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십삼장 사천, 결 (5)
* * *
처소로 돌아온 당화서는 뒤늦게야 임무를 잊었단 것을 깨달았다.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눈 위를 쓸며 자책해보지만 이미 늦은 일.
지금 다시 가주전에 돌아가 협조를 부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아무렴, 그리 난장을 피우고 나와 협조해달라 말할 정도로 당화서는 뻔뻔하지 못했다.
당화서는 한숨을 내쉬곤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댔다.
눈을 감고 뜨거워진 머리를 식혔다.
돌연 그녀의 입에서 피식하는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래도 할 말은 했구나.”
그제야 그것이 실감 나고 있었다.
지난 과거, 단 한 번도 당사극에게 속내를 말한 적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고무적인 성과였다.
‘변한 것이겠지.’
자신이 더 이상 도망치기나 하는 머저리는 아니게 되었다는 뜻일 터다.
변화의 이유는 바로 떠올랐다.
목리원.
그와 만나 수양현을 떠난 이후부터 생겨난 용기였다.
꾸욱
그를 생각하자 속이 조여왔다.
당화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던 중,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저, 내 들어가도 되겠소?
목리원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어찌 딱 떠올리자마자 이리 나타날 수가 있을까.
괜히 헛웃음이 삐져나와 당화서는 방문을 열었다.
“찾으셨는지요.”
“아, 열어주어 고맙소. 잘 다녀오셨소?”
고운 얼굴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하여간 무인이란 작자가 이리 정이 많아 어찌 쓸까.
당화서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예, 한데 임무에 관한 것은 제대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조금 시간을 두고…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한 번 가주전을 찾고자 합니다.”
“그렇구려.”
목리원은 그리 답하고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하고싶은 말이 있는 모양새였다.
당화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으….”
“편히 말해 보시지요. 용건이 있어서 오신 게 아닙니까?”
목리원은 그 후로도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 이내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반듯이 들며 말해왔다.
“소저.”
“예.”
“혹 이곳에 있는 게 힘들다면 맹으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생각하오.”
멈칫
당화서의 움직임이 멎었다.
말은 한 박자 늦게 나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다른 단원들에게도 다 의견을 물어봤소!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임무인 것이 아니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소저가 힘들다면 임무 정도야 실패해도 된다고, 단원 모두가 그리 입을 모았소.”
당화서의 눈빛이 떨렸다.
목리원인 싱긋 웃으며 그런 당화서에게 이어 말했다.
“물론 임무가 중요하긴 하다마는 어디 소저보다 중요하겠소. 게다가 마인을 잡는 임무도 아닌 설득이 아니오. 우리는 괜찮으니 편하게 마음 먹으시오. 단원들은 모두 소저의 편이라오.”
목리원의 손이 뻗어 나와 당화서의 손을 감쌌다.
무인답게 그의 손은 굳은살이 잔뜩 배겨 거칠었으나, 그럼에도 따스했다.
아마 힘을 주지 않고 부드럽게 감싸는 그의 배려가 만든 온기일 터였다.
당화서는 문득 마음이 젖어 드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내 편이라….’
마침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온 것이 이유일까.
주책맞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울먹거린다면 그가 당황할 것이 뻔해, 당화서는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울음기를 참았다.
“…감사합니다.”
그래, 이들이 곁에 있는데 무엇이 더 두렵겠는가.
당사극은 혈육만이 진정한 우군이 될 수 있음을 일렀으니, 그의 말을 옳다 치부해보면 그랬다.
‘이 사람들이 내 가족인 것을.’
힘든 순간에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이들이었다.
암만 못난 모습을 보여도 곱게만 보이는 사람은 이들이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 또한 이들이었다.
당화서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괜찮습니다.”
“음?”
“저를 뭘로 보십니까. 제가 겨우 싫은 장소에 있다고 울기나 할 계집으로 보이셨습니까?”
당화서가 짓궂게 묻자, 목리원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홱홱 저었다.
“그, 그런 게 아니오! 그냥 걱정돼서 그랬소! 진짜로!”
“흐음….”
눈을 좁히자 목리원이 더 간절한 얼굴을 만들었다.
“믿어주시오!”
“한 번만 믿어드리겠습니다.”
“고, 고맙소!”
화악 안색을 밝히며 안도하는 모습이 퍽이나 어여뻤다.
역시 눈길을 사로잡는 모습에 묘한 감상이 떠올랐다.
당화서는 생각했다.
‘…그래도 아주 괜찮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당사극을 마주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울분이 차올랐던 것은 진실이었으니, 조금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목 소협.”
“말해보시오!”
“그래도 저를 나약한 사람으로 치부하셨으니 벌은 받아야겠지요.”
“그, 그것은…!”
목리원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어디 도망갈 자리라도 알아보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었다.
턱
당화서가 목리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를 안쪽으로 끌어들이곤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 앞에 선 채로 양 팔을 벌렸다.
“벌입니다.”
“무, 무엇을….”
“잠시만 안아주시겠습니까?”
싱긋 웃으며 말하자 목리원이 덜컥 굳어버렸다.
눈빛이 떨리는 것이 동정심이라도 품는 듯하다.
못난 마음이긴 하나, 그런 동정심이라도 이용하고 싶은 기분이 일어 당화서는 정정의 말을 내뱉지 않았다.
다행히 목리원은 더 의문을 토해내지 않고 그저 다가와 줬다.
“으음… 이렇게 하면 되오?”
목리원이 품을 내어줬다.
서툴렀다.
어색한 자세로 허리를 숙이는 것도, 팔로 자신을 감싸면서도 손만큼은 몸에 대지 못하는 것도, 혹여 실례가 될까 눈치를 보는 것도.
‘답답하기는.’
어디까지 귀엽게 굴 생각인지.
당화서는 킥킥 웃으며 팔로 그의 허리를 감쌌다.
조금 강하게.
그러자 목리원의 몸이 긴장됐다.
“소, 소저?!”
“포옹을 해달라 했더니 웬 곡예를 하고 계십니까. 제 몸 주변에 보이지 않는 기막이라도 있덥니까?”
“그, 그런 것은 아니고….”
목리원의 당황이 짙어졌다.
당화서는 유쾌한 기분이었다.
‘이리도 품이 따스해 마음 또한 따스한 것이겠지.’
아니, 그 반대일까.
아무래도 좋은 일이긴 했다.
쿵 쿵
일정한 박자로 크게 뛰는 박동에 신경 쓰는 것만 해도 참으로 바쁜 와중이니, 괜한 생각에 머리를 어지럽히고 싶진 않았다.
“조금만 이리 있어 주십시오.”
당화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씻겨나가는 기분에 그저 지그시 웃으며 눈을 감았다.
꽤 오랜 시간을 그리 보냈다.
*
다음 날이 되어, 당화서는 가주전을 찾기도 전에 당사극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맹에 협조하는 일은 거절하겠다 하십니다.”
소향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당화서는 쓰게 웃었다.
“왜 네가 그리 주눅 들어 있느냐. 네 의견도 아닐진대.”
좋은 답을 들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입맛이 썼다.
당화서는 그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문으로 돌아오라는 말이겠지.’
그리하면 맹에 협조하는 일 정도는 해주겠다는 뜻일 터다.
우습지도 않다.
“그래, 일단 쉬거라. 나는 단원들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하나같이 심각한 낯짝이었다.
소향이 물러간 직후, 당화서는 말했다.
“들으신 대로 당장은 결과가 좋지 못하군요.”
“그럼 어찌해야 하겠소?”
“방법이야 많지요.”
“방법이라면…?”
목리원이 물었다.
다른 단원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화서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수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지요.”
새삼 안타까워할 일이 무에 있을까.
애초에 이런 결과를 상정하고 떠나온 길이다.
최초 계획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당문은 참으로 폐쇄적인 문파입니다. 그런 만큼 그 역사에 비밀스러운 사건이 많았고, 개중엔 밝혀져선 안 되는 것들이 몇 있습니다.”
“…대충 그런 게 있다고 듣긴 했소.”
제갈산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남궁진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부께서 이르신 말이 있었지. 당문이 처음부터 정파에 소속된 문파는 아니었다고.”
새삼스럽지 않은 말이었다.
수백 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인만큼 이제와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뿐이지, 최초의 당문은 흑도에 가까운 문파였으니.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당문의 역사는 오로지 가주만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 알아낼 방법이 있지요. 저희는 그 비밀을 파헤쳐 가주에게 들이밀 겁니다.”
“협박을 하겠다는 게로군?”
“맞습니다.”
“누님, 위험하지 않겠소?”
“위험할 일이 뭐가 있느냐.”
당화서는 킥킥 웃었다.
“네놈이야 하루가 멀다하고 헛짓거리나 하고 다니니 잊고 있겠지만, 우리는 맹에 소속된 인원들이다. 또한 목 소협을 제외한 모든 단원이 주요 문파의 대표 후기지수다. 가주가 아무리 독왕의 좌에 올라 있다곤 하나 우리를 어찌하지 못한다.”
자포자기하고 단원 모두를 참살할 가능성?
한없이 0할에 가까웠다.
당사극은 당문의 존속을 그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사내였다.
이곳에서 그런 사고가 일어나 당문이 화를 입는다면, 또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그는 절대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그의 몸은 이미 무공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망가져 있었으니.
당화서는 전날 마주했던 당사극의 모습을 되새기자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소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화서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아무튼, 비밀을 파헤칠 방법은 하나입니다.”
당화서가 팔을 들어 북쪽을 가리켰다.
“당문의 금지. 저희는 그곳에 갈 것입니다.”
“금지?”
“이 땅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지요. 무엇이 있을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그곳 어딘가에 당문의 비동이 있다는 것 정도나 알 뿐.”
제갈산이 눈을 빛냈다.
“…영물!”
“음? 들은 게 있나 보구나.”
“왜 모르겠소! 당문의 금지! 내 출가하기 전에 가주께 들었던 말이 있다오! 이 중원 땅에서 영물을 찾고 싶다면 당문의 금지만큼 확실한 곳은 없으리라고!”
답지 않게 흥분하는 모습에 당화서가 쿡쿡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영물의 독을 얻어보겠다고 선대 가주들이 몇백 년간 그곳에 영물을 들인 일이 있었으니. 아마 운이 좋으면 가다가 마주칠 수도 있겠지.”
역시라고 해야 할까.
그 말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영약 중독자 남궁진천이었다.
“잡아도 되나?”
“알아서 하십시오. 거기 영물이 죽든 말든 내 알 바도 아니고.”
당문의 보물 따위야 당화서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게다가, 사실 금지에 들어가는 것부터가 허락 없이 저지르는 일일진대 영물 몇 잡아먹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암묵적 허락에 단원들이 모두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나, 나는 만년화리를 한번 보고 싶소! 잡아먹지 않아도 실물로 마주 보면 소원이 없겠구려!”
“목아우는 꿈이 작구만! 나는 천잠을 꼭 보고 싶다네!”
“천잠사!”
“그래, 그 실을 만드는 누에 말일세! 기왕이면 천잠사도 좀 얻고!”
“…금와의 내단이 그리 내공을 많이 품고 있다지.”
목리원과 제갈산, 남궁진천이 물꼬를 틀자 혜운이 이어 말했다.
“거북이 중에 피부 미용에 좋은 애들이 있다더라구요.”
“혜, 혜운 스님! 욕망을 위한 살생은….”
“그럼 일운 스님은 안 드시게요? 내단인데? 영약인데? 진짜 안 먹게?”
일운의 말문이 턱 틀어막혔다.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당화서는 그 꼴들을 보다 헛웃음을 흘리며 박수를 짝짝 쳤다.
“자, 다들 진정하지요. 무슨 애도 아니고 영물 볼 생각에 신나 한답니까.”
아니, 사실 정신 수준이 다들 어린애긴 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당화서는 생각을 다잡고 말했다.
“저희 목적은 비동을 찾는 겁니다. 영물이야 그 길에 보이면 보는 거고, 아니면 마는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알겠소!”
전혀 못 알아먹은 것 같은 목리원이 힘차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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