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십이장 임무, 조사 (10)
* * *
연리건은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으며 목리원을 바라봤다.
‘결국 올랐나.’
완전한 초절정.
심상 속에 존재하는 의념을 이끌어내 구현하는 경지.
예상은 했지만, 그것보다 더 빠르게 그 경지에 도달하고 말았다.
곤란한 일이었다.
‘하나, 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명령받은 것은 목리원의 포획.
연리건은 금이 간 검을 고쳐 쥐며 그 위에 마기를 덧씌웠다.
“훌륭한 수.”
“칭찬을 듣고자 한 것이 아니오.”
“그럼에도 훌륭했다. 그러니….”
화아악!
연리건의 마기가 그의 전신을 덮었다.
“…재롱을 봐주는 건 여기까지.”
연리건이 쏘아져 나갔다.
목리원도 그에 맞서 다시 한번 내기를 터뜨렸다.
콰아아앙!
공간이 진동했다.
*
목리원이 연리건을 상대하는 와중.
당화서 쪽은 밀려드는 적들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끄악!”
“꺼헉!”
잡졸들을 처리하는 것은 당화서였다.
그녀는 독무를 온통 풀어내 주변을 휘젓고 있었다.
남궁진천의 역할은 서예의 보호.
독기를 뚫고 서예에게 손을 뻗는 이가 나올 때면, 남궁진천이 자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마인 하나가 정수리부터 반으로 쪼개졌다.
서예는 그 장면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고마워요.”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붙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서예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이 와중에도 코웃음이나 치며 시비를 거는 남궁진천이 아니꼽게 보이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여유, 나쁘게 말하면 오만이었다.
서예가 속으로 욕을 지껄이는 걸 알기나 하는지, 남궁진천은 또 한 발 앞서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서걱!
이번 역시 단번에 적을 베어내는 검.
하나, 적이 너무 많았다.
콰앙!
“꺼억…!”
당화서는 주먹으로 마인의 목젖을 갈겼다.
그리하며 전황을 살피곤, 입술을 앙 물었다.
‘너무 많다.’
심부엔 적이 적을 것으로 판단했건만 이제까지 만난 것만 해도 오십이 넘는다.
미리 내부에 병력을 집중시킨 것인가?
‘…아니.’
당화서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목리원이 막으러 갔던 방향의 강자.
그것을 생각해보면 전력이 충원되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이대로는 시간 내에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당화서는 그런 마음에 외쳤다.
“검룡! 문주를 데리고 먼저 심부로 향하십시오! 이곳은 제가 틀어막겠습니다!”
이제부터 문주실까지는 직선 통로다.
즉, 병력이 몰린다면 뒤에서 쫓아오는 쪽일 테니 자신이 남아 저들을 막고 서예를 문주실로 보내는 게 더 빨랐다.
남궁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흐앗!”
“부탁하지.”
서예가 놀라던 말던, 남궁진천은 전신의 내기를 터뜨리며 앞으로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당화서는 그제야 숨을 돌리며 전방을 바라봤다.
그리하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아주 개떼처럼 몰려드는구나.”
그리 찢어 죽인 것이 몇십은 족히 될 터인데 어디서 또 튀어나온 것인지 통로 가득 마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화서는 ‘뚜드득’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풀었다.
“숫자로 밀어붙일 생각은 말거라.”
경지가 떨어지는 이들과의 다 대 일이라면 당화서가 그 무엇보다 자신있어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젠 아군의 중독을 고려해 독성을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사아아
당화서의 몸에서 암녹색의 독무가 흘러나왔다.
애심(?心).
그녀가 절정에 오르며 깨우친 독이 공간을 다 점하기 시작했다.
“와라.”
당화서가 그리 말하고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독무가 파도치듯 퍼져나갔다.
“죽여라아아!”
마인들이 성나 외쳤고, 당화서의 고독한 방어가 시작되었다.
*
내내 달려 도착한 문주실 문 앞.
남궁진천은 미간을 좁혔다.
“안에 있군. 강자.”
“색마일 거예요. 괜찮으시겠어요?”
“우스운 질문이다.”
남궁진천을 내공을 실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그러자 드러난 광경이 있었다.
꽤 넓은 공간.
벽은 온통 책장으로 들어차 있었고 그 끝엔 책상이 아닌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있는 여인과, 그 밑에 말라 비틀어진 시체를 보며 남궁진천은 말했다.
“네년인가? 색마가.”
“네가 묵룡이니? 생각한 것보단 못생겼는데.”
움찔
남궁진천의 손끝이 떨렸다.
표정은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 중 색마 양고혜에 말을 이었다.
“이딴 게 세상에 다신 없을 미남? 차라리 소교주님이 낫겠구나.”
“소교주라….”
남궁진천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리하며 분노를 털어내고자 했고, 잘되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창녀가…!”
남궁진천의 눈에 핏발이 섰다.
화악!
짙푸른 내기가 공간을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서예는 숨을 컥컥 댔다.
자신을 향한 살기가 아니었음에도 다만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몸이 비명을 지른 것이었다.
탁.
남궁진천이 한 발 내딛자 양고혜가 씨익 웃었다.
“아, 검룡이구나? 묵룡이 나오자마자 이인자로 밀린 떨거지. 하긴, 딱 봐도 이등처럼 생기긴 했어.”
“닥쳐라.”
검이 위로 들렸다.
그리고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그러자 남궁진천이 펼친 내기가 공간을 뛰어넘어 양고혜의 허리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 양고혜가 손을 뻗었다.
쾅!
양고혜의 손에 맺혀있는 것은 새하얗게 타오르는 불길한 불꽃.
남궁진천의 내력은 그 손에 막혔다.
“소수마공(?手??).”
남궁진천도 아는, 이 강호에서 마공이라 하면 떠오른 대표적인 무공 중 하나였다.
양고혜는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은 것인지 벗은 것인지 분간도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헐벗은 꼴.
양고혜의 긴 다리가 반들거리며 맨살을 자랑하고 있었다.
“으음, 꿩 대신 닭이라고. 네놈 기나 빨고 있어야겠다. 그러다 보면 묵룡도 실려오겠지?”
“그 전에 모가지를 따주지.”
“따이는 건 네놈 동정이란다.”
남궁진천의 목에 핏대가 섰다.
양고혜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니? 동정은 뭘 해도 동정 티가 난단다. 네놈도 그래. 창녀니 어쩌니 하면서 정결에 목숨 거는 게 딱 동정들이나 보일 행동이지.”
“창녀가 말이 많다.”
쾅!
남궁진천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검은 막혔으나, 남궁진천은 개의치 않았다.
“쓰레기 같은 창녀. 너는 여기서 죽는다.”
부릅 뜨인 눈으로 짓씹듯 내뱉은 말은 남궁진천의 분노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서예는 숨이 막혀 힘겨운 와중에도 말했다.
“도발에 넘어가면 안 돼요! 색마의 무공은….”
“나는 도발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걸렸잖아!’
목에 핏대까지 세우면서 외치는 주제에 뭐가 안 걸린 것이란 말인가.
눈에 핏대가 다 서있는데 뭐가 안 걸린 것이란 말인가.
서예는 낭패 어린 심경을 토해냈다.
색마 양고혜의 무공은 일견 사술과도 같은 기제를 가지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또한 그 감정에 이성이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더욱 쉽게 상대를 유혹한다.
하여 하오문이 그리 쉽게 당한 것이었다.
양고혜가 문도들 앞에서 다른 문도를 찢어 죽이며 분노를 부추겼기에, 그리 이성이 흐려졌기에 모두 당한 것이란 말이다.
이대론 안 된다.
서예가 그런 마음을 띄워 올리는 순간.
“죽어라 창녀!”
남궁진천이 또 검을 휘둘렀다.
이미 반쯤은 이성을 잃은 듯했다.
“썩은 내 나는 버러지가!”
쾅!
“애비랑도 붙어먹을 역겨운 계집이!”
쾅!
“지아비만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지조없는 년이!”
쾅!
연격이 이어질수록 남궁진천의 기세가 더욱 포악해졌다.
서예는 그 와중에도 뒷골이 확 당기는 기분을 느꼈다.
“검룡!”
“말 걸지 마라!”
쾅!
또 한 번, 남궁진천이 검을 휘둘렀고 양고혜가 그것을 막았다.
들썩이는 남궁진천의 어깨는 직전 공세에 그가 얼마나 많은 내력을 실었는지를 보여줬다.
양고혜가 씨익 웃었다.
[얘.]
기이한 울림으로 말을 내뱉었다.
흠칫
남궁진천의 몸이 떨렸다.
눈이 멍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오렴.]
사술.
서예는 이미 한 번 이 사술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남궁진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 돼요!”
하나 막지 못했다.
남궁진천이 서예에게 붙잡힌 채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더 다가오렴.]
그 말에 또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더.]
다시 한 발 내디뎠다.
서예의 낯빛이 새하얘졌다.
‘어떻게…!’
서예가 눈을 굴렸다.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
이지가 흐려진 남궁진천을 다시 일깨울 방법.
쉼없이 이어지는 사고가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서예는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를 잡아챘다.
동정.
색마가 남궁진천을 도발하기 위해 내뱉었던 말.
남궁진천을 흔들었던 말.
서예의 머릿속에 빛이 반짝였다.
눈동자게 깃드는 것은 망설임.
하나, 이내 사라졌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야!’
서예는 얼굴을 붉혔다.
남궁진천의 허리를 놓고 그의 앞으로 나와, 까치발을 든 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눈은 질끈 감겨있었다.
쪽
서예와 남궁진천의 입술이 맞닿았다.
순간 남궁진천이 들썩였다.
‘반응이 있어!’
서예는 부르르 떨며 이어 행동을 개시했다.
꽈악!
있는 힘껏 남궁진천의 입술을 깨물고 혀를 집어넣었다.
츄릅!
혀와 혀가 맞닿는 느낌에 왜인지 모를 찌릿함이 서예의 등골을 타고 흐르던 와중.
“어딜!”
서예가 하려는 행동을 눈치챈 양고혜가 마기를 쏘아냈다.
새하얀 불길이 크게 아가리를 벌리며 두 사람을 노렸다.
눈를 굴린 서예가 그것을 발견했다.
‘당했…!’
이대로 가다간 저 불꽃에 몸이 타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떠오르는 순간.
“…느으르.”
그런 말이 서예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다시 남궁진천을 바라보니, 그는 제게 입술이 물린 채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서예가 놀라 고개를 빼냈다.
그러자 남궁진천이 크게 팔을 휘저었다.
콰아아아앙!
남궁진천이 터뜨린 내기에 불꽃이 스러졌다.
서예는 환해진 얼굴로 외쳤다.
“검룡! 깨어나셨군요!”
“….”
남궁진천은 답하지 못했다.
새빨개진 얼굴과 떨리는 입술은 그가 수치심에 답을 미루고 있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실제로 남궁진천은 접싯물에 코를 박고 죽고 싶었다.
순식간에 돌아온 현실.
왜인지 입술을 통해 느껴지던 통증과 말캉거리는 감촉.
시야를 가득 메우던 서예의 빨간 얼굴.
쿵 쿵
다시 떠올리자 남궁진천의 심장이 크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이 내가…!’
사술에 당해 외간 여자에게 입술을 내어주다니!
사고에 부딪친 이가 으레 그렇듯, 남궁진천은 다른 무엇보다 변명할 거리를 먼저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변명거리가 있었다.
“…미혼향을 뿌려놨군.”
남궁진천은 그제야 이 공간 전체에 이지를 흔드는 미혼향이 뿌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양고혜가 ‘쯧’하고 혀를 차며 답했다.
“아깝네. 바로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쓰레기 같은 것. 별 같잖은 수를 다 쓰는군.”
“당해놓고 할 말이니?”
양고혜가 코웃음 치자 남궁진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서예는 또 남궁진천을 말렸다.
“검룡!”
“안다.”
남궁진천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양고혜를 노려봤다.
같은 도발에 두 번 당해줄 정도로 남궁진천은 멍청하지 않았다.
기묘한 대치 상태.
양고혜는 한숨을 푹 내쉬다 마기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화르륵!
타오르는 마기가 점차 어떠한 형상을 빚기 시작했다.
초절정의 상징, 기공(??)이었다.
서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남궁진천에게 물었다.
“이제 어떡하죠?”
“깨부순다.”
“하지만 기공이…!”
“깨부수면 그만이다.”
남궁진천은 양고혜를 노려보며 내공을 풀어헤쳤다.
살아생전 단전을 영약에 절이듯 키워온 공력은 이미 절정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있었다.
“초절정, 닿으면 그만이다.”
“그게 말처럼 쉽…!”
“쉽다.”
고오오!
남궁진천의 머리칼이 공간을 흔드는 내력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별이 말한다.”
제왕성(?王?).
남궁진천을 차기 천하제일이라 불리게 만든 별이 속삭이고 있었다.
새로운 청사진이었다.
“지금이야말로 벽을 뚫을 때라고.”
서예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남궁진천이 나서며 말했다.
“그러니 구석으로 비켜있어라.”
재차 공간을 찍어 내리는 내공의 폭풍 속에서, 서예는 얌전히 걸음을 물렸다.
직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것에 왜인지 모를 기대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런 중에도 떠오르는 생각은 있었다.
‘…뭔가.’
유혹에 실컷 당해서 추태란 추태는 다 보여줘 놓고 저러니, 멋있진 않았다.
“바로 끝내지.”
조금… 많이 그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