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3 십삼장 - 사천, 결 (14)
* * *
“끄흐으….”
바닥을 구르느라 몸이 다 쓸렸다.
목리원은 잠시 침음을 흘리다 품속의 당화서를 확인했다.
“소저!”
“….”
숨은 제대로 쉬고 있었으나, 몸에 힘이 없는 것이 확실한 기절이었다.
도대체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목리원은 걱정 어린 얼굴로 당화서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아직 당사극의 기운은 가주전이 무너진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던 목리원은 이내 당화서를 바닥에 바로 눕히고 일어났다.
“…다녀오겠소.”
가만히 두었다간 다른 단원들도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목리원은 걸음을 옮겼다.
*
전신의 기감을 한없이 날카롭게 벼리며 도착한 가주전.
다른 단원들은 없었다.
“…그래, 네놈이 묵룡이겠군.”
다만 당사극이 있었다.
목리원으로선 처음 마주하는 당사극은 당화서의 말대로 온몸이 무너져내린 몰골이었다.
건물의 잔해 위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모습에선 위엄이 느껴졌지만, 그런 중에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쫓아오지 못한 것이었군.’
목리원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독왕 당사극.
초월에 이른 독기에 전신이 침식된 노인은 이제 제 발로는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다리의 혈도가 망가진 상태였다.
“…그렇소.”
“말투가 공손치 못하구나.”
당사극은 하나 남은 눈으로 목리원을 내려다보며 불쾌한 듯 말했다.
“강호의 선배를 보고 할 어투가 그것이 맞느냐?”
선배라.
목리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당문은 어찌 하나같이 그러시오.”
“뭐라?”
“정녕 독왕께서 선배라는 호칭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맞소? 내 여태껏 만난 사람은 다 그렇더구려. 표산, 당운경, 그리고 1장로 당초군과 당신까지.”
스릉―
목리원이 검을 뽑았다.
“선배라 함은 뒤를 쫓아갈 가치가 있는, 또한 배울 점이 있는 이를 이르는 말이오.”
묵색의 기파가 흘러나왔다.
“한데 나는 당신들께 배울 것이 없소. 당신들에게선 눈곱만큼의 협의도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오.”
목리원이 타인에게서 보고 배우자 하는 것은 오로지 협의와 선의였다.
그런 관점에서 따져보자면, 확실히 이들에게선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맞다.
당사극은 건네진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협의라. 지금 감히 협의를 말했느냐? 그날의 혈사에서 혈마의 대전까지 도달한 내게?”
구구구궁, 하고 건물 잔해가 들썩였다.
지독한 독기가 뿜어져 나온다.
감정만으로 공간을 진동시키는 것은 과연 초월에 이른 무인이라 해야 할까.
목리원은 기파로 혈도를 보호했다.
다행히 포악하기 그지없는 목리원의 내공은 외부의 독기를 극렬히 거부해주었다.
“네놈이 그 잘난 묵룡이란 별호로 불리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이 강호에 백도 무림이 아직도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당사극이 무릎을 짚었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이를 악 물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행색은 말한다.
저것은 넘치는 공력에 빌어 몸을 억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내 덕이다. 이 당문이, 사천이, 중원이 그날 혈마를 죽인 덕이다. 한데 그 덕으로 살아있는 네놈이 감히 협의를 일러?”
가만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 외눈에 담긴 감정은 무엇인가.
막 강서성에서 산골을 내려온 시기의 목리원이라면 몰랐으리라.
하나 강호와 사람을 겪은 이제는 알았다.
저 눈 속에 깃든 것은 아집과 질시, 그리고 패배감과 분노였다.
목리원은 당화서에게 많은 사정을 듣지 못했다.
하나, 앞선 남궁진천이 그랬듯 확실히 아는 것이 있었다.
당화서는 절대 사적인 감정에 빌어 일을 치르는 이가 아니라는 것과, 그녀가 어지간한 일에 그 정도의 분노를 토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일렀다.
당문은 해선 안 될 악업을 쌓았다고.
그렇기에 이런 처사에 망설임을 두어선 안 된다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른 말을 하였소.”
목리원은 그의 말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날 혈마의 목을 벤 것은 다름 아닌 검서….”
흠칫―
목리원의 전신이 들썩였다.
‘살기가…!’
검성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려는 순간 터져 나온 살기였다.
이 정도의 살기를 받은 적이 있던가?
아니, 아니다.
목리원이 살아생전 만난 대적 중 그 누구도 이만큼 짙은 살기를 보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악독한 마인들에게서도 말이다.
“검성이라… 그런 이름이 강호에 있던가?”
당사극의 어조가 으르렁대는 형태로 바뀌었다.
“아니, 적어도 내가 아는 강호에 그런 이름은 없다.”
목소리에 한 가지 감정이 더해진다.
‘원망.’
이것은 원망이었다.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느냐.
목리원은 그 이유를 아주 모르지 않았다.
-형님께는… 형님을 따르는 이만큼이나 적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강자존의 강호가 아니더냐. 또한 사람이 모두 같은 이상을 품지 못하는 것 아니더냐. 우리의 시대는 형님의 시대였다. 그러니 형님에게 밀려 시대를 풍미하지 못한 고수들 중엔 분명 형님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이가 있는 게지.
마일석은 말했다.
그런 이들 중 초월에 이른 이가 있다고.
-…독왕, 그놈은 특히 위험하지. 백도 무림의 기둥이라는 주제에 그 속에 사특한 면이 가득했다. 또한 일그러진 욕망도 가득했지.
-그런 사람을 십대 고수로 추대한 건가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일석이 쓰게 웃으며 내뱉은 말을 목리원은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시대를 살았다. 혈사는 그런 시대였다.
조금 다르게 말해보자면 그랬다.
혈사의 끝에서 자신의 생존을 반대했던 4명 중 하나.
그중에서도 특히 극렬한 거부를 보였던 인물.
그럼에도 목리원은 그를 미워하지 않으려 했다.
다만 그런 이유로 당사극을 삿되게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래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목리원은 질시와 원망에 사로잡혀 마땅한 진실조차 외면하는 이를.
스승을 욕되게 하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보고 싶지 않았다.
“…검성은 있었소. 혈마를 벤 자리에. 그의 목을 직접 떨군 이가 바로 검성 목선오였으니.”
당사극의 감정이 더욱 들끓기 시작한다.
목리원은 긴장을 더했다.
그리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언젠가 목선오는 일렀다.
강호 무림의 힘의 법도로 완성된 사회이니, 그곳에서 불살(不殺)을 부르짖을 수는 없음을.
-언젠가는, 원이 네게도 사람을 베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지켜야 할 것을.
이것은 앞선 권마 패웅추와의 결투에서 되새겨본 말이었고, 또한 그 이후로 초절정에 이르는 내도록 속에 새긴 말이었다.
-다만 살의가 아닌 협의로 검을 휘두르거라. 상대를 벤다는 행위에 집중치 말거라.
살의가 아닌 협으로 검을 휘두르라.
그리하여 검이 살갗과 뼈를 가르는 순간도, 그것을 살인이라 인지하지 말라.
우스운 말장난이었으나, 이제 목리원은 알 것 같았다.
‘스승님, 제가 베어야할 것이 보였습니다.’
목리원은 악업을 마주했다.
진득한 악의와 그 기저에 깔린 어두운 늪을 마주했다.
다만 베는 것은 악업이리라.
그리 다짐하며 검을 고쳐 쥐었고.
사아아―
성련(星聯)의 무공을 발했다.
5성에 이른 초절정의 공력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
당사극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
색깔은 다르다.
하나, 어찌 그렇다 하여 알아채지 못할 수가 있으랴.
저 시린 색채가 이르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저 기수식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목선오. 목리원. 목선오. 목리원.’
둘의 이름을 비교한다.
그리고 목리원의 나이와 혈사가 끝나던 시기를 가늠한다.
이어 그 눈동자를 살핀다.
어두운 다갈색.
하나,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공을 발출하는 순간 붉은빛이 스쳐 지나간다.
이윽고 머릿속에서 논리가 만들어진다.
이 답답한 상황을 타파할 논리가.
손녀가 그리 속을 썩인 이유가, 비동의 비밀이 세상 밖으로 나온 상황의 해결법이.
당사극은 멍한 얼굴을 하다, 이내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끕… 끄흐흡…!”
입을 틀어막았다.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다 크게 소리를 높인다.
“끄하하하하하!!!”
아, 어찌 이다지도 공교로운 운명이 있을까.
아니, 감사한 운명이 있을까.
하늘이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하리라.
“그랬구나! 그랬어!”
당사극은 짝짝 박수를 쳤다.
“살아있었어! 그놈이 결국 네놈을 세상에 내보냈구나!”
천살성이 굳은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보인다.
감히, 노려보고 있단 말이다.
“추악한 살귀가!!!”
콰아아아앙―!
팔을 휘젓자 건물 잔해가 폭사한다.
그 아래로 펼쳐낸 독기가 형태를 가져 거대한 뱀이 되었다.
흑천독라공의 9성에 달하여야만 펼쳐낼 수 있는 기예.
천독사(千毒蛇)였다.
당사극은 비틀대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가면을 쓰고 있구나! 왜, 그놈이 이 백도 무림에 스며들어 내부부터 부수라 하더냐? 제 이름을 앗아간 강호에 대신 복수라도 하라 이르더냐?!”
“스승께선 그런 말을 이르지 않았소.”
“웃기지도 않지!”
당사극은 실로 목리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럼 네놈이 내게 정체를 드러낸 이유가 무엇이더냐? 응? 살인이더냐? 그렇군! 그 추악한 본성을 이기지 못해 죽일 만한 상대가 나왔다 싶어 넙죽 명분을 만든 게로구나! 솔직히 말해봐라, 그놈이 이른 복수조차 네겐 살인을 정당화할 명분이 아니더냐!”
살기를 쏘아냈다.
그리하면 천살성이 자극당할 것을 알기에.
자신의 비루한 몸을 그저 먹잇감으로 여겨 더욱 포악해질 것을 알기에.
“어림도 없다! 나 당사극은 사성육왕 중 독왕의 좌에 이른 이로써! 내 손녀를 홀려 감히 백도를 어지럽히는 네놈을 벌할 것이다!”
이미 진실은 당사극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목선오는 자신의 위업을 지워버린 백도에 복수하고자 하는 악인이었고, 목리원은 그가 날카롭게 벼린 비수일 뿐이었다.
즉, 그에겐 목리원이 이리 꼬여있던 상황을 해결할 열쇠로 보이는 것이다.
아니,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다.
“검성이라! 역시 그놈이겐 과분한 별호가 맞았다! 어딜 감히 근본도 없는 촌뜨기 따위가 제일의 자리를 논하느냐! 성(星)의 별호를 논하느냔 말이다!”
생애 내도록 벽으로만 존재했던 이를 영락시킬 수 있다.
천살성의 등장은 모든 방면에서 당사극을 만족스럽게 만들어주는 희대의 기회였다.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어! 아니, 네놈이 드러내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을 수도 있겠구나! 과연 간사한 살귀답다!”
당사극은 뿌드득 팔 관절을 뒤틀었다.
그러자 천독사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혀를 날름거렸다.
“죽어라!”
독사를 쏘아냈다.
초월에 이른 독기라면 제아무리 천살성이라 할지라도 타격을 입을 터.
쉴 틈은 없었다.
쾅! 콰앙! 콰아앙!
독사가 이빨질하며 공간을 다 휩쓴다.
어딘가는 녹아내렸고, 또 어딘가는 가루가 되어 스러졌다.
분노에 힘입어, 또한 제 것을 다시 한번 앗아가려는 별에 대한 원망에 힘입어.
그리 쏘아낸 공력에 주변이 초토화되기 시작했고, 그쯤 당사극은 움직임을 멈췄다.
“어디 있느냐!”
크게 외쳤다.
그러자 답이 돌아왔다.
“…기파조차 읽지 못하는 것이오?”
오른쪽이었다.
고개를 돌린 당사극은 멈칫하며 목리원의 표정을 바라봤다.
붉게 물든 눈동자 속에 깃든 그것은 꼭.
“영락하셨구려. 초월이란 이름이 과분한 수준으로.”
동정의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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