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31화 (131/334)

EP.131 십사장 - 청룡비무회 (1)

* * *

중원 무림 전체가 들썩였다.

아무렴, 백도 무림의 기둥 중 하나인 사천당문의 비행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것을 밝힌 게 가문의 소가주인 독봉 당화서였으니, 그 환란에 뒤따를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소식의 파급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그랬다.

아직 살아있는 이들이 기억하는 가장 큰 환란인 혈사 바로 다음 가는 환란.

사천의 지주나 다름없던 당문의 몰락은 그리도 수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렇게 어딜 가나 사천당문의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한가운데.

당화서는 맹주전에서 사백운과 독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요청한 독대였다.

목리원이 일렀던 대로, 독대가 이어지는 자리는 사방이 대나무로 둘러싸인 숲 한가운데의 암자였다.

“그래. 고생 많았네.”

사백운이 백주를 따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조금 침잠해 있었고, 또한 씁쓸해져 있었다.

당화서는 이해했다.

독왕 당사극.

자신에게는 한없이 원망스러웠던 사내였으나, 이 남자에게는 한때의 전우였던 사내이니 여러 감상이 드는 것일 터다.

“…고생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자멸이었으니.”

“그럼에도 말하는 것일세. 자네가 쉬이 할 수 없는 일일 텐데 결단 있게 나서주지 않았나.”

“저는 맹의 무인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허허, 기개가 있어서 보기 좋군.”

사백운은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잔을 내려두며 당화서에게 일렀다.

“자네는 마시지 않나?”

“취기에 몸을 맡길 수 없는 몸입니다. 이 잔은… 이것을 더 잘 즐길 수 있는 이와 함께해주십시오.”

“그냥 마셔도 된다네. 지금 자네보다 이 술잔을 나누고 싶은 이는 없으니.”

“…그렇다면.”

당화서는 조심스레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맑고 청량하다.

하나, 역시 그 이상의 느낌은 없었다.

당화서는 쓰게 웃다 일렀다.

“이리 독대를 요청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그래, 대충은 예상이 가네.”

“당문을 없애주십시오. 그 무엇도 남기지 않고.”

당화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백운은 곤란한 듯 웃었다.

“미안하네.”

“왜 당문을 남기겠다 하시는 겁니까.”

이것이었다.

독대의 이유가.

사백운은 그리 비행한 당문을 남기겠다 선언했고, 그 책임자로 당화서를 지명했다.

당화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당문의 비행은 비단 문파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백도 무림 전체에 남을 좋지 않은 선례였다.

한데 어찌 사백운은 그들을 엄하게 처벌하지 않는 것인가.

돌아온 답은 그랬다.

“자네를 향한 내 사죄의 뜻으로 알아주게.”

“예?”

“사실, 나는 알고 있었네. 모든 걸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당문이 자네를 이용해 무엇을 한 것이지 정도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

당화서의 입이 다물렸다.

사백운의 미소는 조금 더 가라앉았다.

“알면서도 나설 수 없었네. 백도 무림엔 더 많은 파벌이 필요했고, 그들이 서로 경쟁하고 성장하며 견고한 성이 되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네. 그래, 나는 외면한 것이네.”

그리 말하는 사백운은 참으로 미안한 기색이었지만, 그것을 후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또한 저 말이 뜻하는 바가 있었다.

“…필요하다는 이유로 남겨두시겠다는 말입니까.”

“용봉단주.”

“이르십시오.”

“사천당문은 거대한 문파네.”

“알고 있습니다.”

“그 문파는 비록 이번 비행으로 세가 약해졌다 한들 여전히 강한 문파일 걸세.”

“그렇기에 지워야 하는….”

“그렇기에 남겨야 하는 것일세.”

사백운의 시선이 바로 당화서를 향했다.

“자네는 뒷배가 필요해.”

덜컥―

당화서의 몸이 멎었다.

눈은 큼지막하게 뜨이고 있었다.

사백운은 말을 더했다.

“자네의 원망도, 분노도 모두 이해하네. 하지만 그것을 떼어놓고 생각해보시게.”

당화서는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다.

독봉 당화서는 단신으론 강호 무림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중 하나일 뿐이었다.

비슷한 수준의 무인이라면, 몇 살 위로 가면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자신을 진정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오대세가 중 하나의 다음 주인이라는 배경이라고, 사백운은 그 사실을 이르고 있었다.

“감정적 불호를 감수하고서라도 사천 당문을 남겨야 해. 그래야 자네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고, 우리가 백도 무림을 지킬 수 있는 걸세. 독왕이 마공을 사용한 일을 밝히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네.”

“….”

“그저 가문의 치부를 들킨 정도로 일을 무마할 수 있네. 마공의 흔적? 세상에 그걸 찾을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나. 독왕의 시신은 이미 다 녹아내렸을진대.”

옳은 말이다.

당화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했다.

사백운은 허허 웃으며 말을 더했다.

“가문을 어찌해도 좋네. 그들을 괴롭혀도 좋고, 방치해도 좋네. 그 생사여탈권이 내가 자네에게 하는 사죄라네. 그러니 당문을 등 뒤에 이고 계시게. 참으로 다행히도….”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금의 무림은, 당문의 허물보다 그것을 스스로 밝힌 자네의 호협함을 사랑할 걸세. 나와 자네의 선배들이 만든 것은 그런 시대니까.”

선배라.

당화서는 그 말을 곱씹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역시 관련자들은 처벌해주십시오.”

“그리 알지.”

“그럼 이에 관련된 화제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게.”

사백운은 당화서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를 일렀다.

앞으로 있을 맹의 행보에 관한 이야기였다.

퍽이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갔다.

*

“목아우, 꼴이 왜 그러나?”

용봉단의 전각.

목리원은 멍하니 마루에 앉아 마당을 보던 중, 제갈산의 목소리에 정신을 일깨웠다.

제갈산이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목리원은 답했다.

“…제갈 형이구려. 나는 명상 중이었소.”

“음? 명상을 그 자세로 한다고?”

“그 자세라니?”

제갈산의 말에 목리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다리를 끌어안은 채 앞뒤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것일까.

목리원은 한숨을 쉬다가도 또 상념에 빠져버렸다.

그럴수록 얼굴은 붉어져 갔다.

‘또….’

생각나는구나.

사천에서 있었던 일이, 그곳에서 당화서가 했던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런 순간마다 마음은 이리 싱숭생숭해졌다.

얼굴이 뜨겁다.

사고는 계속해서 당화서의 뒤를 쫓는데, 그것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이젠 당화서 외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수련에도 지장이 가고 있었다.

이것은 목리원이 보기에도 심각한 상태였다.

마침 제갈산이 근처에 왔으니 상담이라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유부녀에 관한 것 빼곤 대체로 현명한 제갈산이니 그에게 묻는 것도 좋겠다 싶어, 목리원은 입술을 뗐다.

“제갈형. 내가 큰 병에 빠진 것 같소.”

“응?”

“들어 보시오. 요즘 말이오….”

이어 말하는 것은 조금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근래 들어 한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고,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이야기.

왜인지 그 사람의 품이나 향기가 떠오르고 그것을 뒤쫓게 된다는 이야기.

거기에 마음이 너무 산만해 수련에 집중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도.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제갈산은 멍해졌다.

*

“목아우. 그러지 마시게.”

제갈산은 말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기어코!’

당화서가 그 음험한 마수를 목리원에게 뻗쳤구나!

목리원이 부끄러워하며 말을 돌리는 걸 보니, 분명 당화서가 육체적인 폭력을 행사한 것일 터였다!

이 순진한 목리원을 타락시킨 것일 터였다!

제갈산은 마음이 급해졌다.

“잘 생각해보시게. 응? 누님이 어디 보통 사람이던가? 자네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일세. 누님은 어깨를 두들기는 척하면서 사람을 중독시키는 인간이네. 위로하는 척 뒤로는 칼을 가는 사람이란 말이야! 언제 그 마수가 자네에게까지 뻗칠 줄 나도 모르는 일이라네!”

“나, 나는 소저라고 한 적 없소!”

“아이고! 아무튼!”

목리원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숫제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이었다.

제갈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안되겠구먼! 내 일주일 내내 설사에 시달릴 걸 각오하고서라도 한마디하고 와야겠네!”

이 어린 것을 상대로 그리 진도를 빼다니.

제갈산은 당화서의 협의라곤 모르는 모습에 개탄하며 일어섰다.

“목아우! 딱 기다리고 계시게!”

그리고 쿵쿵 전각의 복도를 걸어 나갔다.

향하는 곳은 당화서가 있는 단주실이었다.

굳이 이르길, 사람은 본디 자기 수준에 맞는 생각을 하는 법이었다.

*

당화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제갈산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어찌 그러실 수 있냐는 말이오! 내 누님이 그래도 분별력은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목아우를 그리 처절하게 범하고! 겁탈하고! 울릴 수가 있느냔 말이오!”

이 인간은 또 어디서 이딴 소리나 주워듣고 온 걸까.

왜 자신은 이런 말을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그랬고, 당화서는 이내 해야 할 일을 찾았다.

“그래, 네가 한동안 안 맞았구나.”

제갈산이 변비에라도 걸렸나 보다.

그러니 이렇게 지랄을 하는 것일 테지.

솔직히 말하면 될 걸 이제와서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이런 순간에 돕지 않는다면 단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일 즉슨, 당화서는 독기를 발했다.

“히익!”

제갈산이 기겁했다.

당화서는 지그시 웃었다.

“어딜 가느냐.”

그대로 제갈산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빡! 힘 있는 소리와 함께 제갈산의 눈자위가 순간 뒤집어졌다.

“쿨럭…!”

그 순간 파고든 독기가 제갈산의 장을 자극했다.

제갈산의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꼭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자세였다.

아니, 실로 똥이 마려울 것이다.

그런 독을 썼으니.

이쯤 하면 됐겠지.

당화서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자, 잠깐…!”

제갈산이 노래진 얼굴로 당화서를 붙잡았다.

당화서의 눈썹이 위로 들렸다.

“호오?”

버티는 건가.

아무래도 독에 내성이 생긴 듯해 당화서는 더 강한 설사독을 발했다.

그것을 제갈산의 배에 꽂으려 주먹을 말아쥐자, 한발 빨리 제갈산이 외쳤다.

“그럼 설명해보시오!”

“무엇을?”

“목아우가 왜 누님을 떠올리면서 얼굴을 붉히느냔 말이오!”

덜컥―

당화서의 몸이 멎었다.

얼굴은 조금 멍해졌는데, 그 위로 불긋한 기색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어허! 거짓말할 생각일랑 마시오! 내 목아우에게 다 듣고 오는 길이란 말이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당화서는 절로 제갈산의 말에 신경이 몰리는 기분을 느꼈다.

대체 목리원이 무슨 말을 한 건가.

아니, 저 목리원이 자신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는 말은 뭔가.

바짝 굳은 당화서가 긴장을 짙게 만든 순간, 제갈산이 말했다.

“사천에서 누님이 목아우를 끌어안았다 하지 않았소!”

안긴했다.

“귓속에 무어라 속삭였다 말하지 않았소!”

위로의 말을 하긴 했다.

“목아우가 그 말을 잊지 못하더구려!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뛴다고 일렀단 말이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내가! 남녀 간의 관계라면 뻔히 아는 이 내가 그걸 모르겠소? 솔직히 말하시오!”

꾸르륵―

제갈산의 배가 울렸다.

와중에도 제갈산은 꾹 참으며 당화서를 삿대질 했다.

“누님! 목아우를 겁탈하지 않았….”

당화서의 주먹이 뻗어나갔다.

뿌드득―

제갈산의 갈빗대가 비명을 질렀다.

직후 제갈산이 풀썩 기절했는데, 그가 실려간 것은 업무를 위해 일운이 단주실에 들어온 이후였다.

그때까지 당화서가 한 일은 하나였다.

‘모, 목 소협이 얼굴을 붉혔다라….’

당화서는 엉망진창으로 부끄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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