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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살검협-115화 (115/334)

〈 115화 〉 십삼장 ­ 사천, 결 (6)

* * *

방침이 정해진 이후, 며칠간 용봉단은 침묵했다.

그간 한 일이라곤 수락의 말을 듣기 전까진 이곳에 자리를 깔고 앉겠다는 듯 당문과의 소통을 일절 끊어버리고 처소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일.

과정에 불편함은 없었다.

수련에 필요한 연무장, 식사에 필요한 식당과 그 외에 생활 편의를 위한 모든 것이 처소 안에 있었고, 생활을 도와줄 시비 소향도 존재했으니.

그렇게 시간을 죽이다 돌아온 오늘.

“이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처소의 가장 큰 방.

탁상에 둘러앉은 단원들을 쭉 훑어보며 당화서는 말했다.

“이쯤 되면 저쪽에서도 저희가 처소 안에만 숨어있을 줄로 알겠지요. 야음을 타 움직이기에 오늘만큼 좋은 날이 없을 터입니다.”

“드디어 움직이는구려! 내 사실 처소 안에만 있느라 너무 답답했다오!”

“고생하셨습니다. 목 소협. 그리고 다른 분들도.”

단원들의 기색이 사뭇 달아올랐다.

다름 아닌 영물이 있는 땅을 가는 만큼 어쩔 수 없이 차오른 흥분이리라.

제갈산이 히히덕대며 물었다.

“그래서, 금지엔 어떻게 출입할 생각이오?”

“마침 초승달이 뜨는 어두운 날이다. 이대로 전각 뒤쪽으로 빠져나가 움직이면 될 터다.”

“경비는 없소?”

“금지의 입구를 지키는 이들은 있으나, 저 산맥이 오죽 넓더냐. 찾아보면 빈틈투성이다.”

그 말에 목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금지인데 경비가 그리 허술한 것이오?”

당연한 의문이었다.

당화서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사람만으로 막았을 리는 없지요. 금지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톡.

당화서가 책상 위를 두드렸다.

“진법이 있습니다.”

곳곳에서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단원들을 보며 당화서는 이어 말했다.

“환혹 계열 진법인데, 생각 없이 들어갔다간 침입자를 사지로 몰아 죽이는 특성이 있습니다. 치밀한 진법인 만큼 쉬이 풀 순 없지요.”

“보아하니 들어갈 방법이 있다는 뜻으로 뵈는데, 내 말이 맞소. 누님?”

“그래.”

단원들의 집중이 더해졌다.

당화서는 먼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는 아직 10살도 채 되지 않았던 어린 날, 가주의 손에 이끌려 딱 한 번 금지에 들어선 일이 있었다.

“…생문이 있다.”

“생문이라 하면….”

“일정한 보폭으로 특정 방향을 나아가면 진법으로 가로막혀 있는 땅을 벗어날 수 있다. 제갈산, 네놈은 아는 종류가 아니냐?”

“흐음… 심심치 않게 접한 진법이긴 하오.”

그리 말하는 제갈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귀찮은 진법이구려.”

딱 저 말이 옳았다.

본디 사람은 저마다의 박자와 호흡이 있고, 또한 저마다의 보폭과 습관이 있는 법이다.

한데 진법이 그 모든 요소를 무시하고 획일화된 걸음을 요하니, 까딱 잘못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일 아니겠나.

“생문은 얼마나 머오?”

“대충 이 각 정도를 걸어야 한다.”

“피로도도 꽤 있겠고….”

제갈산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마 진법에 대한 지식이 깊은 만큼 고려할 사항이 많이 뵈는 것이겠지.

하나 당화서는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앞장서 걸을 테니 단원들은 네가 지도해주거라.”

제갈산은 못 미더운 부분이 많긴 하나 진법에 대한 지식만큼은 참 해박한 사내다.

이리 표정을 구긴다 한들, 막상 그 순간이 되면 금방 자신이 말하는 생문을 깨달을 터.

제갈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 한 번 노력해보지.”

“그래, 그럼 지체할 필요가 무에 있을까. 바로 출발하자꾸나.”

당화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이미 새까맣게 물들어 있는 상황.

적기였다.

*

처소를 빠져나오는 일은 쉬웠다.

사실 우습다면 우스운 이유였다.

간혹가다가 뵈는 경비들 보다 단원들의 경지가 더 높은 까닭.

그렇지 않나.

대체 어느 집단이 고작 저택 내 순찰대에 절정의 무인을 집어넣겠나.

하물며 지금 향하는 금지는 중심인 가주전과 반대 방향에 있었다.

경비 중 그나마 중요 인력이라 할 것이 죄다 그곳에 몰려 있으니, 이들의 이동을 눈치챌 이가 없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과정을 거친 단원들은 처소를 빠져나온 후 당문의 전각을 지나쳐 산맥에 당도했다.

“이곳이….”

“예, 당문의 금지입니다.”

목리원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다른 단원들 또한 마찬가지.

당화서는 다그치듯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집중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바라본 전방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주변 전체가 아니라, 이 앞으로만 투명한 막에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작위적으로 깔린 안개였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수준.

이러니 생문을 모르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당화서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갈산, 내 뒤로 붙어라. 나머지 분들도 제갈산을 잘 따르십시오.”

단원들이 일자로 길게 섰다.

당화서는 그 순서를 눈에 담았다.

‘제갈산, 목 소협, 일운 스님, 백봉, 검룡.’

당화서의 눈이 좁아졌다.

“일운 스님, 제일 뒷자리로 가주십시오.”

최후미가 남궁진천이라니 불안해서 도저히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에 건넨 말.

일운은 다행히 의도를 눈치채곤 어색하게 웃으며 최후미로 향했다.

남궁진천은 이유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됐습니다. 이제 가지요.”

당화서가 전방으로 고개를 향하고, 이내 걸음을 내디뎠다.

안개가 그녀의 신형을 감쌌다.

*

주변이 온통 희끄무레한 안개 속.

목리원은 온 신경을 코앞에 있는 제갈산에게로 집중시키며 그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오른발을 바깥으로 꺾으면서 동남쪽으로.’

‘왼발 끝을 안쪽으로 향한 채 북으로.’

안으로 들어오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목리원은 알 수 없었다.

‘지독하다.’

금지의 경비가 약한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진법이 지독했던 까닭이다.

먼저 방향 감각이 뒤틀렸다.

동남쪽이니 북쪽이니 하며 제갈산의 발걸음을 따라가고 있긴 하나, 목리원은 실제로 이게 동남과 북으로 향하는 걸음인지를 몰랐다.

다만 진법에 들어오던 때를 기준으로 생각하며 어림할 뿐이었다.

다만 방향 감각만 문제인가?

아니었다.

무슨 수면향이라도 뿌려둔 것인지, 목리원은 계속해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냥 졸음도 아니고 며칠 밤은 뜬눈으로 세는 날에야 느낄 정도의 지독한 수면욕 말이다.

‘…오른발을 정면으로 향하며 북서쪽.’

지금 목리원의 경지가 초절정이다.

한데도 진법에 들어와 이리 방향감각이 사라지고 있는 걸 생각해보면, 정말 초월지경이 아니고서야 이곳을 제대로 뚫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고 있었다.

문득 드는 것은 뒤에 있을 이들에 대한 걱정.

남궁진천이야 몸 쓰는 일만큼은 잘하는 편이니 제쳐두고, 두 스님이 제일 걱정되었다.

고개를 돌리자니 제갈산의 움직임을 놓칠까 두렵고, 그렇다고 그저 가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기파를 느끼기가 어려우니 원….’

무슨 조화인지 이곳은 기파의 흐름이 묘하게 섞여 단원을 식별하는 게 참으로 어려웠다.

목리원은 아주 어릴 적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날의 육신으로 회귀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끙끙대며 걸음을 옮기던 중.

“지금부터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당화서의 외침이 들려왔다.

목리원은 긴장을 더하며 당화서의 당부를 되새겼다.

‘이제부터 환청이 들려온다고 했나.’

진법을 7할쯤 지날 때부터 시작된다 했으니, 대충 얼마나 왔는지는 가늠이 되는 차였다.

목리원은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귀를 막으며 제갈산의 발에 집중했다.

환청은 머지않아 시작됐다.

“목 소협, 잠시 도와주시겠습니까?”

들려오는 목소리는 당화서의 것.

울먹거리는 기색이었다.

목리원은 심장이 꽉 조이는 슬픔을 느꼈다.

‘드, 듣지 않을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당화서는 이제부터 단원 중 누구도 말을 내뱉어선 안 된다고 했으니, 이것은 환청이 분명했다.

“목 소협… 제 말이 안 들리십니까?”

이어 들려온 목소리엔 더 진한 슬픔이 묻어있었다.

배신감에 절어있는 것처럼도 들렸다.

양심이 콕콕 찔려온다.

하나 목리원은 이겨냈다.

그렇게 또 걸음을 옮기자, 이번에 들려온 목소리는 다른 것이었다.

“원아….”

스승 목선오의 목소리였다.

흠칫

목리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환청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목소리에 절로 발이 움직일 뻔했던 까닭이다.

그리운 목소리의 힘은 그만큼이나 대단했다.

“원아, 이리와 보거라. 응? 이 스승이 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런다.”

‘아, 안 갈 겁니다! 이건 환청이지 않습니까!’

“내 항상 걱정이다. 원이 네가 너무 착하고 순하여 어딜 가서 겁박이나 당할까 잠이 잘 오지 않는구나. 이런 스승을 그냥 둘 테냐?”

“야 이놈의 자식아! 형님이 부르시는데 재깍재깍 오지 못하겠느냐!”

함께 들려오는 호통은 걸왕 마일석의 것이었다.

“에잉~ 배은망덕한 놈! 내 닭다리를 몰래 빼먹을 때부터 네놈 싹수를 알아봤다!”

현실감이 말도 안 될 정도다.

목리원은 그 호통 소리에 이게 정말 환청인지를 의심할 뻔했다.

저 환청이 닭다리 얘기만 안 했어도, 목리원은 분명 걸음을 옮겨버렸을 터였다.

‘닭다리는 완벽범죄였다! 내가 출가하던 그날까지 걸왕께선 모르셨어!’

양심을 찔리게 하려 수를 쓴 것이겠지.

어림도 없었다.

목리원은 표정을 더욱 굳혔다.

“흡!”

크게 숨을 들이쉬고 멈췄다.

또 걸음을 옮겼다.

“목 소협….”

“원아….”

“이놈의….”

처음엔 그 셋.

이윽고 계속해서 귀를 어지럽히는 음성이 불어난다.

“대협!”

강호협객전의 저자 곽칠표의 목소리가.

“아, 묵룡.”

백검대주 금검 권표월의 목소리가.

“은공!”

섬서에서 만났던 소가장의 어린 종자 선우의 목소리가.

“묵룡 대협!”

진원단주 견동의 목소리가.

그뒤로 연을 맺었던 수많은 이들이 목리원을 불렀다.

그것들을 다 무시하고 지나가던 중.

“네놈 때문이다. 천살성.”

웃음기 가득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리원의 눈이 부릅 뜨였다.

‘…권마.’

회유로 안 되니 질책이라는 것인가.

생각을 떠올리는 중에도 목소리는 이어진다.

“네놈이 타고난 그 별이 표사들을 사지로 내몬 것이다. 네놈의 존재가 이들의 명을 끊은 것이다. 저주받은 천살성이 감히 인간을 흉내 내서 벌어진 비극이다.”

무언가가 심장을 꿰뚫는 기분이었다.

이어 들리는 것은 또 다른 목소리.

원한에 차 있는 목소리의 주인은 염마 오강악이었다.

“별 따위에 기생하는 쓰레기 주제에 무엇이 그리 당당하지? 팔자 한번 좋구나. 네놈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이 비탄에 빠질진대.”

그치지 않았다.

이어 검마 연리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살의 업을 지고 가며 맺을 결말은 파멸뿐이니.”

그들이 입을 모아 저주했다.

이 별을 지고 가는 이의 운명을, 또한 자신의 앞길에 있을 혈겁을.

무시하기 힘든 말들에 목리원의 표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쐐기가 박혔다.

“…너를 살리는 게 아니었는데.”

목선오의 비탄 어린 목소리였다.

“원아, 너를 살리는 게 아니었다.”

증오가 묻어난 목소리였다.

순간 목리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환청임은 더 이상 상관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그저 사랑하는 이의 원망을 들었단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리 상처를 입고 있었다.

목리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목 소협, 그리 추악한 속내를 이때까지 숨기셨습니까?”

“목 아우… 아니, 아우라고 부르기도 싫군. 어찌 살귀가 그리 뻔뻔하게….”

“그럴 줄 알았다. 어쩐지 네놈 따위가 남궁의 검에 대적하는 것이 이상하다 했다.”

단원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온다.

이어 이제까지 그를 회유하던 인연들이 모두 원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죽어가는 이의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감히 살귀가 협객 따위를 바라느냐!!!”

“너, 너 때문에 소가장이 망한 거야! 네가 가진 별만 아니었어도 마인들이 중원에 오지 않았을 거란 말이야! 살귀! 죽어버려!”

“무림맹에 이런 괴물이 있을 줄은 몰랐군. 비무에서 죽어버려야 했을 것을!”

그러다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이 스러졌다.

그들의 죽음이었다.

‘이건….’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다.

그제야 목리원은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두려움을 건드리는 진법이구나.’

이것은 그간 애써 마주하지 않았던 것을 눈앞에 들이미는 환청이었다.

이 별을 이고 살며 이따금씩 상상했던 일을 몸에 새겨주는 진법이었다.

천살성을 타고났다는 것을 맺은 연들이 알게 되면 어찌 될까.

상상조차 하기 싫어 떠올리지 않았던 것이 계속해 목리원을 들쑤셨다.

목리원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다….’

이제껏 만나온 이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리도 정을 붙여왔는데 고작 별 정도로 자신을 겁박하지 않을 것이다.

되새기는 말은 스스로에게 거는 세뇌였다.

드리워진 두려움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하나, 너무 얇다.

“원이 너만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이 중원 강호에 남아있었을 텐데.”

속이 미어진다.

누군가가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다.

아직 제갈산의 걸음을 따라가고 있으나, 점점 그 일이 힘에 부쳐 갔다.

“뒤에 서 있지 말아주겠나? 살귀가 언제 칼을 꽂을지 걱정되어서.”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환청이 괴롭혔던 탓이다.

그렇게 숨이 턱턱 끊기던 순간.

“가아아아아아알!!!!!”

바로 뒤에서 맹렬한 노성이 들려왔다.

목리원은 깜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이건 환청이 아니다!’

남궁진천이 진심으로 내지른 호통이다.

그도 그럴 게, 앞에 서 있던 제갈산의 발도 움찔 떨리고 있지 않나.

“나는 패배자가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목리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호통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안정되는 호흡과 점점 평온해지는 심장 박동.

그것이 잠시 이어지곤 난 후에, 문득 목리원은 직전까지 떠오르던 부정적인 상념들이 완전히 스러진 것을 느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남궁진천이 아니었다면 그 순간 발걸음이 어긋나지 않았을까.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검룡 형이 듣는 환청은….’

대충 알겠다.

목리원은 그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무슨 환청인지에 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직후, 목리원은 안개를 빠져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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