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십삼장 사천, 결 (3)
* * *
당운경을 마주한 순간, 당화서는 기이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정된다기보다는 차갑게 타오르는 느낌.
굳이 이르자면 정제된 분노였다.
묵검의 씨를 대신 받아줄 여인이 있단 말입니다. 당문의 모두가 눈 감아 줄 것입니다. 소가주님은 그저 그 아이를 제 아이처럼 기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가 언어로 빚은 비수는 아직도 당화서의 가슴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그러니 당화서가 보일 것은 분노 외엔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낯짝으로 마중을 나온 것일까.
당화서는 그것이 참 궁금해 당운경을 물끄럼 봤고, 당운경은 흠칫 떨며 고개를 숙였다.
와중 당화서는 느낄 수 있었다.
당운경의 신경이 목리원을 향해있었고, 그가 보이는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참….’
헛웃음이 나온다.
이런 순간조차 자신은 두려워하지 않는 저 방만이.
분노가 조금 더 진하게 들끓었으나, 당화서는 참아냈다.
이 말종의 방만 따위는 이제 제게 조금도 중요치 않은 것이었으니.
“손님을 바로 부르지도 못하는구나.”
당화서는 서늘하게 말했다.
“내가 이곳에서 들어야 할 호칭은 소가주가 아니라 용봉단주다.”
당운경이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다는 듯 표정이 조금 멍해져 있었고, 당화서는 기파를 풀어헤쳤다.
화아악!
“끄윽…!”
당운경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주춤대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에 당화서는 말했다.
“당문은 손님 접대를 이딴 식으로 하나?”
“죄, 죄송….”
“당문이 너를 지켜주리란 생각을 말거라. 기억해라. 내 이곳에 발을 담글 생각은 없으나, 언제든 원한다면 네놈이 노리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것을.”
당화서는 손을 들었다.
그녀의 검지 끝에 암녹색의 기파가 서렸다.
독이었다.
마비독과 신경독.
그를 오늘 하루 정도는 고통 속에 살도록 만들 벌이라 해도 좋으리라.
톡
당화서가 당운경의 명치에 독을 대자, 당운경이 크게 들썩였다.
“꺼억…!”
당운경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숨은 꺽꺽대기 시작했고, 몸은 발작이라도 일어난 듯 경련했다.
쿵!
직후 당운경이 쓰러졌다.
그의 뒤로 서 있던 당문의 무인들이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당화서는 말했다.
“뭣하나. 어서 안내하지 않고.”
여전히 서슬퍼런 기색의 말.
당문의 무인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다, 이내 당화서와 일행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
당문의 내부로 들어온 당화서는 표정을 흐리게 만들었다.
‘…6년만인가.’
열여섯에 집을 나서 이제야 스물둘이 되었으니 딱 그 정도가 흘렀을 터다.
한데도 당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한 건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나날의 일이 떠오를 정도라면 설명이 될까.
연못이 자리한 마당이 보인다.
당화서는 그 마당 앞에 있다 끌려갔던 일을 되새겼다.
그 뒤로 문이 꽉 닫힌 건물이 보인다.
저곳은 벌을 받아야 할 때 몇 날 며칠을 갇혀있던 뇌옥이었다.
또 걸음을 옮기면 보이는 연무장은 손과 발이 부르트도록 비도술을 수련했던 자리.
그 너머에 있는 거대한 건물은….
‘…그대로구나.’
당화서가 가장 두려워했고, 또한 아파했던 독공의 수련실이었다.
당화서의 미간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걸음은 잠시 멎었다.
따라 걸음을 멈춘 목리원이 물었다.
“…소저?”
“아닙니다. 가지요.”
당화서는 수련실에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만 주먹을 꽉 쥐고, 앞으로 또 나아갔다.
“…도착했습니다.”
그리 도달한 곳은 당화서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였다.
‘내 집.’
그곳은 당화서가 기거했던 전각이었다.
오랜 과거엔 그나마 마음을 놓고 쉴 수 있었던 자리였다.
당화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거라.”
그리 말하자 이곳까지 용봉단을 안내했던 당운경의 수하들이 사라졌다.
“들어가지요.”
“아는 장소요?”
“제가 지냈던 곳입니다.”
“아….”
목리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완연한 호기심이었다.
당화서는 그 모습에 쿡쿡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짐부터 풀고 소개해드릴 테니 그리 안달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안달 내지 않았소!”
목리원이 허리를 곧게 펴며 말했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그제야 다른 단원들도 따라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누님! 방금 그 뺀질이놈 혼내줄 때 참 멋있었소! 당연히 설사독도….”
“신경독을 넣었다.”
“오우.”
제갈산이 흠칫하며 진저리쳤다.
혜운과 일운은 그 모습에 킥킥 웃었고, 남궁진천은 팔짱을 낀 채로 그런 말을 할 뿐이었다.
“내 집이 더 크군.”
남궁세가에서 그가 살았던 집과 비교를 한 듯했다.
하여튼 심각해질 틈을 안 주는 인간들이라, 당화서는 이리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향아, 너는 이 전각의 시비가 맞는 게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여기 사내 단원들이 묵을 자리를 좀 봐주겠느냐?”
소향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내들을 이끌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소저! 나중에 봅시다!”
목리원이 손을 크게 흔들며 멀어졌다.
혜운과 단둘이 남은 시점, 당화서는 장난스레 경고했다.
“혹 이곳에서 사고 칠 생각은 마시오.”
“어휴, 걱정도 팔자시네요. 저도 아무 남자나 막 만나진 않아요? 특히 비겁하게 가족이나 겁박하는 것들은 절대 안 만나죠.”
혜운이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레 말했다.
위로의 말이긴 한데, 영 믿음직스럽진 못했다.
그 기색이 티가 났던 걸까, 혜운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봐요?”
“아무 남자나 안 만난다기엔 그간 만나던 것들이 영 시원찮았던 것 같아서.”
“까보기 전엔 모르는 거죠.”
혜운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하여간, 아주 질리지도 않는 여편네였다.
“됐으니까 가지. 백봉은 나와 함께 잘 거요.”
“여기서 까지요?”
“얌전히 있을 거라더니?”
“그래두요. 저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걸요.”
“어련하실까.”
킥킥대며 당화서는 전각의 복도를 걷고, 그 끝에서 침실의 문을 열었다.
달칵.
매끄럽게 문이 열리는 게 기름칠이 잘 되어있는 듯했다.
안쪽도 마찬가지, 6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떠나던 날 그대로 방이 보존되어 있었다.
청소만 된 채로 말이다.
“여기가 단주님 방이에요?”
혜운이 호기심에 차 물었다.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되게 휑하네요. 맹에 있을 때도 느꼈지만 단주님은 참 물건을 안 모으시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당화서는 또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원체 무언가를 모으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유지만, 역시 휑하게 사는 이유는 다른 쪽이 더 컸던 까닭이다.
‘6년간 도망자 신세였으니.’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삶을 살아온지라 무언가를 챙겨두는 일이 익숙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당화서는 물건을 새로 들일 때면 처분할 때 어떻게 할지부터 고민하는 편이었다.
“되었으니 짐이나 풀고 가지. 다들 기다리겠어.”
“다들이 아니고 목 시주우… 넵, 다들이죠.”
헛소리의 기미가 보여 눈빛으로 막은 당화서는 가져온 짐을 침대 위에 대충 던져뒀다.
그렇게 방을 나서 안채에 들어섰다.
다행히 전각에 손님용 방이 두 개가 있었고, 사내 단원들은 맹에 있을 때와 같은 인원 구성으로 방을 가른 듯했다.
방에서 나온 목리원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저! 방에 커다란 항아리가 있더구려! 혹 요강….”
“아, 꽤 비싼 물건이니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것 하나가 어지간한 양민 가족 한 달 생활비 정도는 될 테니.”
“헙…!”
목리원이 바짝 굳었다.
제갈산은 낄낄 웃다 말했다.
“한데 이젠 무얼 하오? 일단 임무가 임무인 만큼 가주를….”
끝까지 잇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말에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를 만나야겠지. 최종결정권자는 결국 그였으니.”
당화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당문에서도 가장 높게 솟은 전각.
그 꼭대기 층에 조부인 가주가 있을 것이다.
‘…결국 만나는구나.’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차오르는 긴장이 있었다.
다만 싫어하는 상대이기에 떠올리는 긴장이 아니었다.
그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몸에 새겨진 고통의 개수만큼 알기에 떠오르는 긴장이었다.
‘한 번 정한 일을 무르는 법이 없지.’
고집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아집을 가진 사내다.
또한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내다.
아무렴, 숙원을 이루기 위해 제 피붙이조차 그리 이용하는 사내가 아닌가.
당화서는 마지막으로 그를 마주했던 날을 되새겼다.
숙원을 향한 열망에 절어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턱턱 멎게 하던 독기.
당화서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이젠 이겨내야 할 것이다.’
그리 마음을 다스리던 중, 소향이 들어왔다.
“아가씨.”
“무어라 하더냐.”
“…바로 만나자 이르십니다.”
“그래, 알겠다.”
당화서가 단원들을 바라봤다.
“그럼 갑시….”
“…아가씨 홀로 오시랍니다.”
멈칫
당화서는 고개를 돌려 소향의 안색을 살폈다.
곤란함과 송구함이 가득 묻어있는 표정을 보면 저쪽에서 막무가내로 정한 일이 분명했다.
“누님, 안 되오.”
제갈산이 경고했다.
당화서 또한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말이었다.
자신을 홀로 부른 그 저의는 분명 건전하지 못한 형태일 것이 뻔했으니.
하나 물러설 순 없었다.
“이건 임무다. 더군다나 상대를 회유해야 하는 형태의 임무. 단주로서 빠질 수는 없는 법이다.”
당화서는 다시 한번 제 입장을 분명히 했다.
사천당문의 소가주가 아닌 무림맹의 단주.
그런 만큼 조금 더 당당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다녀오마.”
당화서가 소향을 따라 나섰다.
단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리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
사천당문은 참으로 특이한 문파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파이자 세가.
양립하기엔 꽤나 어울리지 않는 두 요소를 모두 지닌 곳이 바로 이 사천당문이었으니.
문도가 되기 위해선 당문의 혈족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독공을 사용하는 당문의 특성상, 비전의 유출을 막기 위해 그들이 세워둔 철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화서가 생각하기론, 그 철칙이 당문을 이리 망가뜨린 원인이었다.
‘그 철칙 탓에 당문이 이리 폐쇄적인 가문이 되었다.’
아군이 되기 위해선 혈족이 되어 피로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당문의 비전을 노리는 적으로 간주한다.
즉, 당문은 흑백의 세계였다.
흑과 백, 적과 아군만이 있는.
그리고 그 극단에 있는 것이 바로 이 문 뒤에 있을 사내.
독왕(?王) 당사극이었다.
당화서는 가주전의 최상층 입구에 선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긴 시간을 이어가진 못했다.
안쪽에서 이미 제 기척을 느끼고 있을 것인 만큼, 이런 행동은 망설임으로도 비칠 우려가 있는 까닭이다.
당화서는 이내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직후 일순의 정적.
당화서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들거라.
딱 다섯을 셀 순간에 잔뜩 가래가 낀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점까지 바뀌지 않았구나.’
당화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