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4 십사장 - 청룡비무회 (4)
* * *
시간은 다시 흐른다.
어느덧 보름이 흘러 청룡비무회의 개최일이 되었다.
공청석유 한 병이라는 유례없는 보상이 걸린 비무회인 만큼, 그 분위기는 이전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총참가자 오천팔백 명.
엄격한 기준으로 자르고 자른 인원이 그 정도였다.
기준은 경지와 배경, 그리고 짧은 무공 시연이었는데, 그런 만큼 참가 자격을 얻는 과정에서의 사고가 말도 안 되게 많았다.
“이건 말이 안 되오! 나는 더 보여줄 게 남았단 말이오! 잠시! 비무! 비무 좀 하게 해주시오! 나는 실전파라니까아아아!!!”
실전파를 부르짖으며 심사대에서 내려가지 않으려는 이가 있었다.
“내가 몸상태가 안 좋아서 그러오! 내일 다시 보게 해주시오! 응? 내가 상태만 좋으면 그냥 일류 무술도 파바박! 할 수 있단 말이오!”
오늘따라 검이 잘 안 휘둘러진다며 매달리는 이가 있었다.
“더러운 중원 무림! 결국 다 인맥이지! 이봐! 내가 누군지 알아? 나 하남성의 길상이야! 응? 10년 뒤 천하를 뒤집을 사내라고! 너희들 얼굴 다 기억해놨어! 나중에 보자고!!!”
경지도 배경도 무공도 보잘것없는 주제에 자신감만 하늘을 뚫어 심사위원에게 으름장을 놓는 이가 있었다.
“제바아아알!!! 공청석유우우우우!!!”
바닥에 누워 바둥거리며 덮어놓고 떼를 쓰는 이가 있었다.
심사위원으로 나와 있던 당화서는 진이 다 빠진 얼굴로 허공을 바라봤다.
‘세상에.’
중원이 이리 넓구나.
미친 사람이 세상에 이리도 많았구나.
어쩌면 당문의 그 악독한 것들도 이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가 아니었을까.
지치고 깎인 마음은 과거를 미화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단주께서 참 고생이 많구려.”
옆에 앉아있던 금검 권표월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당화서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어쩌겠습니까. 단원이 적어 생기는 일이니.”
본디 심사위원은 각 단의 중진들이 시간대별로 돌아가며 하는 게 보통이었다.
금검 권표월도 다른 업무를 보다 이제 막 도착해 앞으로 한 시진을 심사에 참여한 것이었다.
하지만 용봉단은 달랐다.
총인원 6명.
개중 절반이 이번 비무회에 참가하니 심사에 낄 수 없었고, 나머지 둘은 다른 업무를 맡겨놓아 이곳에 부를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당화서는 제 몫의 업무를 이곳까지 들고 와, 심사 중간중간에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권표월의 얼굴 위로 안쓰러움이 맺혔다.
당화서는 미소 짓는 것으로 그 기색을 넘겼다.
그렇게 또 심사가 이어지던 중.
“오, 이번엔 학관 출신이구려.”
권표월이 그리 말했다.
당화서는 바로 인명부를 확인했다.
‘고상?’
고상이라는 이름의 무인이었고 강서성의 양무학관에서 온 무인이었다.
양무학관은 맹의 산하에 있는 학관이었는데, 해마다 용봉지회 본선에 다다르는 걸출한 무인을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실제로 이번 용봉지회에서 남궁진천의 상대 중 하나로 양무학관의 차석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일 합에 무너져내렸지만 말이다.
그것과 별개로 당화서는 의아해했다.
“보통 학관 아이들은 용봉지회에 참여하려 할 텐데요. 특이하군요.”
“꿈이 높은 것 아니겠소. 또래가 아닌 중원 전체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다는 것이겠지. 여기 보시오. 이번 기수의 수석이라고 하지 않소.”
“호오….”
다시 바라본 고상은 눈썹이 짙고 몸집이 큰 사내였는데, 반질반질한 피부에 후기지수라는 게 느껴졌다.
굳이 나이를 따지자면, 이십 대 중후반쯤 되어 보였다.
무기는 대부(大斧)였다.
‘도끼를 사용하는 무인이라.’
학관의 수석이라 하면 보통 범용성이 높은 무기를 사용하는 이가 보통인 걸 생각하면 색다르긴 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다른 심사위원들의 지친 기색 위로 호기심이 피어있는 게 보였다.
“양무학관의 고상입니다.”
고상이 포권했다.
권표월이 말했다.
“반갑소. 바로 시작해주시오.”
호기심과는 별개로 뒤에 대기 중인 사람이 너무 많아 많은 시간을 줄 수 없기에 내뱉은 말.
고상은 고개를 끄덕이곤 메고 있던 대부를 한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딱 한 수를 보였다.
사아아―
회색의 기파가 그의 몸에 맺혔다.
그리고 고상이 바닥을 찍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쩍 갈라졌다.
순간 공간에 정적이 일었다.
‘절정!’
당화서는 탄성을 내질렀다.
학관의 학도가 절정이라니.
기파가 불안정한 것이 이제 막 초입에 이른 수준이지만 꽤나 감탄이 나오는 경지였다.
“호오, 절정이라….”
“우연히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을 테지. 통과요.”
권표월이 흡족하게 말했다.
당화서 또한 비슷한 얼굴이었다.
별 시답잖은 것들이나 보던 중 간만에 무인 다운 이를 보니 이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본선에는 가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예선에서 좋은 모습은 보여주겠구나.’
본선은 총 128강, 즉 128명만 뽑으니 겨우 절정 초입으론 들어서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미 있는 성과다.
명문이 아닌 학관의 무인이 젊은 나이에 절정에 다다랐다는 것은 무림 전체에도 긍정적인 소식이었으니.
“힘내보시오.”
당화서는 웃으며 그리 말했다.
고상은 포권하며 예를 취하곤 자리를 떠나갔다.
그렇게 환기된 분위기.
고상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잠시 이어졌으나 길게 가지는 못했다.
“아니이이이이!!! 내가 검성이라니까?! 반로환동했다고! 근데 내공을 다 잃어버렸다고! 공청석유 한 병이면 다시 경지 찾는다고오오오!!!”
중원은 넓고, 미친놈은 많았던 까닭이다.
와중 당화서는 흠칫했다.
검성 목선오.
그것은 목리원의 스승이자 어버이가 되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사천에서 돌아오던 중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당화서는 무심코 생각했다.
‘목 소협이 이 광경을 봤으면 큰일이 났겠구나.’
아마 저 사내는 목리원의 아주 진한 분노를 감내해야 하지 않았을까.
라고.
*
그날 저녁, 용봉단의 전각 식당.
“스승님을 사칭하는 이가 있다니!!!”
역시나 목리원이 노발대발했다.
당화서는 작게 쿡쿡 웃었다.
이야기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그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이 이야기를 목리원에게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해진 까닭이었다.
생각보다는 격렬한 반응.
붉어진 얼굴과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그의 분노를 보여주고 있었다.
당화서는 장난은 이만 두고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너무 그리 화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마다 하나씩은 있는 부류라.”
“그래도! 내 성련문의 11대 제자로서 감히 좌시할 수 없소! 그 사내가 누구요! 가서 꿀밤을 크게 먹여줄 것이오!”
기껏 한다는 일이 꿀밤이라니.
귀여웠다.
“그래도 다르게 생각하면 좋은 것 아닙니까?”
“음?”
“아직 검성 대협을 기억하는 분들이 이다지도 많다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목리원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아…’하는 소리를 내곤 붉어진 얼굴 위로 머쓱함을 띄워 올렸다.
“…그것도 그렇구려.”
왜인지 기뻐 보였다.
이제와 그의 사문을 알게 된 당화서는 새삼 생각했다.
목리원이 그의 스승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 같다고.
보기 흐뭇했고, 한켠으론 시큰거렸다.
목리원의 저런 사제관계는 당화서가 평생을 꿈꿨음에도 이루지 못한 것이었기에.
‘…무슨 주책을.’
당화서는 생각을 털어냈다.
그리하곤 물었다.
“그러고 보니 목 소협, 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아! 다행히도 그렇소! 곧 만련이검의 삼식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소!”
“그것 참 다행인 일입니다.”
“내 초절정에 오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심득도 심득이지만 실질적인 이득이 있지 않았소? 예선을 생략해도 된다니. 초절정은 무림에서 참 인정받는 경지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소. 덕분에 시간도 벌었고.”
목리원의 말은 옳았다.
초절정에 오른 무인은 예선 없이 바로 본선 진출이 가능했다.
어차피 통과할 것이 뻔한 게 첫 번째 이유요, 두 번째는 초절정의 무인이라 하면 중원 무림 전체에서도 떠받을어지는 경지기에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목리원이야 예선도 좋다고 나갈 인간이었지만, 능력 있는 것들은 대체로 콧대가 높지 않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남궁진천만 봐도 그랬다.
예선을 안 해도 되니 좋겠다고 일운이 말하자, 남궁진천은 코웃음 치며 말했었다.
-그딴 떨거지들이랑 검을 섞으라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모욕이다.
한순간에 떨거지로 전락한, 예선부터 올라와야 하는 일운이 슬퍼한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리라.
“예선이 한 달에 본선이 한 달. 한동안은 죽었다고 생각해야겠군요.”
“고생이 많구려.”
“그래도 일이니 해야지요. 게다가….”
“게다가?”
“…아닙니다.”
당화서는 말을 흐렸다.
‘지금 목 소협에게 굳이 알릴 필요는 없겠지.’
이번 청룡비무회의 진짜 목적.
그런 걸 알았다간 목리원이 비무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당화서는 굳이 그에게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알게될 것을.’
목리원은 그저 때가 올 때까지 비무를 즐겨주었으면 했다.
*
양무학관의 기수 수석 고상.
그는 맹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의 허름한 판자집에 들어섰다.
그 안에서 고상을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는 새하얀 도사의 복장에 싱긋 웃는 미소에선 허허로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허리에 찬 검엔 무당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검자루에 탄 때가 사내가 얼마나 많이 이 검을 휘둘렀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사내는 바로 선룡(仙龍) 현공.
무당의 이번 대 대제자이자 천마신교에서 중원으로 온 첩자 중 하나였다.
고상은 고개를 숙였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되었습니다. 그런 인사치레는.”
“예.”
고상이 고개를 들었다.
현공은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꽤나 기뻐하고 있었는데, 그리하며 중얼거리는 말은 그랬다.
“말코 도사 놈들이랑 있으려니 이 맛이 참 그리웠지요.”
“예.”
“마침 청룡비무회가 열려서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렇습니다.”
현공이 잔을 들어 입안에 술을 머금었다.
그리고 꼴깍, 목 뒤로 넘긴 후 끅끅 웃으며 말했다.
“몇을 심었습니까?”
“저와 같은 절정으로 이십, 초절정 하나를 심었습니다.”
“심었다?”
“…오셨습니다.”
“그래요. 강자존. 우리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아닙니까.”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현공의 시선이 고상에게 틀어박혔다.
“실수는 없어야 할 터입니다. 소교주님께서 이번 일에 기울이는 관심이 크시니.”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도 나갑니다. 청룡비무회.”
고상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 위론 놀라움의 기색이 맺혀 있었다.
“…직접, 말씀이십니까?”
“예, 다행히 무당이라는 좋은 배경이 있지 않습니까. 들어오기도 쉽고, 만약의 상황에 대처하기도 편하니 안 할 이유가 없지요.”
고상은 입술을 우물대다, 이내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그리 알겠습니다.”
“되었으면 가십시오.”
“천마군….”
“그건 됐다니까.”
움찔―
고상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제게서 시선을 떼곤 또 술에 집중하는 현공을 보며 생각했다.
‘당최….’
무슨 생각인지 모를 인간.
하나 저항할 수는 없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첩자로 살아온 기인이긴 하지만, 그는 엄연한 마도육문(魔道六門) 중 하나의 후계자이기에.
‘…뜻이 있는 것이겠지.’
천마신교의 1급 첩자 고상.
그는 평생을 배워온 대로, 신교의 일에 의심을 품지 않기로 했다.
밤이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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