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99화 (99/334)

〈 99화 〉 십이장 ­ 임무, 조사 (6)

* * *

서예는 제 정수리를 부여잡는 남궁진천의 모습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것 중 한심함을 제외한 무엇도 드러내지 않았다.

분위기가 깨졌으나 따지고 보면 잘된 일.

긴장이 풀린 것은 자신뿐만 아니었다.

“…믿지 못하시겠죠. 그러니 제안할 것이 있어요.”

서예가 당화서에게 말했다.

남궁진천을 보며 씩씩대던 당화서가 홱 고개를 돌렸다.

“제안?”

“제 품을 뒤져보시겠어요? 단환 하나가 있을 거예요.”

서예는 당화서가 제 품에 손을 넣고 더듬거리는 것에 말했다.

“좀 더 아래요. 가슴골 사이.”

목리원이 고개를 돌렸고 제갈산은 눈을 좁게 만들며 집중했다.

남궁진천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체격에 맞지 않게 가슴만 부풀었다 했더니 물건을 끼워 부피를 불린 것이었군. 천박한 것. 그리 몸이 부각하고 싶던가.”

이번엔 혜운이 나섰다.

빠악!

남궁진천은 맞은 곳을 한 대 더 맞았고, 서예는 남궁진천을 경멸 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와중 당화서가 단환을 찾았다.

진한 갈색의 엄지손톱만 한 단환이었다.

당화서는 냄새로 단환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산공독, 그리고 소화되며 퍼지는 극독이 조금.”

극독의 경우 소화가 끝난 이후 일주일 내에 해독하지 못하면 목숨을 앗아가는 종류였다.

당화서가 묘한 눈으로 서예를 바라보자, 서예는 말했다.

“그걸 저한테 먹이세요. 해독제는 하수오와 같이 비밀 금고에 있어요.”

“그 말을 믿을 근거는?”

“여기서 옷이라도 다 벗겨보실래요? 입속이나 목구멍을 뒤져봐도 돼요.”

당화서는 사양하지 않았다.

“백봉만 빼고 다 나가 계십시오.”

당화서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하자, 사내 셋이 아쉬워하는 제갈산을 억지로 끌고 나갔다.

결과만 말해보자면 그랬다.

해독제를 숨길만 한 구석은 다 찾아봤고, 서예에겐 해독제가 없었다.

서예는 당화서가 자유롭게 몸을 풀어주자 스스로 옷을 입었다.

“이제 믿으실 수 있나요?”

“…확실히 해독제가 없다는 것은.”

“거래, 승낙해주셨으면 해요. 저는 이 이상 지체할 수 없어요.”

당화서는 고민했다.

그녀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얼추 믿을 수 있겠으나, 여전한 전력 차이를 감수할 만큼 100년 하수오 일곱 뿌리가 가치가 있는가.

그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서예는 이번 역시 그 기색을 알았다.

‘신중해.’

까다롭다.

하지만 아직 가진 무기는 남았다.

“이곳에 온 목적은 마인들이겠죠.”

“…그렇다면?”

“마인들의 정보. 그것을 알려드릴게요.”

당화서의 눈이 커졌다.

서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일을 모두 끝낸 후에요.”

당화서는 잠시 서예를 바라봤다.

당돌한 꼴.

먼저 떠올린 것은 그런 생각이었다.

“…내가 문주를 고문할 것이란 생각은 안 해봤소?”

스으으

당화서의 몸 주변에서 암녹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표정은 굳어 있었다.

완연한 협박의 기색이었다.

“아실려나 모르겠소. 나는 사람을 괴롭게 하는 방법을 꽤 많이 알고 있다오.”

“모를 리가요.”

서예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지지않겠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독왕이 구한 독, 그 모든 게 합법적인 경로를 통했다는 상상은 안 했으리라 믿어요.”

당화서가 표정을 구겼다.

혜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서예는 다시 말했다.

“제가 직접 구한 게 몇 개 있었죠. 그리고 하오문은 어느 곳에나 있어요.”

제 정보력을 얕보지 말란 말.

동시에 그런 것도 모르고 강짜를 부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당화서는 그녀의 기개만큼은 인정했다.

‘고문은 안 되겠군.’

실토할 만한 여인은 아닌 것 같았다.

당화서는 겸허히 그것을 받아들이곤 말했다.

“…문주, 당신이 기억하는 비밀 통로가 남아있길 바라야 할 거요.”

단환이 당화서의 손안에서 빛났다.

그녀의 독기가 단환에 더해지는 것이었다.

“이제 이 독은 해독제만으로 해독할 수 없을 테니까.”

독봉 당화서.

그녀는 아군에겐 한없이 친절했으나, 적에겐 무자비한 여인이었다.

당화서가 서예의 입을 벌리고, 그 속으로 단환을 쑤셔 넣곤 삼키게끔 만들었다.

거래 성립이었다.

*

하오문의 비처는 어두웠다.

그저 건물 내부가 어둡다 정도가 아니라, 그 건물을 이루는 주변까지 모두 어두웠다.

지금이 정오의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연했다.

하오문의 비처는 동굴 속에 있었으니.

은은하게 빛나는 야명주 몇 개만이 주변을 아련하게 밝히는 비처 내부.

전신에 흑색 잠행복을 입은 사내가 심부로 걸어 들어갔다.

사내는 숨을 참고 있었다.

이곳에서 편히 숨을 내쉬었다간, 혼과 백이 모두 홀려 잡아먹힐 것이 분명했으므로.

터벅, 터벅.

정적 속에 사내의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위로 어디선가부터 울려온 신음이 더해졌다.

­아앙….

­흐으….

인간이 낸 소리가 분명하나, 인간의 것이라기엔 조금의 이지도 느껴지지 않는 소리.

그저 열락에 빠져 모든 것을 잊은 소리.

이 모든 것은 이 심부의 끝에 있을 여인이 만든 것이었다.

사내는 심부의 끝에 있는 거대한 문 앞에 부복하여 말했다.

“대주.”

­들어오너라.

들려오는 목소리는 요사스럽고, 끈적했다.

채 가시지 않은 열기 또한 있었다.

다만 그뿐일까, 그 목소리엔 듣는 이로 하여금 그저 울부짖으며 매달리고 싶게끔 만드는 마력까지 존재했다.

푸욱

사내가 제 허벅지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식은땀을 줄줄 흘린 채로 이를 악문 후에, 문을 열었다.

그곳에 있었다.

색마(色?) 양고혜.

길이가 키보다도 더 길게 느껴지는 새까만 머리칼, 석회를 피부 위로 바른 듯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 하얀 피부와 또 그것과는 대비되는 새빨간 입술.

그리고 열락에 젖은 눈.

그녀는 옷 섬이 다 풀어헤쳐진 채 간신히 중요한 부위만 가린 상태로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의 발아래엔 몸의 수분이 다 빨려 나간 듯 삐쩍 마른 시신이 존재했다.

양고혜가 개운함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년은 찾았느냐?”

“찾지 못했습니다. 하나, 짚이는 것이 생겼습니다.”

“무엇이냐.”

“용봉이 귀주를 찾았습니다.”

양고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호오….”

“귀주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고 합니다. 하오문주가 나타난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함일 것이란 결론이 나온 참입니다.”

“자존심도 없는 년이구나. 흑도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 백도에 도움을 구해?”

‘꺄르륵’하고, 양고혜가 소리 높여 웃었다.

사내는 그 소리에 또 심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을 감시합니까?”

“아니. 내버려 두거라.”

“예?”

“내버려두란 말이다. 그럼 이리로 오지 않겠느냐.”

양고혜가 맨발을 다 드러낸 채 발아래 널브러진 바짝 마른 시체를 엄지발가락으로 슥슥 쓸었다.

“그 용봉이란 것들 말이다. 어차피 잡아야 하는 것들이 아니냐. 그리고 묵룡.”

묵룡, 묵룡, 묵룡.

세 번을 되뇐 양고혜가 시뻘건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것이 그리도 참하게 생겼다지?”

양고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눈엔 또 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사내는 곤란한 듯 입술을 달싹였고, 그걸 눈치챈 양고혜가 말했다.

“살려만 두면 되는 것 아니냐. 살려만.”

그녀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접혔다.

“그래도 잡은 보상으로 조금만 즐겨도 되는 게잖느냐. 들려오는 소문으론 세상에 다신 없을 미남이라던데, 내 언제 그런 것들 또 맛보겠냔 말이야.”

톡, 톡.

양고혜가 시체를 발로 두드렸다.

그러다.

꽈직!

가슴 한가운데를 짓밟아 터뜨렸다.

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심하게 말라 죽어있는 까닭이다.

양고혜가 어깨를 들썩이며 끅끅 웃었다.

“숨만 붙여두면 정기는 조금 빨아가도 되는 게지. 음, 좋다.”

양고혜가 옷 섬을 여몄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바로 선 그녀는 어지간한 사내와도 비슷한 수준의 키였다.

다리가 그리도 길었다.

“하아… 빨리 만나고 싶구나.”

양고혜가 뺨을 쓸며 그리 말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목소리 하나가 더 들려왔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부복하고 있던 사내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그늘진 아래 검을 품에 안고 앉아있는 남루한 옷의 사내가 있었다.

‘언제부터?’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조금의 기척도 없었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감각.

하나, 사내가 그의 정체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거, 검마(?)님을 뵙습니다.”

검마 연리건.

마도육문 중 칠검문의 소문주.

직위와는 다른 남루한 무복과 멍하게 풀린 동공, 품에 안고 있는 폭이 넓은 검이 그것을 일러주고 있었다.

연리건이 말했다.

“명령이 우선이다.”

“또 그딴 소리나 하는구나.”

양고혜는 ‘쯧’하고 혀를 차며 답을 이었다.

“네놈은 본인 머리로는 생각이란 걸 못하는 게냐? 하긴, 그러니까 양물도 안 서는 병신같은 몸뚱어리에 수치심도 못 느끼지.”

비아냥인 잔뜩 들어간 말.

양고혜가 그를 아주 아니꼽게 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리건은 개의치 않는 듯 답했다.

“양물로 검을 휘두를 것은 아니니, 굳이 필요치 않다.”

“어련하겠느냐.”

양고혜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걸 감시역으로 붙이셔선.’

제 머리론 생각이랄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머리에 든 것이라곤 소교주의 명령 하나뿐인 백치.

꼬장꼬장하긴 또 얼마나 심한지, 공력을 채우기 위한 합일에도 하나하나 딴지를 걸어온다.

즉, 저것이 옆에 있으니 흥이 다 식어버린단 말이다.

‘저걸로 놀자니 고자라서 쓰지도 못하고.’

여러모로 애물단지 같은 놈.

소교주의 명만 아니었다면 바로 찢어 죽였으리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양고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제까지 부복하고 있던 사내에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그놈들은 어디 있다고 하느냐?”

“장원에 숨어 있습니다. 내부까지 침투해보고자 했으나, 진법이 깔려 있었습니다.”

“아, 그래. 괴룡인가 하는 놈도 있었지.”

제갈가의 소가주.

들은 바론 행실이 불량한 병신이라 했는데, 그래도 한 수가 있는 듯했다.

“…뭐, 상관없지.”

양고혜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작당을 하던 이곳까지 와서 저를 마주한 순간 모두 쓰러질 것들.

“찾아온 걸 죽이면 되니까.”

“염마가 죽었다. 방심치 마라.”

“그 병신 놈도 못 이기면 육마 이름을 떼야지. 인육이나 처먹으면서 굴러다니는 게 어디 주먹이나 제대로 휘둘렀겠느냐?”

“기억한다. 색마, 너는 염마에게 패배했다. 처참하게.”

“그놈이 소교주일 적 일이지. 생각해보니 다행이구나. 소교주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놈이 다음 대의 교주가 되었을 것 아니냐.”

양고혜와 연리건의 대화가 쭈욱 오갔다.

연리건은 풀린 동공을 한 채 물끄럼 양고혜를 바라봤다.

양고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그리 보느냐?”

“생각 중이다.”

“무엇을?”

“….”

연리건은 가만 양고혜의 몸 곳곳을 훑었다.

겉면이 아닌 그 속 마기의 흐름을, 그녀가 낼 수 있는 힘의 총량과 마기로 보호할 수 있는 힘의 최대치를.

그리고 결론내렸다.

‘여전히.’

양고혜는 오강악보다 약하다.

그녀는 착각에 빠져 살고 있다.

“왜, 양물은 안 서도 음심은 동하느냐?”

“조금도.”

“병신같은 놈.”

연리건은 굳이 그것을 알리지 않았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