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35화 (135/334)

EP.135 십사장 - 청룡비무회 (5)

* *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청룡비무회 예선 개최일.

저 멀리 수십 개의 비무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회장을 앞두고 일운이 합장했다.

“일운 스님! 힘내시오!”

“오늘은 고기 안 드… 셨겠지! 이 제갈산! 스님을 응원하오! 다녀오시오!”

용봉단의 단원들은 일운을 응원하기 위해 오늘 자리에 한데 모였다.

일운은 그것에 물밀듯 밀려오는 감동을 느꼈다.

다른 걸 다 제쳐두고서라도 당화서 탓에 그랬다.

다들 여유가 있을 때도 홀로 일에 치이는 당화서다.

오늘도 그녀 몫으로 배정된 일이 산처럼 쌓여있을 텐데, 이 비무 하나 응원 오겠다고 다 미뤄버린 게 아닌가.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운은 그저 감동에 몸을 떨었고, 단원들은 그런 일운을 보며 킥킥 웃을 뿐이었다.

“꼭 성과를 얻길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단원들과 지켜볼 테니.”

당화서가 말한다.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게 피로에 치여 사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다.

일운은 작게 웃으며 몸을 돌려 비무대 위로 향했다.

단원들에게서 등 돌린 그는, 직전의 미소를 지운 채 결연한 얼굴을 만들고 있었다.

*

중원은 넓다.

일운은 요즘만큼 그 의미를 깊이 깨닫는 순간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올해의 용봉지회에서 만난 목리원, 그리고 언제나 벽이었던 남궁진천과 끝끝내 넘어서지 못한 호적수 선룡 현공.

그들뿐이던가.

다만 그들이 세상의 적수 중 끝인 줄 알았던 제게 들이밀어진 것은 더 넓은 강호였다.

용봉단에 들어온 것은 최고의 선택이리라.

중원 각지를 여행하며 고수와 인간, 마귀를 만나며 일운은 견문을 넓혀갔다.

그럴수록 허리를 숙이게 되었다.

일운은 회상했다.

‘언제나….’

주인공은 되지 못했다.

적들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강적이었으며 그들의 상대는 목리원과 남궁진천이 도맡았다.

합리적인 선택이니 이해는 하지만, 그것이 일운의 감정적 납득까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분하다.’

불자가 되어 공명심과 상승욕 따위에 매달려선 안 될진대, 아직 수그러들지 못한 혈기는 미친 듯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나 또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고.

다만 뒤따라가는 처지만은 아니고 싶다고.

혈기가 그리 외치는 것이다.

“권룡 일운! 비무대에 오르시오!”

심판이 말한다.

일운은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첫 대진 상대는 이름 모를 무인.

하나 무력까지는 보잘것없지 않았는데, 최소가 절정 초입으로 보였다.

“절강에서 온 강해라고 하오.”

사내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삐뚜름한 자세로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거리는데, 그의 얼굴에선 오만이 보였다.

만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보이는 것도 많아짐이라.

일운은 태도와 행실, 경지와 출신지 등 한정된 정보를 통해 저 강해라는 사내의 삶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편협함을 최대한 빼고 바라봐도 그랬다.

‘떠받들어지는 삶을 살았구나.’

대략 삼십의 나이로 보였다.

그의 출신지인 절강은 명문 정파도, 거대 흑도도 없는 고요한 땅이다.

그곳에서 자랐으니 사문은 지역의 무관 정도나 될 테고, 잘해봐야 지역에서나 이름 날린다는 세가일 터다.

더 깊이 유추해보자면 그랬다.

그런 곳이라면 무공의 깊이가 명문에 비할 바 되지 못할 터다.

그럼에도 재능이 있으니 주머니 속 송곳처럼 튀어나와 언제나 우러름을 받았을 터다.

저런 오만은 그것에서 기인했을 터다.

우물 안의 개구리.

언젠가의 남궁진천이었고, 조금 더 과거의 자신이었다.

일운은 싱긋 웃으며 합장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안하게 됐소.”

“음?”

“상대가 나이지 않소. 용봉단에서 예선에 참가한 유일한 단원일 텐데 단원들 볼 면목이 없을 것 아니오?”

“승부에 앞서서 패배를 떠올리는 법을 배우진 않는 터라.”

“그래도 말이오.”

강해가 짝다리를 짚으며 말했다.

까딱이는 고개에 따라 말총머리가 휙휙 흔들렸다.

“그… 실례가 될진 모르겠지만 다른 단원들에 비해서 존재감이 옅은 편 아니오? 이번 대의 소림은 태산북두를 말할 수 없다는 소리가 종종 들려오오.”

실례가 되는 걸 알고 있는 듯한데 굳이 말하는 이유는 무얼까.

일운은 구태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높은 곳에 있는 상대를 끌어내리려는 습성은 인간의 부끄러운 본성에 닿아있었으니.

‘하지만.’

그걸 생각해도 썩 달갑진 않은 태도다.

자신에 대한 모욕 탓이 아니었다.

“소림은 굳건합니다.”

일운은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백도 무림의 태산북두.

그것은 일운이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하는 자긍심의 이름이었다.

분노는 쏟아내지 않는다.

다만 겸손을 표하며 고개를 숙이지도 않을 것이었다.

일운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저희는 무인. 이 무공으로 말하면 될 것을요.”

강해가 ‘푸흡!’ 웃었다.

“아, 좋지. 좋소. 내 기꺼이 상대해드리지.”

심판이 눈치를 보다 그제야 손을 들었다.

“그럼 시작하겠소!”

손이 아래로 떨어지면 비무의 시작.

일운은 가만히 기다렸다.

공력을 발하며, 속으로는 불공을 외며.

그저 하나, 주먹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개(開)!”

손이 떨어진다.

동시에 일운은 쿵! 진각을 밟고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강해가 그 틈에 코앞까지 와 있었는데, 뻗은 주먹은 정확히 그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뿌득―

“꺼억…!”

정확히 갈빗대가 부러졌다.

억눌린 숨이 쉬이익 삐져나온다.

강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리고 쿵! 소리와 함께 강해가 쓰러졌다.

눈꼬리에 아슬아슬하게 눈물을 매단 강해가 일운을 올려다봤다.

일운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증명했군요. 태산북두 소림.”

직후 합장하며 돌아섰다.

심판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다, 뒤늦게야 황급히 손을 들며 말했다.

“궈, 권룡 일운! 승!”

공허한 외침이었다.

*

일운의 경기가 몇 차례 더 이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단원들 사이에 기쁨이 있었고, 와중엔 경악이 있었다.

“일운 스님이 언제 저렇게 성장하셨대요?!”

혜운이었다.

그래도 같은 스님이라고 꽤 친근하게 지냈던 그녀는 이번 비무에서 부쩍 성장한 모습을 보이는 일운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악을 표하고 있었다.

‘분명 나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는데?’

한데, 지금의 그는 몇 번을 싸워도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부동심이 느껴지는 주먹, 망설임 없는 초식, 그리고 이어지는 연승.

그는 확실히, 혜운이 아는 경지에서 한발짝 더 앞서 있었다.

“당연한 일이오! 일운 스님은 그동안 누구보다 노력하셨으니!”

목리원이 말했다.

그의 얼굴엔 자부심이 있었다.

“일운 스님은 언제나 고민했소! 더 나은 무공은 뭔지, 권이란 무엇이며 부동심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협이란 무엇인지!”

“…그걸 묵룡 시주님이 어떻게 아시는데요?”

“함께 고민한 이유요!”

목리원이 활짝 웃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새삼 느끼는 감상은 그가 참 어여쁘게 생겼다는 것.

하나 생각을 더 이어나가진 못했다.

‘오’하고 탄성을 흘리는 순간 당화서가 있는 방향에서 살의가 느껴졌기에.

“그렇지만 나도 놀랍긴 하구려.”

목리원은 일운의 다섯 번째 비무를 보고 있었다.

상대는 절정 중입이었는데, 대진운이 안 좋았던 것인지 일운은 비무회에 나온 직후 내내 절정의 상대만 만나고 있었다.

지칠 만도 한데, 딱히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을 것이오. 공력이 저리 부글부글 끓는 게 느껴지는데 조금도 티가 안 나지 않소? 이건 그만큼 공력을 통제해 부동심을 완성하는데 집중했다는 말이 되오.”

이해되지 않았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목리원은 무언가를 설명할 때 감에 의존해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감은 목리원 정도의 무재가 있는 이가 아니라면 대체로 이해할 수 없는 종류였다.

혜운은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그는 목리원의 말을 이해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철저히 통제되었다. 투로, 감정, 공력. 모든 것이.”

혜운은 이내 이해하길 포기했다.

‘아무튼 성장했다니 축하할 일이지 뭐.’

몰래 고기 찬이라도 챙겨주면 좋아하려나?

안 먹겠다고 빼면 억지로 품에 안겨주면 될 터다.

그리한다면 다음 날엔 덜렁 남은 포장이 어딘가에 잘 버려져 있을 테니.

혜운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자 당화서가 말했다.

“본받거라.”

“네?”

“수련에 집중 좀 하란 말이다. 그만 나돌아다니고.”

당화서의 잔소리에 혜운은 질린 얼굴을 만들었다.

이젠 하오체도 안 쓰고 아예 사고뭉치 자식을 대하듯 대한다.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괜히 퉁명스러운 마음이 떠올라 혜운은 답했다.

“그래도 제갈 시주님보단 제가 낫잖아요.”

“음? 에이, 혜운 스님이 제 상대나 되겠소?”

파지직―

두 사람 사이에 불똥이 튀었다.

상당히 험악한 분위기였는데, 이는 얼마 전 포목점 부부를 각자 유혹하려다 당화서에게 걸린 일로 생긴 갈등이 아직 풀리지 않은 이유였다.

“허? 제갈 시주님, 솔직히 무력만 따지면 제가 위 아닌가요?”

“내가 아무리 싸우는 걸 안 좋아해도 그렇지. 그런 식의 펌하는 곤란하오.”

“펌하가 아니라 사실인데요? 왜요? 비무 한판 해볼래요?”

“또또 그렇게 나오시는구려. 주먹으로 상대의 입을 물리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니라우?”

“쫄았네. 에휴, 그럼 그렇지.”

“두, 두사람 다 진정하시오….”

목리원이 낑낑대며 두 사람을 말렸다.

남궁진천은 비무대 위만 뚫어져라 보며 구경에 집중했다.

언제나 그랬듯, 두 사람을 말린 것은 당화서의 꿀밤이었다.

빡!

정수리에 시원하게 꽂힌 주먹에 두 사고뭉치가 입을 다물었다.

*

예선 1일차가 끝났다.

일운은 15경기를 전승으로 마무리 지었고, 그렇게 예선 참가자의 9할이 첫날에 나가떨어졌다.

강행군이다.

하지만 이런 일정을 소화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미 초절정으로 비무회에 참가한 인원이 일백 가량이다.

즉, 128강 중 남은 자리는 28개에 불과한데, 그것을 오천칠백의 인원 중에서 뽑으려니 일정이 너무 길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첫날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다.

청룡비무회는 오로지 자격있는 자에게만 손을 뻗는 기회의 장.

무림맹의 의도는 명확히 ‘이 정도 강행군을 버틸 수 있는 이만 본선에 오를 자격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것도 끝.

“이제 남은 비무는 여유롭겠구려!”

용봉단의 식당.

단원들이 한데 둘러앉은 자리에서 목리원이 말했다.

일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행히 하루 이틀을 걸러 하나의 비무만 해도 되니 몸가짐을 다질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말이오! 이제 일주일간 휴식이잖소! 오늘 너무 고생하셨으니 며칠은 쉬시구려!”

강행군을 끝내고 있는 일주일의 휴식.

이 기간은 참가자들에겐 정양의 시간이었고, 구경 온 이들에겐 시작된 비무회의 열기를 더욱 달궈갈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일운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쉴 틈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절치부심하여서 수련해야지요.”

“괜찮으시겠소?”

“무인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로는 끄떡없습니다.”

게다가, 일운에겐 목표가 있었다.

‘…선룡 도사님도 나오신다 하셨지.’

용봉지회에서 자신을 무릎꿇렸던 선룡 현공.

그가 청룡비무회에 나왔다.

일정이 맞지 않아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들려온 소식으로는 그 역시 1일차를 통과했다.

일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이라면….’

쉽게 당하지 않을 터다.

바라는 것은 하나.

일운은 용봉지회에서의 설욕을 갚고 싶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전 회차에 목리원과 목선오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 빈약했다는 댓글을 받았습니다.

명백한 제 실수입니다.

내용 이해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관련하여 서술 몇 줄을 더 추가했습니다. 내용 이해엔 무리가 없도록 하였으니 두 번 보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언제나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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