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십삼장 사천, 결 (4)
* * *
가주전의 문이 열리는 순간, 당화서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반투명한 백색의 가림막이었다.
그 뒤로 희끄무레하게 노인의 마른 인영이 보이고 있었다.
독왕(?王) 당사극.
자신의 조부이자 천만번을 미워해도 모자라지 않을 사내.
당화서는 그의 인영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포권을 취했다.
“당문의 가주를 뵙습니다.”
티끌만큼의 감정도 담지 않고서.
“무림맹의 용봉단주 당화서입니다.”
스스로가 이곳에 온 목적을 드러내며.
답이 돌아온 것은 당화서가 고개를 숙이고도 열을 더 셌을 시점이었다.
“…그래.”
겨우 그 한마디.
당화서는 순간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가 이리 반항하는 자신을 어찌 생각할까.
이곳에 자신만 따로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맹의 요청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긴 할까.
하나, 돌아온 답은 그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었다.
“절정에 다다랐구나. 훌륭하다.”
당화서의 눈빛이 일렁였다.
당사극이 또 말을 이었다.
“절정에 다다라 깨달은 독은 무엇이냐? 너는 무엇을 빚어냈느냐?”
당화서는 그의 목소리에 묻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뿌듯함, 호기심, 그리고 애정.
당화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얼마나 뒤틀린 애정이란 말이더냐.’
순간 닫아두었던 마음의 문을 비집고 삐져나오는 것이 있었다.
해묵은 증오였다.
“…그런 것이 묻고 싶으십니까.”
“손녀가 성취를 이루었는데 당연 궁금하지 않겠느냐.”
“도주한 일에 대해선 묻지 않으십니까.”
“젊은 날의 비행은 특별하지 않은 일이지.”
“하면 도주한 이유 또한 궁금하지 않으시겠지요.”
“너를 그리 다그칠 이유가 내게 있더냐.”
시종일관 따스한 목소리였다.
그것이, 너무나도 잔인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그 잔인한 애정은 당화서의 속을 짓이기고 있었다.
그저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그의 독선은 드러내지 않고 싶었던 원망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당화서의 이가 꽉 물렸다.
고개가 들리며 드러난 얼굴은 직전보다 확연히 찌푸려져 있었다.
호흡 또한, 거칠어져 있었다.
“당신이 원망스러워 도망쳤습니다. 이 당문이 끔찍하리만큼 혐오스러워 도망쳤습니다. 이래도 이유를 묻지 않으시렵니까?”
“너는 또 그런 말을 하는구나. 대체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게냐?”
“어찌 그것을 묻습니까? 저의 삶과 미래를 모두 빼앗아놓고….”
차오른 울분에 말문이 턱 막혔다.
당화서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그리하고 나니 말문을 틀 정도로는 진정이 됐다.
“…저를 그저 당문의 도구로 만들어 놓고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사실, 이곳까지 오며 당화서는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혹시 이제와 당문으로 자신을 부른 이유가 사과는 아닐까 하는 기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헛된 기대라고 말하기엔 그럴만한 근거가 분명 있었다.
용봉지회가 있던 날, 당운경이 복귀한 이후 당문은 침묵했다.
용봉단이 창설된 후 당문은 선물을 보내왔다.
이곳 당문에 돌아왔을 땐 멀쩡히 살아 시비로 지내는 소향을 보여줬다.
당화서가 그 모든 것을 보며 ‘어쩌면’이라는 가정을 떠올린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한데….’
결국 이것이었다.
당사극은 처음부터 자신의 도주에 그 어떤 의문도 품지 않은 것이다.
저 독선적인 노인은 그저 자신의 울부짖음을 젊은 날의 치기로 치부하고 있었다.
증오가 조금 더 짙어졌다.
“…꼭 제게 그래야만 했습니까?”
당화서는 그 감정을 언어로 빚어 가림막 너머로 쏘아냈다.
“당신의 숙원을 이룰 이가 저여야 했던 겁니까?”
당화서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꿈은 평안이었고, 행복이었다.
초월지경의 무인 따위는, 이 문파의 오랜 숙원 따위는 제게 조금도 중요치 않았단 말이다.
“…간절히 숙원에 몸담길 원하는 당운경이 있었습니다. 한데도 왜 제게만 그러셨습니까?”
목소리의 끄트머리에 묻어나는 것은 울음기였다.
깨져버린 희망의 조각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니, 그것이 너무나도 아팠던 까닭이다.
저 노인은 끝내 모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 그 무엇보다 부러워한 사람이 이복동생이라는 것을.
그저 사랑만 받고 자란 철부지라는 것을.
“무어라도 좋으니 제게 답을 주십시오.”
당화서는 독촉했고, 돌아오는 답은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 이리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냐. 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었더냐.”
당운경의 목소리에 답답함이 일었다.
당화서의 흰자 위는 붉은 기가 차올랐다.
하여 또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
“나를 봐라.”
당사극이 가림막을 걷었다.
드러난 광경에 당화서는 헛숨을 들이켰다.
“이게 무슨….”
당화서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당사극이 당화서의 기억 속 모습과 너무 다른 형상을 하고 있던 까닭이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곧 죽을 병자의 꼴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그조차도 과분한 말이었다.
“보아라. 이게 초월지경에 다다른 독공의 부작용이다.”
당사극의 피부 위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머리칼은 단 한오라기도 존재하지 않았고, 왼쪽 눈은 어디로 간 것인지 그 속이 텅 비어있었다.
그것뿐이던가. 몸이 앙상하게 마른 가지 같다.
죽음의 그늘이 다 드리워져 당장 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것 같은 형상이었다.
가림막이 걷히자 뻗어 나온 독기에, 당화서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흡…!”
“왜 당문의 숙원이 만독불침이더냐. 왜 우리가 그것에 그렇게까지 집착했더냐.”
당사극의 가래 낀 목소리가 거칠게 공간을 후벼팠다.
“이것이 그 이유다.”
당사극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을 읽기엔 너무 추하게 흘러내린 몰골이었으므로.
“아느냐? 초월지경에 이른 독이라 함은 이다지도 끔찍하고 강력하여 품는 것만으로도 몸을 망가뜨린다. 이것은 당문이 탄생했던 날부터 저주처럼 이어져 온 비극이었다.”
당사극의 목소리에 분노라고 할 만한 것이 맺혔다.
그조차도, 애정이 서려 있었다.
“진정으로 너만은 이런 고통 속에 살게 두고 싶지 않았다. 너만은 어여뻤던 미소를 간직한 채 눈을 감길 바랐다.”
텅 빈 당사극의 왼쪽 눈구멍이 좁아졌다.
“그것이 이유다. 내게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이 너였기 때문이란 말이다…!”
쿨럭!
당사극이 검은 핏물을 토해냈다.
크게 들썩이는 어깨와 부르르 떨리는 몸.
그 모습은 독왕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도 너무 추레한 꼴이었다.
직후 당사극은 삐걱삐걱 고개를 들며 하나 남은 눈으로 당화서를 응시했다.
“…왜 이런 마음을 몰라주는 게냐.”
당화서의 말문이 턱 막혔다.
“비행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더냐? 내 그리 오랜 시간을 줬음에도?”
질책에 속이 한 번 더 파였다.
‘분명….’
이것은 당화서가 몰랐던 일이다.
또한 그 나름의 애정임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역시, 이것은 이유가 되지 못했다.
당화서는 주먹을 꽉 쥐며 당사극을 노려봤다.
“…저는 초월을 바란 일이 없습니다.”
“미래엔 그럴 것이다. 무(?)라는 것은 결국 끝에 다다르고자 하는 욕심으로 귀결되는 것이니.”
“초월에 삶을 희생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여인으로써의 삶이 그리도 간절했더냐.”
“그럼 제가 그것을 놓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렇다.”
순간, 당화서의 얼굴이 멍해졌다.
당사극은 말을 이었다.
“여인이 아닌 당문의 주인으로 살아라. 그저 피붙이 하나가 아닌 이 거대한 혈연을 위해 살아라.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니더냐! 그것을 지켜온 수많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 아니더냔 말이다…!”
분명한 호통의 어조였다.
한데도 당화서는 지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왜 중요하다고 확신하는 겁니까? 저는 단 한 순간도 그런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는데?”
“내가 그랬으니까!!!”
화아아아아악!
공간에 독기가 가득 퍼졌다.
당화서의 몸이 비틀거렸다.
“우읍…!”
만독불침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 진득한 독기에 순간 현기증이 났다.
이것은 초월의 무게였다.
“여태까지 너와 같았던 이들이 없던 줄 아느냐! 나도, 내 선대도, 그 선대의 선대의 선대도 다들 그랬다! 각자 바라는 삶이 있었지! 한데 보아라! 그들의 선택이 결국 어떠했느냐! 결국 돌아온 곳은 고향이다!”
호통이 이어질수록 독기가 더욱 짙어진다.
짙어지는 독기는 분노의 농도였다.
“그리움에 사무치는 까닭이다! 이 비정하고 차가운 강호에서 기댈 곳은 결국 혈연밖에 없는 까닭이다! 꿈에서 깨 바라본 현실이 그다지도 잔혹했던 까닭이다! 너라고 다를 것 같더냐!”
고오오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독기가 당화서의 몸을 아래로 처박았다.
쿵!
당화서의 무릎이 꿇렸다.
그럼에도 당사극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너에게 헛바람을 넣은 게 그 단원들이더냐? 그래, 묵룡이라고 했던가. 그 근본 모를 촌것이 너를 홀렸나보구나…!”
당화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그의 표정은 온화하지 않았다.
“그것을 찢어 죽이면 네가 정신을 차릴까!”
“그러기만 해보십시오!”
당화서는 외쳤다.
저 노인의 아집이 기어코 목리원을 향하려 하는 것에 본능이 먼저 반항을 떠올렸다.
화아아악!
저항의 의지를 가득 담아 당화서가 기파를 일으켰다.
절정지경에 다다라 쌓은 그 무엇보다 매혹적인 독이 공간을 점하기 시작했다.
당화서의 부릅뜬 눈엔 어느새 분노와 투기가 맺혀있었다.
“절대, 죽어도 그런 일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당신을 막을 겁니다! 그리 파국을 맞아야 뒤늦게 후회하실 참입니까!”
단원들은 기껏 얻은 제 사람이다.
그것마저 빼앗아 가는 것을 당화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강호가 비정하여 기댈 곳이 이곳뿐이라 말했습니까? 가주께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으십니다!”
당화서가 양 주먹을 불끈 쥔 채 기파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초월에 이른 독은 무거웠으나, 만독불침의 몸은 그 압박을 덜어주고 있었다.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는 단전을 다 비워내서라도 이 독기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제게 그 무엇보다 비정했던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꽈드드득!
바닥이 짓이겨졌다.
기파의 충돌 탓이었다.
“제게 그 무엇보다 잔인했던 것은 당문이었습니다! 아십니까? 저의 어린 날은 모든 순간이 수렁이었습니다. 매일이 지옥이었고, 그런 와중에 품은 꿈조차 당신께선 앗아가셨습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나날, 당화서의 속에 자란 것은 다름 아닌 온기에 대한 갈망이었다.
절대적인 자신의 편이었고, 곧 가족이었다.
언젠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지켜주는 단란한 가정을 만들어 사는 것이었다.
당사극이 빼앗아 간 것이 그 꿈이었다.
“왜 당신과 저를 같다 여기십니까! 제 꿈은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이룰 수 있었을 정도로 작은 것이었을진대!”
분노가 곧 증오로 화해 독기를 짙게 만들었다.
독기(??)는 곧 독심(?心)이 되어, 당화서의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제게서 그 무엇도 앗아가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콰아아앙!
기파가 폭발하며 둘 사이에 모든 것이 쓸려나갔다.
이젠 가림막조차 없었다.
“그러니….”
당화서는 한차례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번들거리는 눈으로 당사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튼 생각일랑 마십시오.”
그렇게 돌아섰다.
당사극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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