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막간 연심과 배덕 (2)
* * *
다음날의 단주 회의.
이제 막 맹에 복귀한 만큼 당화서는 바빴다.
회의가 끝나고도 자리에 남아 그간의 변동 사항을 바삐 정리해야 했고, 또한 다음 회의를 대비해 현 강호 정세를 머릿속에 때려 박아야 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다 끝내고 느지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던 중, 견동이 당화서에게 다가왔다.
“용봉단주.”
“음? 무슨 일이오?”
“그… 이것을 묵룡에게 전해줄 수 있겠소?”
견동이 내민 것은 곱게 포장된 작은 술병이었다.
당화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술?”
“그렇소. 내 이번에 묵룡 대협이 초절정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소. 축하의 의미로 전하고 싶은데, 도통 그쪽 전각으로는 갈 일이 안 생기더구려.”
머쓱하게 웃는 견동의 얼굴에선 전과 같은 독기가 없었다.
그날의 내기 비무가 그의 심경에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일까.
당화서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술병을 받아들며 장난스레 물었다.
“혹, 독이라도 탄 것 아니오?”
이제 그에게 남은 사감은 없었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애초에 그가 원한이라 할 만큼의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하나, 그것이 견동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온 듯했다.
“무, 무슨 경을 칠 소리를! 내 암만 소인배 소리를 듣는다고 하나 그 정도 악행은 하지 않소!”
견동이 펄떡 뛰며 외쳤다.
당화서는 그만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오. 내 목 소협께 잘 전해드리지.”
“크, 크흠! 농담으로라도 조심해주시오.”
견동은 안도하며 그리 중얼거리다, 이내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해주시오.”
“아, 그게….”
견동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내 가만 돌이켜 보니 말이오. 용봉단주께선 묵룡 대협을 항상 ‘목 소협’이라 부르더구려. 그 이유가 궁금한데 혹 물어도 되겠소?”
“아….”
당화서는 그의 말에 작게 소리를 흘렸다.
사실, 이것은 당화서도 신경 쓰고 있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세간의 평이 그렇지 않나.
목리원은 강호에 나온 이후로 행한 굵직한 협행이 꽤 되는 무인이었다.
솔직한 말로 ‘대협’이라는 칭호를 줘도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든단 말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굳이 호칭을 바꾸자니 어색함이 인다.
호칭이라는 것은 본디 상대방과 자신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을 때나 바꾸는 게 옳은 것이었고, 당화서가 생각하기에 목리원과 자신의 관계는 처음 만났던 때부터 크게 변하지 않았다.
특히 연애사 쪽으로는 말이다.
“….”
당화서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얼굴엔 살짝 붉은 기가 감돌았다.
‘굳이 호칭을 바꾸자면….’
조금 더 친숙하거나, 또는 가까운 호칭이 좋았다.
예를 들면 말이다.
예를 들면!
‘가, 가가라거나….’
당화서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연인을 부르는 호칭을 떠올리는 순간, 부끄러움은 갑작스레 머리끝까지 차올라 몸에 미증유의 힘을 더했다.
몸이 다 뒤틀리는 부끄러움에 당화서가 눈을 질끈 감으며 책상을 내려쳤다.
콰아아앙!
“무슨 소리를!”
“히이익!”
견동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당화서는 그제야 눈앞에 견동이 있음을 깨달았다.
무안함에 당화서는 말했다.
“큼, 크흠…. 잠시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미안하오.”
견동의 고개가 무공이라도 쓴 것처럼 빠르게 휘저어졌다.
“아, 아니오! 사람이 안 좋은 일이 있으면 화가 날 수도 있는 법이지! 암! 나, 나는 바쁜 일이 생각나서 그만 가보겠소! 수고하시구려!”
견동이 헐레벌떡 뛰어 회의실을 나갔다.
당화서는 머쓱함에 괜히 한숨을 내쉬었다.
‘화서야, 정신 좀 차리거라.’
요즘 들어 왜 이러는 것인지, 참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었다.
*
전각으로 돌아온 당화서는 곧장 목리원을 찾아 술병을 전했다.
“진원단주가 전해달라 부탁하더군요. 초절정은 축하하는 의미랍니다!”
“오! 단주께서 말이오!”
목리원은 환히 웃으며 술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마개를 슬쩍 뽑아 술내음을 맡으며 길게 미소 지었다.
“흐으… 좋구려. 꽤 비싼 술인 것 같소. 소저도 냄새 한 번 맡아보시오.”
목리원이 술병의 입구를 들이밀자 당화서는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감탄사를 흘렸다.
“예, 확실히 보통 술은 아니군요. 이 정도라면 진원단주도 꽤 무리했을 텐데, 후일 만나면 감사 인사라도 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목리원은 다시 술병에 마개를 씌우고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소저! 그럼 갑시다!”
“응? 어딜 말입니까?”
“마셔야 하지 않겠소!”
술병을 짤랑짤랑 흔드는 것이 함께 술을 마시자는 뜻인 듯했다.
당화서는 눈을 끔뻑이다, 이내 그 제안에 승낙했다.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급한 일은 다 끝내고 온 만큼 여유가 있었다.
당화서는 목리원을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
도착한 곳은 이젠 참 익숙해진 전각의 마루였다.
앞으로 소담한 연못과 들풀이 자라 있고 주변은 고요하여 적막한 분위기가 흐르는 장소.
“자, 그럼 한 잔 드리겠소! 아! 비싼 술이니 취기를 몰아내선 안 되오! 무조건 취하는 것이오!”
목리원이 신나 외쳤다.
당화서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만독불침(??不?).
당화서의 체질은 그녀에게 취기를 허락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는 목 소협이야 말로….”
멈칫
당화서는 말을 내뱉다 멈췄다.
‘…취한다고?’
시선이 물끄럼 목리원을 향했다.
돌이켜 보면 그랬다.
목리원은 술을 꽤나 즐겨 마시는 편에다 취기도 굳이 물려내지 않는 사내였으나, 만취할 정도로 술을 먹는 쪽은 아니었다.
언제나 주량은 철저히 조절하는 편.
즉, 당화서는 아직 목리원의 주사를 몰랐다.
‘목 소협의 주사라….’
‘꼴깍’하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음험한 욕구는 이 순간 희망사항에 가까운 상념을 펼쳐내고 있었다.
소저어….
술에 만취한 목리원이 애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너무 덥구려….
취기에 열이 올라 옷가지를 하나씩 벗어가는….
끄응… 잘 안 벗겨지는구려.
그러다….
소저… 좀 벗겨주시겠소…?
우지끈!
당화서가 짚고 있던 마루바닥이 으깨졌다.
“흐익!”
목리원이 화들짝 놀랐다.
당화서 또한 뒤늦게 아차하는 마음을 떠올렸다.
‘이런!’
멍청한 사고를!
당화서는 겁먹은 목리원의 표정에 순간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로 당황하다, 이내 변명을 토해냈다.
“보, 보수가 필요하겠군요. 바닥 내구성이 영….”
“그, 그런 거요?”
“그럼 제가 일부러 부수기라도 했겠습니까?”
목리원이 미심쩍다는 듯 당화서를 바라봤다.
당화서는 끝까지 평온을 가장했고, 그제야 목리원은 의심을 거뒀다.
“…알겠소.”
당화서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서 마시지요.”
말을 돌렸다.
목리원이 고개를 끄덕이곤 잔을 채워 내밀었다.
“건배라도 한 번 하는 것 어떻소?”
“좋지요.”
째앵
술잔이 부딪치며 맑은 소리가 일었다.
당화서는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에 이 술의 도수를 어림잡을 수 있었다.
‘꽤 독한 놈이구나.’
물론, 취하진 않겠지만.
“크으…!”
목리원이 얼굴을 확 찌푸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독하구려!”
“제일….”
취할 수도 있단 말인가.
당화서는 묘한 기대감이 속에 샘솟는 것을 느꼈다.
흘끔 바라본 목리원의 얼굴이 그 한 잔에 붉어져 있었다.
또 괜히 넘어가는 마른침.
당화서는 입술을 앙 물다, 이내 목리원에게 술을 더 권했다.
…그녀의 이성은 욕망을 이길 정도로 견고하지 못했다.
해내는 것은 한없이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사고였다.
‘주, 주사를 미리 알아보는 것이다. 암, 혹여 후일 목 소협이 취해 사고가 일어날 걸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지!’
“한 잔 더 드시지요. 따라드리겠습니다.”
“아, 고맙소! 소저는….”
“저는 맛만 본 것으로 충분합니다. 애초에 진원단주가 목 소협을 위해 준비한 술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에게 더 나눠줬다간 섭섭해할 겁니다.”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인지, 당화서는 근래 해본 것 중 가장 조리있게 잘 나오는 말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표, 표정 관리를….’
계속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제하려니 뺨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와중 목리원이 두 잔째를 처리했다.
“크으…!”
“자, 또 드시지요.”
“으응…? 아껴 마셔야 하지 않겠….”
“한 번 포장을 뜯은 술인 만큼 남겨두었다간 지금같은 주향이 나오지 않을 터입니다. 아깝지 않습니까?”
“으음, 그것도 그렇구려.”
목리원이 술을 받았고, 또 마셨다.
그 순간의 목리원은 조금 풀어진 얼굴이었다.
이어진 네 잔째.
목리원의 눈이 완전히 풀어졌다.
옷매무새는 살짝 흐트러졌고, 눈꺼풀이 곱게 눈 위를 덮어 기다란 속눈썹을 자랑했다.
이것은 당화서가 상상한 만취 목리원과 꽤 닮아 있었다.
“…자, 여기 다섯 잔째입니다.”
“으응….”
비틀비틀 목리원이 잔을 내밀었다.
당화서가 따랐고, 목리원은 마셨다.
“끄우으….”
목리원의 고개가 꾸벅꾸벅 앞뒤로 오갔다.
거의 다 온 듯했다.
당화서는 실눈을 뜨고 그 모습을 보다, 남은 술을 확인했다.
한 잔 분량이었다.
‘쯧, 좀 큰 놈으로 가져오지.’
하여튼 소인배 같은 이라고.
견동이 들었으면 억울해 미칠 말을 속으로 내뱉은 당화서가 마지막 잔을 채웠다.
목리원은 뭣도 모르고 그것까지 마셨다.
그 순간이었다.
탁
목리원의 술잔이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소저어….”
꼬인 발음으로 목리원이 말했다.
“세상이 여러개요오….”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내뱉는 말.
참으로 귀여웠다.
“그, 그렇습니까?”
당화서는 더 이상 입꼬리를 끌어내리는 일이 불가능함을 느꼈다.
삐죽삐죽 입꼬리가 솟았다.
목리원의 고개가 당화서를 향했다.
짧게 마주친 시선.
직후 목리원이 엉금엉금 기어 당화서에게 다가오곤,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었다.
“소저어… 너무 졸리오….”
그리 말하며 당화서의 손을 꼭 붙잡았다.
쿵쿵쿵쿵!!!
당화서는 누군가 귓구멍에 북을 쳐대는 기분을 느꼈다.
스스로의 박동이 그리도 크게 들려온 것이었다.
“조, 졸리십니까?”
“우응….”
목리원이 붙잡은 당화서의 손을 제 뺨에 비볐다.
그러다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시원하오오….”
‘미친!’
당화서는 순간적으로 펄떡 뛸뻔한 것을 참았다.
등골에 짜르르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왜인지 머리에 피가 몰렸다.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음험함은 인생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황.
당화서는 천장을 보며 심호흡했다.
하나, 그런 일로 진정될 정도의 자극이 아니었다.
당화서는 개탄했다.
‘무슨 놈의 주사마저 이리 요망할까!’
이런 발칙한 사내 같으니라고!
이것은 살아있는 색공이다!
걸어 다니며 주변에 있는 건 죄다 홀리는 천하의 불여우다!
절대!
죽어도!
이 모습이 세상에 밝혀져선 안 된다!
차오르는 결연함.
그리고 슬슬 차오르는 배덕감.
순간.
‘…잠깐.’
당화서는 멈칫했다.
‘배덕감…?’
그제야 당화서는 깨달았다.
이성을 만취 상태에 빠트려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할 음험한 속내를 부풀리는 스스로의 모습이, 왜인지 제갈산 같다는 것을.
“….”
“소저어….”
기이한 감각이었다.
배덕감과 제갈산이라는 단어 두 개가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이 꼭 두개골을 뜯어 그 속에 얼음을 쑤셔 넣은 수준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한 걸까.
자괴감이 엄습했다.
당화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을 질끈 감은 당화서는 속으로 외쳤다.
‘화서야!’
정신 좀 차려라!
그렇게, 오늘도 목리원의 순결은 무사히 지켜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