않습니다. 그 무엇도 비워내고 싶지 않습니다.’
승부욕도, 오기도, 분노도.
이것을 놓아버린다면 진정 무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을까 덜컥 겁부터 났다.
‘중원이 너무 넓습니다. 너무 치열합니다. 너무 아득합니다.’
현공을 넘으면 남궁진천이 있다.
그를 넘으면 목리원이 있었고, 사성과 육왕이 있다.
그들뿐이던가.
난세가 도래했다.
마인이 나타났고 저 남쪽 땅엔 흑도들이 아직 웅크리고 있다.
이런 욕심마저 내버린다면 어찌 그들을 벌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지독한 모순이었다.
소림은 백도 무림의 중심이라 불리면서도 불자(佛子)라는 정체성 탓에 무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욕구를 버리기만 한다.
강자존의 땅에서 강자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외면한다.
그럼에도 태산북두라 하니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제가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까?’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
무인으로서, 불자로서의 소양을 모두 잡을 방법이 있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강호 무림에 나온 이후로 언제나 꼬리표처럼 달라붙어 있던 고민은 또 한 번 이어져 심상을 어지럽혔다.
스으으―
기파가 흔들린다.
*
다음날이 밝았다.
일운은 밤을 지샌 고민에 원하는 만큼 몸을 가다듬지 못했다.
아니, 여느 때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런 날이면 조금은 맞서기 편한 상대가 나와주길 바라게 되는데, 부처께선 어찌 채찍질이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듯했다.
“고상입니다.”
비무 상대로 올라온 이는 양무학관의 고상이라는 자였다.
당화서에게 들어본 일이 있는 이름.
분명 이번 기수 학관의 수석이라던가.
과연 웅혼함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일운입니다.”
일운이 합장했다.
심판이 손을 들었다.
“개(開)!”
순서가 밀려 인사를 길게 나누지도 못하는 처지가 안타깝다.
고상이 대부를 빼드는 것에 일운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우둘투둘하고 단단한 주먹 위로 금색의 기파가 덧씌워졌다.
어딜 노려야 할까.
대부를 쓰는 사내이니 분명 큰 공격을 위주로 해올 터.
가장 합리적인 추론으론 내려찍기와 휘두르기.
공격을 바로 빗겨내고 파고들어도 좋을 터였다.
…라는 생각까지 떠올린 순간, 고상이 잿빛의 기파를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 치는 공격.
추측이 빗나갔다.
일운은 당황하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쩌어엉―!
도끼 면에 주먹이 적중하며 궤도가 뒤틀린다.
일운은 보법을 밟아 그에게 파고들었으나, 고상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바로 몸을 뒤로 물렸다.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하긴, 대부를 다루는 자라면 자신보다 빠른 상대를 많이 접했을 터.
방책 정도는 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과 자신이 같지는 않으리라.
일운이 기파를 터뜨려 재차 주먹을 내질렀다.
고상이 도끼 면으로 주먹을 막으려 했다.
굳이 피해가지 않았다.
쩌어어엉―!
면을 그대로 후려쳤다.
멈추지 않고 다른 주먹을 뻗었다.
쩌어어엉―!
고상이 뒷걸음친다.
공력으로 찍어눌러 버린 것이다.
본디 일운이 즐기는 방식은 아니었다.
딱히 공력으로 상대방보다 우월했던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제와 이런 방식을 쓰는 이유는 하나.
맹에 들어온 이후 부쩍 영약과 내단을 접할 일이 많아져 이런 식의 공격도 가능해진 것뿐이었다.
안 쓸 이유가 없었다.
주먹질이 연이어 쏟아졌고 고상은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막기만 했다.
그런 양상이 한참 이어지던 중, 고상의 도끼에 쩌적 금이 갔다.
“흡!”
고상이 눈을 크게 떴지만, 일운은 개의치 않았다.
쩌어어어엉―!
그대로 전력을 실은 정권.
도끼를 깨부순 주먹이 고상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꺼헉…!”
고상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리고 무릎 꿇렸다.
일운은 주먹을 거두고 숨을 고른 후, 합장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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