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1 십삼장 - 사천, 결 (12)
* * *
당운정을 떼어냈으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당문은 오대세가라는 이름에 맞게 수많은 무인을 품에 안고 있었고, 개중 절정과 초절정에 달하는 이들도 여럿 존재했다.
가주전까지는 건물 여섯 개를 지나야 하는 거리라, 당화서와 단원들은 그들을 마주하며 찢어지고, 또 흩어졌다.
“여긴 내가 맡겠소!”
제갈산이 몰려오는 무인들을 보며 품의 옥돌을 꺼냈다.
“혜운스님! 여긴 저희가 맡아야 할 듯합니다!”
일운이 혜운과 함께 절정의 무인 다섯을 막아섰다.
그리고 도착한 가주전 앞.
“…소저, 위로는 홀로 가야 할 듯하오.”
두 사람을 막아선 당문의 1장로 앞에서 목리원이 말했다.
당화서는 목리원을 바라봤다.
그 기색이 서늘하고 차가워 평소와 같지 않았다.
…사실, 금지에서 비동의 입구를 찾은 이후 줄곧 이랬다.
당화서는 목리원의 기색에 걱정이 앞서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가야하는 일 아니오. 내 걱정은 마시구려.”
목리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리 말하곤 검을 뽑았다.
“이래 봬도 검 하나는 쓸만하게 휘두르지 않소?”
걱정은 말라는 듯 미소 짓는 꼴조차 평소 같진 않았으나, 그렇다 해서 발이 묶여있을 수는 없었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빨리 가주를 제압해 그 사실을 알리는 방법뿐이었으니.
“부탁합니다.”
당화서는 그리 말하고 가주전을 향했다.
1장로는 막지 않았다.
*
드디어 1장로와 둘만이 남은 상황.
목리원은 그에게 물었다.
“소저를 막지 않으시오?”
“가주께선 소가주님을 안으로 들이라 이르셨네.”
“허면 나는 왜 막아서는 것이오?”
“자네는 들이라는 명이 없었던지라.”
1장로가 끌끌 웃었다.
그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는데, 바짝 마르고 체구 또한 작았으나 내공만큼은 목리원이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당문의 1장로 당초군이라네. 자네는 묵룡이 맞나?”
“목리원이오.”
“선배한테 말하는 본새하고는… 거 사문이나 수학한 장소 정도는 말해주는 게 어떻나?”
“스승께서 문파의 이름에 기대 거만해지는 일을 경계하라 이른지라.”
“에잉, 재미없구먼.”
당초군은 쩝쩝 입맛을 다시다, 돌연 말했다.
“혈기가 참 좋지. 온 세상을 상대로도 두려움이 떠오르지 않으니 초출의 혈기란 감히 천하제일을 노리는 용심으로도 보이는 법이 있지 않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요?”
“그 혈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일세.”
목리원은 당초군을 가만 바라봤다.
여유로움이 가득한 얼굴에 긴장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알고 있나? 막 강호에 나선 초출의 무인이 타성에 젖는 과정을 말일세.”
당초군이 눈을 감았다.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이 그 시작이라네. 강호 무림은 생각보다 잔혹하고, 재능있는 이들의 폭거는 더욱이 잔혹하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 깨지면 하나씩 포기하게 되는 게야.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만을 찾기 시작하지.”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어조였다.
“누군가는 문파를 세우네, 누군가는 무관을 세우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들이 일으킨 세에 빌붙지. 그것조차 못하는 이들은 낭인이 되어 강호를 전전하게 된다네.”
“….”
“그러다 톱니바퀴가 되는 것일세. 이 무림이라는 숲을 이루는 잡초 하나가 되어버리는 게야.”
“….”
“안타까운 일이라네. 자네에게도, 저기 힘쓰고 있는 소가주의 단원들에게도.”
당초군이 씨익 웃었다.
“혈기에 앞서 몰랐던 현실을 이제부터 알아가야 하거든.”
도통 맥락이라곤 없는 말이었다.
목리원은 갑작스레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도, 또한 그가 여유를 부리는 이유도 몰랐으나 그럼에도 아는 것이 있어 말했다.
“당신은 변명을 하는 구려.”
“음?”
“내겐 당신이 하는 말이 그간 행해온 악업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소.”
당초군은 가만 목리원을 바라봤다.
목리원은 이어 말했다.
“당신은 무(武)를 갈고 닦은 이유조차 외면하고 있구려.”
목리원이 알기로 무(武)라는 것은 닥친 시련 앞에서 쓰러지지 않을 힘을 기르기 위해 갈고 닦는 것이었다.
역경과 고난 앞에서 한걸음 더 내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한데 당초군의 말은 이상했다.
그는 맞닥뜨린 현실에 저항하는 법이 아닌, 그 현실에 순응하고 굴복하는 법을 말하고 있었다.
이는 목리원이 그 무엇보다 꺼려하는 행위였다.
“혀가 길구려. 비도든 독이든 뽑아보시오.”
“버르장머리 없긴.”
당초군은 피식 웃으며 그리 말하다 뚜두둑 허리를 폈다.
“어린 것이 벌써부터 노인을 가르치려 들면 쓰나.”
“내가 아는 어른의 정의에 당신 같은 이는 포함되지 않소.”
사실, 목리원은 지금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신체가 아닌 마음이 그러했다.
마침내 알게 된 천살성의 진실은 너무 아팠고, 그에 따른 탈력감에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들 어쩌겠는가.
눈앞엔 적이 있다.
또한 이대로 무너져버리자니, 아른거리는 얼굴들이 너무 많았다.
이런 자신을 거둬 협으로 살 기회를 준 목선오와 마일석.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게 강호를 일러준 당화서.
그리고 뒤에서 함께 버티고 있을 단원들과 그간 만났던 모든 인연들.
‘…다만 나아가라.’
뱀은 그리 일렀다.
그렇다면 나아가면 될 일이다.
사아아―
묵색의 기파가 검 위로 덧씌워졌고, 당초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당초군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별호가 있었다.
천독(千毒).
삼십 가지의 독을 섞어 완성한 천 가지의 독으로 상대를 무릎 꿇린다 하여 그런 별호였다.
물론, 혈사가 있기 전의 시대였다.
그것은 아직 강호 무림이 하나로 엮이지 않은 시기였으며, 또한 중원 내에서의 갈등이 극대화되던 시기였다.
그 나날의 당초군은 당대의 소가주였던 당사극과 강호를 주행했다.
당문의 이름을 드높이고자 온갖 고난을 겪었으며,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했다.
그리하며 깨우친 것이 있었다.
“소가주, 암만해도 안 되는구려.”
강호가 너무 넓다는 것.
그 속에 기라성 같은 고수들은 저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다는 것.
오대세가가 무엇인가.
사천 제일의 문파라는 자긍심이 무엇인가.
결국, 자신들 또한 중원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만합시다.”
중원 제일의 문파는 너무 멀었다.
당대에 이르기엔 너무나도 아득한 경지였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 세대는 이미 주인이 있었던 까닭이다.
[승! 검군(劍君) 목선오!]
청룡비무회에 돌연 나타난 중년의 검객.
온통 새하얀 무복을 입은 채로 시린 별을 검에 담아내던 강자.
그의 앞에선 저 남궁세가의 남궁혁마저 하수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뿐일까.
소림의 불자(佛子) 원명, 살곡의 천면살귀(千面殺鬼) 염소소, 맹룡창(猛龍槍) 사백운.
그 외에도 시대를 이끌 재목이 곳곳에 존재했다.
“다음 세대를 노려야 하오.”
아마 당초군이 꺾인 것은 그때였을 것이다.
천하제일을 노리기엔 그 벽이 너무 높아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힌 것은 그때였을 것이다.
한데도 멈추지 못한 이유는… 결국 당사극 탓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시의 당사극은 현실에 물러설 줄 모르는 사내였다.
그는 포기보단 나아감을 선택하는 사내였다.
“초월이다. 다음 경지를 노린다면 승산이 있을 터다!”
멍청하게도, 그런 사내였다.
흑천독라공의 초월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 경지에 도전하겠다 이르고 만 것이다.
당초군은 그 가능성을 아주 낮게 쳤다.
다만 초월에 이른 이후를 생각할 게 아니라, 그 초월에 이르는 과정조차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행이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렇기에.
“닿았다.”
당사극이 초월지경에 닿은 날, 당초군은 눈물을 흘렸다.
“가주….”
때는 이미 당사극이 가주가 된 이후였다.
당화서가 막 어미의 배 속에 있던 시기였고, 혈사가 중원을 덮친 시기였다.
“초군아. 전란이다. 비탄의 시대고 또한 기회의 시대다.”
당사극은 출두했다.
“지금이라면 당문을 중원 제일로 만들 수 있다.”
혈사를 끝내겠다 선언하며 나아갔고, 다시금 꺾였다.
“이 아이는 내가 맡겠소.”
어찌 얄궂기만 한 운명이 검성이라 불리게 된 목선오를 혈마의 앞으로 들이민 까닭이다.
승리한 목선오가 혈마의 자식을 주운 까닭이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는 질문 또한 우습다.
그렇지 않나.
천살성이다.
나타났다 하면 강호 전체를 피바다로 만드는 악귀의 별이다.
그것을 거두겠다는 말인즉슨 이제껏 목선오가 쌓은 무명과 공로를 모두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단 말이다.
혈사에서 가장 앞선던 이가 끝에서 그 공로를 포기해버리니, 논공행상은 어찌 되겠는가.
아귀다툼이 남는다.
그가 내던진 공로를 주워 먹기 위한 암투를 해야만 했고, 그것은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의지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중원의 평화를 이르기 위해선 승리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은 당사극에겐 비극이었다.
초월지경에 이른 흑천독라공은 그 시각에도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던 만큼 당문은 아귀다툼에서 많은 것을 얻지 못할 게 뻔했던 까닭이다.
그런 이유로 당사극은 목선오를 말렸으나, 실패했다.
목선오의 답은 우스웠다.
“내가 이 아이를 협의를 아는 이로 만들겠소.”
우습지도 않은 양심이, 그의 이기적인 도덕심이 이유였다.
막지 못했다.
목선오는 검성이라는 제 명까지 버려가며 강호를 떠났고, 그리 목선오가 떠난 자리에는 붕 떠오른 공로만이 남았다.
무엇도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은 결말.
하나 분명한 것은, 혈사의 끝에서 당문은 그저 영웅 중 한 명이 되었을 뿐 천하제일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슬펐던가.
아니, 안타까웠다.
당초군은 그 무엇도 얻지 못한 채 그저 독왕이라는 허명과 끝을 바라보는 생을 지게 된 당사극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언제나 물러서지 않고 세파에 맞서 싸웠던, 그럼에도 좌절하게 됐던 그가 안타까웠다.
천하 제일을 향하던 그의 고집이 이내 아집이 되었을 때도 그랬다.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말라가는 순간에도 그랬다.
하여, 당초군은 당사극을 말리지 못했다.
그가 제 손녀를 실험 대상으로 삼을 때도, 그것을 도와달라 이를 때도 당초군은 명을 따랐다.
형제가 되어, 수하가 되어 그가 그 이상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가주의 수족이오. 그러니 원하는 대로 사용하시오.”
그리 말하고 모든 악업을 함께 지고 갔다.
그리 오늘이 와버렸다.
채애애앵―!
목리원의 검이 당초군의 비도를 튕겨냈다.
그리고 짓쳐들어 당초군의 목젖 앞에 멈춰 섰다.
슬쩍 닿는 기파에 피부가 따가웠다.
패배.
어느 순간 관성이 되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된 것이 드리워졌다.
‘겨우 18세란 말인가.’
당초군은 허탈하게 웃었다.
무재(武才).
그놈의 천명이 또 한 번 현실을 들이밀고 있었으므로.
“왜, 죽이진 않을 심산이느냐?”
당초군이 씨익 웃으며 말하자 목리원은 답했다.
“…죄가 있다면 벌하는 것은 맹의 일이오.”
그리 말하며 검을 거두는 목리원의 모습에서, 당초군은 누군가를 겹쳐봤다.
더 이를 필요가 있을까.
목선오였다.
-개인의 감정으로 복수를 논하지 마시오. 상벌엔 법도가 필요하오.
그저 올곧기만 한 이상을 강요하던, 그럼에도 강자였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내가 겹치고 있었다.
아마 목리원이 이끌어갈 강호 또한 그런 형태겠지.
‘참으로 빌어먹을 세상이구나.’
목리원이 검집을 휘둘러, 당초군의 뒷목을 두드렸다.
당초군은 정신을 잃었다.
다음화 보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