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8 십삼장 - 사천, 결 (19)
* * *
하루가 지났다.
목리원은 아직 병상에 누워있는 채였고, 다른 단원들은 맹의 사천 지부로 떠나보낸 와중이다.
당화서는 홀로 이곳의 남은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주….”
“내가 왜 당신들의 가주요.”
그간 신세 졌던 별채.
당화서는 마당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을 보며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난 당신들을 이끌 생각이 없소. 여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소.”
대열의 가장 앞에 있는 것은 1장로 당초군이었다.
그 옆으로는 2장로 당운정이 있었고, 뒤따라 무릎 꿇은 이들은 하나하나 당문의 중진들.
패자의 말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인을 잃고 몰락을 앞둔 가문의 사람들은 어찌 그간의 일은 생각도 못 하는 것인지, 이리 비굴하게 무릎만 꿇고 있었다.
“…당문의 역사가 이 대에서 끊기게 둘 순 없소.”
“이 대에서 안 끊겨도 다음 대엔 끊길 거요. 당신들이 그리 만들지 않았소. 나를.”
흠칫―
당초군의 몸이 떨렸다.
불임을 언급하자 할 말이 궁해진 것일 터다.
당화서는 피식 웃었다.
“생각도 짧고 행위는 극악하기 그지없음이니, 이야말로 어울리는 결말이라 생각하오.”
“…제발 한 번만 재고를.”
“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그리고 1장로. 당신은 맹으로 압송될 거요.”
“감내하겠습니다.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당문을 이어주십시오.”
쿵, 쿵.
당초군이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시늉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로, 당초군이 머리를 찧는 횟수가 늘 때마다 그의 이마는 시시각각 붉게 물들기 시작했으니.
당화서는 답하지 않았다.
그것에 당초군은 더욱 더 강하게 머리를 찍기 시작했다.
끝끝내 답을 주지 않는 당화서에, 먼저 나선 것은 2장로 당운정이었다.
“1장로!”
그가 벌떡 일어나 1장로를 일으켰다.
1장로는… 이미 기절한 뒤였다.
당운정의 표정이 흐려졌다.
당화서는 비소했다.
“촌극이구려.”
그렇게 돌아섰다.
그 누구도, 떠나는 당화서를 잡지 못했다.
*
당화서는 복도를 지나 건물을 빠져나갔다.
표정은 멍했는데, 다만 멍하다기엔 슬픔이 맺혀있었다.
마침내 해낸 복수.
그것에 의한 것이다.
‘…역시 달콤하지만은 않구나.’
누군가가 말한다.
복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부질없는 행위임을.
그 끝에 무엇도 남지 않기에 허무하기만 한 행위임을.
물론 그에 반박하는 말 또한 존재했지만 당화서는 복수가 부질없음을 믿는 쪽이었다.
복수가 잃은 것을 돌려주지는 않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나.
이미 아이를 낳아 기르는 미래는 제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 고통받았던 어린 시절은 보상받을 수 없었다.
이번 일 또한, 결국은 맹의 이름으로 대의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한 이들을 처벌한 것뿐.
“아가씨.”
골목에서 소향이 나타났다.
당화서는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부인과 당운경, 3장로는 옥에 감금된 상태입니다. 부인… 아니, 그년은 발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멍청한 계집이야. 상황파악 능력도 없고 몸만 굴릴 줄 아는.”
쯧, 하고 당화서가 혀를 찼다.
“그래, 일단 수고했다. 맹의 사람들이 오는 대로 그들을 다 압송해갈 테니 조금만 더 감시를 이어가 보거라.”
“예.”
소향이 물러났다.
당화서는 계속 걸었다.
의약당으로 향하는 길.
이런 당문의 모습까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억지로 목리원을 의약당에 감금해둔 상황이라 미안해서라도 자주 들리는 중이었다.
달칵―
의약당의 문을 열자, 이젠 천막을 치워낸 자리로 앉아있던 목리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소저!”
하고 반갑게 맞아주면서 웃는데, 그러다가 돌연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버린다.
전날 그리 훌쩍거렸던 게 부끄럽기라도 한 걸까.
당화서는 그 모습이 어여뻐 작게 웃었다.
참 신기하게도, 목리원을 보는 순간 직전까지 침잠했던 마음이 다시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없소! 소저야 말로 힘든 것은 없으시오? 다른 단원들도 없이 홀로 일하고 있지 않소.”
“언제는 혼자 일하지 않은 적이 있덥니까. 다들 사고나 치고 다니느라 일하는 건 저 혼자였는 걸요.”
목리원이 움찔하며 눈치를 봤다.
당화서는 목리원의 옆으로 가 앉아, 그의 뺨을 꼬집었다.
“이리 얌전히 있으니 좀 좋습니까?”
목리원의 뺨이 또 붉어졌다.
그 모습에 당화서는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아’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치웠다.
“죄송….”
암만 그래도 이런 접촉은 실례가 되는 걸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에 말하자 목리원이 휙휙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오! 조금 놀라서….”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 이쁘장하다.
참 주책맞게도, 직전까지 그리 푸닥거리를 하고 온 참인데 그 일이 먼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당화서는 어쩌면 중원 무림의 평화는 목리원의 미소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떠올렸다.
이런 사람이 천살성이라니.
새삼 다시 생각해도 우습기만 했다.
‘자미성(紫微星)이라면 또 모를까.’
천살성의 극점에 있는 영웅의 별.
굳이 목리원이 타고난 별을 이르자면 그쪽이 더 옳을 것 같다.
당화서의 시선이 목리원에게 콕 틀어박혔다.
목리원은 우물쭈물하며 그 시선을 마주하다, 고개를 떨구기를 반복했다.
뒤늦게야 그것을 눈치챈 당화서는 의아해하면서도 괜히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꼈다.
오늘따라 왜이리 귀엽게만 구는지, 참으려 해도 입꼬리 삐죽삐죽 서 버리는 게 아닌가.
당화서는 더 바라보다간 묘한 분위기에 실수해버릴지도 모르겠다 싶어 고개를 돌리며 큼큼 헛기침했다.
“…탕약은 드셨습니까?”
“아, 먹었소! 하나가 영약값….”
“거르시면 안 됩니다?”
목리원이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그 모습에 뒤늦게야 당화서는 싱긋 웃었다.
“좋아요. 이제 한 이틀이면 지부 분들이 올 겁니다. 그럼 사천의 남은 정리를 하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집이라….”
목리원은 그 말을 곱씹다, 이내 기쁜 듯 뺨을 붉히며 말했다.
“좋은 말인 것 같소. 왜인지 그러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사실, 맹의 전각에서 지낸 시간이라고 해봐야 다른 곳에서 지냈던 시간보다 짧은데 마음은 이미 그곳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그곳의 삶이 참으로 흡족한 이유일 터다.
이리 단원들과 그 외의 좋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곳이니 평안을 느껴버리는 것일 터다.
“이번에 가면 딱 사흘만 쉬고 싶습니다. 상황이 이리 나쁘긴 하지만….”
“좋다고 생각하오. 아니, 그럼 가서 쉬는 것보다 사천 유람은 어떻소? 지부 분들에게 말하면…!”
목리원의 눈이 반짝였다.
기대감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출발 전에 사천 유람을 약속했었구나.
당화서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지요. 세가 그리 평안하진 못하나, 이번에 큰일을 했으니 며칠은 더 허락받을 수 있을 터입니다. 그게 안 되더라도 돌아가는 길에 구경하면 될 일이고.”
“너무 좋소!”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 또 웃어버린다.
그리 웃음이 끊이지 않는 시간을 보내던 와중, 잠시 침묵하던 목리원이 조심스레 말했다.
“…한데 소저.”
“예?”
“정말 괜찮은 것이오?”
목리원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는데, 당화서는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 가문의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걱정도 이리 눈치를 보면서 하는 것에 당화서는 웃어버렸다.
“안 괜찮을 건 또 뭡니까. 결국 이리 모든 게 잘 풀렸건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가주는 죽었다.
1장로와 3장로는 압송될 테고, 아무것도 몰랐던 2장로는 남겠지만 그의 성격상 주도적으로 뭘 하진 못할 터다.
가주도 장로도 후계자도 없는 당문은 이윽고 분해되어 사라질 테고, 그럼 모든 은원이 청산되는 것이다.
이제 신경 쓸 것은 남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 당화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심산이었다.
그런 의미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행동해보고자 했으나, 목리원이 보기엔 영 걱정스러운 듯했다.
“으음, 어제는 소저가 날 위로해줬잖소.”
“예?”
목리원이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조심스레 팔을 벌렸다.
“오늘은, 내가 해줄 차례인 것 같소.”
당화서는 눈을 끔뻑이며 목리원을 바라봤다.
품을 벌린 채로 수줍게 뺨을 붉히는 모습.
아, 하고 이내 작은 탄성이 나온다.
왜인지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심장이 따스하게 녹는 기분이었다.
무어라 해야할까.
순간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당화서가 망설였다.
그러자 목리원이 눈을 질끈 감더니 이내 부드럽게 당화서를 껴안았다.
약냄새가 났다.
당화서는 약냄새를 아주 싫어했다.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는 이유였다.
한데, 지금만큼은 그 약냄새가 싫지 않았다.
은은히 섞여오는 목리원의 체취가 있어 그런 것일 터다.
“고, 고생 많았소…!”
목리원이 삐걱삐걱 등을 토닥여줬다.
어색하고 긴장된 움직임인데, 우습게도 그런 움직임이라 더욱 마음이 따스해졌다.
당화서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이리 안겨있으니 덜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여 당화서는 목리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품에 고개를 박았다.
“…예.”
뒤늦게야, 당화서는 미처 토해내지 못한 슬픔을 다 걷어냈다.
*
이틀이 더 지나 지부가 당문에 도착했다.
하나같이 굳은 얼굴이었다.
“…용봉단주를 뵙소. 사천 지부장 오양우이라 하오.”
지부장까지 온 건가.
하긴, 사안이 작지 않긴 했다.
“보내드린 일지는 모두 보셨는지요.”
“그렇소.”
오양우는 심란한 얼굴이었다.
하긴 저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름 아닌 오대세가의 오랜 비행의 기록이다.
그것을 가문의 소가주가 들춘 것이다.
당화서는 오양우의 기색을 이해했다.
“압송하십시오. 관련된 자는 모두 잡아두었으니.”
1장로를 비롯한 그 수족들까지 모두 옥에 넣어둔 상태다.
오양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거라.”
지부의 맹원들이 옥으로 향했다.
당화서는 그제까지도 쏟아지는 시선에 작게 웃었다.
그들 모두가 걱정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까닭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도의를 위해 나서주어 고맙소.”
“맹의 단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맹의 단주로서….”
오양우가 그 말을 곱씹다 이내 웃어버렸다.
“그렇군. 단주님이셨지.”
“잊고계셨다는 듯 말하십니다?”
“이해해주시오. 용봉단이 좀 특이한 집단이오?”
“이번만입니다.”
너스레를 떨며 대화를 끝낸다.
그러자 지부로 갔던 단원들이 다가왔다.
목리원이 손을 크게 흔들며 그들을 맞이했다.
“고생하셨소!”
“목 아우! 그간 쉬기만 했다더니 피부가 반질반질하구먼! 이 형님은 그렇게 고생했는데…!”
“앗! 쉬, 쉬기만 하지 않았소! 정양이오! 정양!”
“으음…!”
익숙한 소란에 당화서는 또 한 번 웃었다.
어찌 무게를 잡을 생각은 없는지, 이젠 저리 호들갑을 떨지 않으면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화서는 한껏 미소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할수록 깨닫게 되는 게 있었다.
‘이 사람들이구나.’
역시, 믿고 함께할 동료들은 이들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또한 앞으로도 살아갈 이유는 이들이라는 사실이었다.
22세의 가을.
당화서는 드디어 괴롭고 외로웠던 어린 날과 완벽히 고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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