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십이장 임무, 조사 (5)
* * *
하오문주 서예.
여인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까지의 과정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아주 짧게 요약하면 그랬다.
이익을 위해 인간을 사료로 만들던 전대 문주의 그늘 아래서 자라, 그 문주에 대한 살심을 품은 것이 12세.
문주를 살해할 만한 고수, 살성 염소소를 찾고 의뢰를 맡긴 것이 14세.
그리고 비어있는 문주의 자리에 오른 것이 15세.
그로부터 10년, 서예는 그리 문주로서 하오문을 지켜왔다.
일반적이지는 않은 성장 과정은 서예가 언제나 타인의 마음을 읽는 법을 연구하게 만들었고, 또한 매사에 이해득실을 따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상황에 맞는 모습을 연기하도록 만들었다.
이번 일 역시 그간 보여온 가녀린 모습은 모두 연기.
그런 만큼 서예는 사람을 보며 지금과 같은 마음을 느낀 일이 없었다.
서예는 생애 처음 암만 뜯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주제를 알아라.”
‘주제?’
주제라….
서예는 멍하니 남궁진천의 표정을 살폈다.
알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인지, 그도 아니면 속내를 숨기기 위해 위장을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나.
무려 검룡 남궁진천이다.
백도 무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젊은 고수였고, 나서부터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스승들에게 무학을 비롯한 여러 학식을 쌓아왔을 것이 분명한 사내다.
그런 사내가 정결을 들먹이며 주제가 어쩌니 천박이 어쩌니 하는 것이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속내를 감추는 건가?’
어쩌면 저런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 자체가 철저한 계산 아래 이뤄진 것은 아닐까.
따지고 보면 그는 저리 고집을 부림으로써 유리한 상황을 가져가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닐 테다.
…라고, 서예는 비이성적인 행위에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 말이 있었다.
비이성에 그 어떤 이유를 붙여도 그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
이유를 찾으려 하면 할수록 생각만 복잡해질 뿐이라는 말.
옳았다.
남궁진천은 단순히 외간 남자에게 살을 보이는 서예가 마음에 안 드는 것뿐.
서예가 아무리 고민해봤자 그를 이성적이라 오해하고 있는 상황에선 진실에 다가설 수가 없었다.
“저, 저는 천박하지 않습니다!”
“맨살이나 보이는 게?”
“그, 그건…!”
좋아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이리 행동해서라도 속박을 풀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 진심을 말할 수는 없었다.
서예는 연기를 시작했다.
“…저, 저는 천박하지 않아요.”
고개를 숙였다.
숨을 끊어내고, 몸을 잘게 떨었다.
눈물을 눈꼬리에 달았다.
그리 수치심과 슬픔을 연기하자, 남궁진천은 코웃음을 쳤다.
“괴룡놈이 하던 말이 있다. 몸이나 파는 주제에 동정을 바라는 것들이 가장 위험한 부류라고. 내 이제까지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나, 네년을 보니 알겠군. 괴룡놈이 맞는 말을 했어.”
움찔.
서예의 어깨가 떨렸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었다.
“그냥 입을 다물어라. 더 무어라 수작을 부렸다간 다시 혈을 짚을 것이다.”
남궁진천은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정말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
서예는 생애 처음, 뒷골이 당긴다는 감상을 느꼈다.
*
단원들이 방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후.
서예는 그 한 시진 만에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더 입을 열어 남궁진천에게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었다.
‘모르겠어….’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남궁진천이란 인물 탓에 머리가 복잡해진 것이다.
한마디로 하면 그랬다.
서예는 비이성을 이성으로 바라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즉,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다.
“…검룡, 문주가 왜 저러는 것입니까?”
“모른다. 이년과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당화서가 물었고, 남궁진천이 당당히 답했다.
당화서는 왜인지 차오르는 한심함에 남궁진천을 못마땅하게 바라봤고, 서예 또한 그 표정을 확인했다.
서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뒤늦게 떠오른 가능성.
아니, 가능성으로조차 치부하지 못했던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남궁진천은 사실 머리가 나쁜 편인 건가.
생각이 없어서 이런 행동을 했던 건가.
자신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에서 이유를 찾고 있었던 건가.
귀주 골목에서 무력으로 부하를 찍어누른 것도, 이곳에 납치하고 이제까지 고압적으로 나온 것도 모두?
‘진짜?’
서예는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그는 당화서가 저리 한심하게 보는 중에도 기고만장해져 있을 뿐이었다.
“허….”
서예는 허탈함에 웃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
단원들은 갑작스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웃는 서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당장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게 바로 느껴질 정도.
자연히 함께 있었던 남궁진천에게 시선이 갔지만, 그는 그 어떤 답도 주지 않은 채 또 ‘심문’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화서는 곤란하다는 듯 표정을 구기다, 이내 서예에게 말했다.
“문주, 내 질문을 하고 싶은데.”
“하시지요. 예, 하셔야지요.”
서예는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말했다.
더 이상 이전까지의 가녀린 모습은 없었다.
그 모습은 그저 초췌했고, 허망했다.
“…하오문의 비처에 문도들이 있다고 들었소. 그 비처의 위치는 어디이며 문도들은 얼마나 잡혀있고 적의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그에 관한 걸 알고 있으시오?”
정보 수집의 연장이었다.
아직 서예를 완벽히 믿을 수 없는 만큼 그녀의 말에서 빈틈을 찾으려는 수의 일환.
서예는 그 말에 당화서를 바라보며 생각을 이었다.
‘그래, 이리 나오는 게 정상이지.’
호의를 가장한 채 옅은 경계를 드러내는 눈.
와중에도 몰린 신경.
의심의 반응이다.
보통 이게 맞단 말이다.
‘그런데….’
남궁진천은 대체 뭔가.
서예는 혼란에 휩싸였다.
또 입에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남궁진천은 계속 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리는 서예의 모습에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쳐다보지 마라. 계집. 더러운 게 옮는 기분이니까.”
인상까지 찌푸린 말.
서예는 공허하게 웃었다.
“어련하실까요.”
남궁진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더 그에게 휩쓸리려니 속이 다 뒤집어지는 기분이라 안 되겠다.
“…여쭈신 질문에 답을 드릴게요.”
서예는 표정과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적의 병력은 대략 백. 끌려간 문도 수는 천에 달합니다.”
서예의 말에 목리원이 입을 떡 벌렸다.
“처, 천…!”
“살아있을 걸로 예상되는 이들만 그 정도예요. 끌려간 이들을 다 합하면 세지도 못 할 거구요.”
보통은 문파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
하나, 하오문이기에 가능했다.
길거리의 왈패나 기녀, 점소이들로 위장한 채 온 사방에 퍼져있는 것이 바로 하오문이었으니.
“그들의 무공 수위는?”
“잘 몰라요.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어요.”
서예는 그리 말하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육마(??) 중 색마(色?). 그녀가 여기 있어요. 초절정의 마인이에요.”
단원들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서예는 그 반응을 하나씩 망막에 새기며 말을 이었다.
‘정보를 조금 더 풀자.’
신뢰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판단이었다.
“육마는 신강 너머 천마신교에서도 가장 지체 높은 여섯 가문 출신의 무인이에요. 대대로 당대의 천마는 그들 중 나오곤 했죠.”
“가문이라면….”
“백도로 치면 오대세가 같은 거죠. 그들은 그 가문을 마도육문(???門)이라고 불러요.”
육마, 그리고 마도육문.
단원들은 그 말에 한 사내를 떠올렸다.
서예는 그들의 표정 변화를 살피다 답했다.
“네, 여러분께서 상대한 염마(??) 오강악도 그 여섯 중 하나죠. 이게 제가 여러분께 도움을 청한 이유구요.”
“누님, 이건….”
제갈산의 표정이 구겨졌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곳은 지난번처럼 여차하면 주변에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백도의 땅이 아니었고, 적의 수도 저번보다 배는 많았다.
거기에 인질이라고 잡혀있는 것들의 수를 생각하면 여차하면 발목이 잡힐 터였다.
함부로 나서봐야 좋을 것이 없는 상황.
애초에 임무의 목적은 조사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밝힌 만큼 돌아가 지원요청을 하는 방안도 존재했다.
그리 판단한 제갈산이 말을 흘리자, 다른 단원들이 긍정의 뜻을 보였다.
서예는 그 분위기를 읽었다.
‘예상했어.’
애초에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흑도와 백도, 그것을 넘어서 열 배 이상이 차이 나는 전력.
서예는 그런 것조차 고려하지 않고 도움을 구한 게 아니었다.
“당연 방법은 있어요.”
“음?”
“저들이 있는 곳은 하오문의 비처. 제가 살던 곳이에요.”
서예는 당화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까지 몰래 숨어 들어가는 길은 모두 알아요. 그냥 들어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동 경로까지 모두요. 그것 말고도 제가 그곳에 도달하기만 하면 아직 사용하지 않은 함정과 진법을 사용하는 게 가능해져요.”
음지 중에서도 음지에 있는 것이 하오문의 비처다.
워낙 순식간에 침공당해 바로 대비해지 못했지만, 다시 돌아가기만 한다면 적들을 교란하는 것은 가능했다.
전력 차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도와드린다면 당연히 보상을 드릴 겁니다.”
서예는 당근을 흔들었다.
“영약. 제가 아니면 열 수 없는 비밀 금고에 100년 하수오가 일곱뿌리 있습니다. 모두 드릴게요.”
남궁진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눈은 흥미롭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서예는 그 반응에 울컥 화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참았다.
“…저는 한시가 급합니다. 부탁드려요.”
이들이 이대로 돌아가 무림맹 측에 보고한다면 더 확실한 승리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무림맹에 명분을 줘버려.’
하오문이 무림맹에 빚을 지게 된다.
이곳은 흑도의 땅 귀주.
분명 그 이야기가 흑사련주의 귀에 들어갈 테고, 그것은 하오문 전체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대로 이들에게만 의뢰를 맡기면 100년 하수오 일곱 뿌리로 은원관계를 청산할 수 있다.
지금 서예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일을 끝맺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당화서는 서예의 뜻을 헤아리려는 듯 가만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문주께선 맹에 명분을 쥐여주기 싫은 게로군.”
“흑도니까요.”
“100년 하수오 일곱 뿌리로 은원관계를 청산하자는 말일 테고.”
“나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서예로서도 숨기지 않은 의도.
당화서로서도 쉬이 눈치챌 수 있는 의도.
서예는 거래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것에 당화서는 미간을 좁혔다.
‘100년 하수오 일곱 뿌리라….’
이 일에 그 정도 가치가 있는가.
하오문주가 자신들을 유인하려는 속셈은 아닐까.
마냥 의미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그들과의 마찰이 있는 것은 맞는 듯했으나, 자신들을 내어주는 것으로 하오문의 문도들을 돌려받는다는 약속을 한 것일 수도 있단 말이다.
당화서의 속에 깊은 고민이 떠올랐다.
‘바로 답해선 안 된다.’
앞서 보였던 가녀린 모습은 더 보이고 있지 않았다.
아마 그게 통하지 않음을 직감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이어지던 중.
“수락하지.”
영약에 미친 남궁진천이 답했다.
당화서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고, 생각보다 먼저 몸을 움직여 남궁진천의 정수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빡!
서예가 한심하다는 듯 남궁진천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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