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막간 번뇌퇴산 (1)
* * *
비무가 있던 다음 날.
용봉단의 전각 단주실은 소란스러운 분위에 휩싸여 있었다.
이유는 즉슨 영약.
본디 수여 받았던 두 개의 영약에 더불어 비무에서 얻은 네 개의 영약이 더해지니, 딱 인원수만큼 영약이 배정된 상황이다.
이에 단원들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당화서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화서 또한 한 팔엔 부목을 댄 채로 싱긋 웃고 있었다.
“자, 기회가 되어서 이리 영약이 사람 수만큼 모였습니다. 미리 들으셨다시피, 소환단과 자소단은 각각 목 소협과 검룡에게로 갈 것입니다. 이견 있습니까?”
없었다.
단원들 또한 그 임무에서 두 사람이 한 일이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으니.
깔리는 침묵으로 그들의 답을 들은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소환단과 자소단의 배분입니다. 두분 모두 원하는 영약이 있으십니까?”
목리원은 고민했다.
‘흐음… 소환단은 이미 먹었는데.’
용봉지회의 우승 보상으로 소환단을 먹었다.
같은 영약을 반복해서 복용하는 것은 효율이 떨어지는 일인 만큼 목리원이 노리는 것은 자소단.
그의 시선이 남궁진천을 향했다.
남궁진천은 목리원을 흘긋 보다, 이내 그리 답했다.
“소환단은 내가 갖지. 지난 용봉지회의 우승을 놓쳐서 마침 필요했던 참이다.”
목리원의 표정이 밝아졌다.
남궁진천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널 위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소환단이 자소단보다 내공의 함유량이 많아 고른 것이니.”
“그래도 고맙소! 검룡혀….”
“하지마라.”
남궁진천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목리원은 그것마저도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생각에 ‘하하!’웃음을 터뜨렸고, 일운은 남궁진천이 제 본적인 소림의 영약을 높게 치는 것에 흐뭇해하고 있었다.
당화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 꼴을 보다, 이내 멀쩡한 손으로 책상을 ‘탁!’치며 말했다.
“그럼 영약의 배분은 이리 끝내고 해산하도록 합시다. 다들 챙겨 가십시오.”
책상 위에는 4개의 똑 닮은 함과, 두 개의 서로 다른 함이 있었다.
단원들은 제 몫의 함을 챙겨 단주실을 나섰고 이제 남은 것은 당화서와 목리원.
목리원은 업무에 들어가려는 듯 팔 하나로 붓을 드는 당화서를 보다, 그리 물었다.
“소저, 불편하지 않소?”
“음? 불편하기야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자초한 것을.”
“으음…!”
목리원의 표정이 조금 불편해졌다.
시선은 당화서의 손에 콕 박혀 있었다.
‘소저는 손도 참 곱… 아니! 이게 아니지!’
목리원은 고개를 도리질치며 생각을 털어내다 이내 당화서에게 말했다.
“소저! 내가 돕겠소!”
“예?”
“소저는 하는 일도 많은데 팔 하나로 해결하려면 평소보다 불편함이 많지 않겠소? 그러니까 내가 돕겠다는 말이오!”
목리원이 제 가슴을 쿵쿵 쳤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에 당화서는 왜인지 모를 감동이 차올라 웃었다.
하나 내뱉는 답은 거절이었다.
“되었습니다. 목 소협은 이런 행정 절차에 눈이 어둡지 않습니까.”
“그, 그래도 잔심부름 정도는 할 수 있소! 하게 해주시오! 나는 소저가 혼자 고생하는 게 싫소!”
그 일을 돕는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까.
당화서는 그런 의문이 떠오르는 와중에도 저 반짝거리는 눈을 보니 거절의 말이 힘들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뭐든지 하겠소!”
뭐든지.
그 말에 어깨는 흠칫 떨리고 있었다.
순간 뻗어나가는 음험한 상상.
당화서는 빠르게 그것을 거두며 헛기침을 했다.
“큼, 크흠….”
“응? 내가 하게 해주시오! 내 잡일이라면 산속에 살 적부터 스승님이 감탄하실 정도로 잘했던 사람이오!”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당화서의 사고는 이미 자기합리화에 들어가고 있었다.
슬쩍 뜨인 눈이 목리원을 향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얼굴.
지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 기겁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그래도 잡일 정도라면야….’
목리원이 할 게 많을 것이다.
사실 글을 쓰는 일 정도야 앉아서 한 손으로도 할 수 있지만 다른 것 말이다.
갑자기 어깨가 결리면 어떻겠는가.붓을 놓고 어깨를 두드리면 속도가 떨어지니 힘들 터다.
또 식사 땐 어떻겠는가. 찬을 집는 일이 힘들지도 몰랐다.
그것 외에도 짐을 들 일이 있을 테고, 머리를 손질하는 일이 있을 테고….
‘오,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면….’
당화서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한껏 붉어진 얼굴 위로 눈은 부릅 뜨여있었고, 입은 꾹 다물린 채 입꼬리가 삐죽삐죽 솟고 있었다.
짧게 인 침묵.
그 끝에서 나오는 말은 그랬다.
“…그, 그럼 신세 좀 져도 되겠습니까?”
당화서는 욕망에 져버렸다.
목리원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알겠소! 그럼 뭐부터 하면 되겠소?!”
“일단 아, 안마부터… 어깨가 조금 결리는지라…!”
“맡겨만 주시오!”
목리원이 헐레벌떡 당화서의 뒤로 돌아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흐읏…!”
당화서는 문득 팔을 부러뜨려준 내각의 무인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
당화서는 근래 들어서 가장 행복했다.
사실 비무로 얻은 영약 따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마저 들고 있었다.
“소저! 내 주전부리를 조금 들고 왔소!”
복도 끝에서부터 품에 간식거리를 안고 달려오는 목리원이 보였다.
그것에 흐뭇하게 웃고 있자, 목리원이 그녀의 앞에서 멈춰 서곤 품에 안고 있던 걸 들이밀며 말했다.
“보시오! 감자요!”
푹 쪄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감자였다.
목리원은 그걸 하나 들어 살살 껍질을 까기 시작하더니, 이내 당화서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자! 아~ 해보시오!”
이렇게 남사스럽고 고마울 때가.
당화서는 속으로 감탄하며 작게 입을 벌렸다.
감자를 한입 베어 물자 목리원이 해사하게 웃었다.
“어떻소? 맛있지 않소?”
“…예, 짭쪼름하고 맛있군요.”
“숙수께서 무슨 과정을 거쳐 찐 감자라 하오! 내 이제까지 먹던 감자와는 맛이 달라 소저에게 먼저 먹여주고 싶었소!”
심장에 해로웠다.
당화서는 헤실헤실 웃으며 조잘대는 목리원의 모습에 내면 깊숙이 처박아두었던 음험함이 한껏 발버둥 치는 것을 느꼈다.
하나 그리해선 안 될 일.
‘천천… 아니, 참아야지!’
당화서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녀는 목리원에게 혜운같은 방탕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요.”
언제나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목리원에게 비치고 싶었다.
그뿐이겠는가. 당화서에게도 낭만이라는 것이 있었다.
무릇 남녀 사이의 관계라 하면 하나하나 절차를 밟아가며 가까워지는 것에 묘미가 있지 않겠는가.
냅다 덮쳐버리는 일은 그 당시에야 좋을 수 있겠지만 과정에서의 기쁨을 잃는 만큼 불씨도 빨리 꺼질 것이고, 벅차오름도 적을 것이다.
당화서는 그런 생각이나 하며 집무실에 앉았다.
당화서가 앉은 자리 옆엔 목리원을 위한 작은 의자가 있었다.
목리원은 그곳에 앉아 감자를 먹으며 당화서의 업무를 지켜봤다.
봐도 무슨 말인지도 모를 서류의 연속.
목리원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당화서의 옆얼굴을 흘긋흘긋 바라봤다.
당화서는 따가울 정도로 박히는 시선에 뺨을 붉혔다.
“…그리 보면 민망합니다.”
“아! 미안하오!”
목리원이 홱 하고 고개를 돌린 채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도 뒤늦은 민망함을 떠올린 것이다.
당화서는 붉어진 목리원의 뺨에 왜인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서류가 산처럼 쌓여있었으나, 목리원이 곁에 있으니 집중되지 않았다.
혹시 목리원은 도움이 아니라 방해를 하러 온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 않나.
어떻게 사람이 생긴 것만으로도 이리 정신을 헤집는단 말인가.
그것만 문제라면 말도 안 했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앙증맞아 괜히 웃음이 삐져나오니 그 순진함을 제 손으로 더럽히고 싶다는….
‘…진정하거라!’
당화서는 ‘또’ 스스로를 다그쳤다.
눈을 질끈 감으며 손에 힘을 더했다.
뽀각!
붓이 부러졌다.
“아! 소저! 손은 괜찮으시오?”
목리원이 화들짝 놀라 당화서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쓰다듬듯 제 손을 살피는 목리원의 모습에 당화서는 되뇌었다.
‘번뇌퇴산! 번뇌퇴산! 번뇌퇴산!’
번뇌퇴산.
번뇌야 물럿거라!
심호흡까지 끝낸 후에 조금은 진정된 속.
당화서는 그제야 애써 웃으며 말했다.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니니 걱정일랑 마시지요.”
“참으로 다행이오…!”
그렇습니다.
번뇌를 물리쳐 참으로 다행입니다.
당화서는 차마 전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읊다 이내 조심스레 손을 빼냈다.
“그… 새 붓을 가져와 주시겠습니까?”
“알겠소!”
목리원이 집무실을 달려 나갔다.
당화서는 그제야 몸에 긴장을 푼 채 ‘후우!’숨을 뱉으며 손부채질을 했다.
‘이리 요망할 수가!’
아주 불여우도 이런 불여우가 없다고.
당화서는 목리원이 자각도 없이 하는 행동들에 심장이 벌렁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
목리원은 새 붓을 가져와 이번엔 얌전히 당화서의 뒤에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옆에 있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니 뒤에 있어 달라는 부탁 탓이었다.
목리원의 얼굴은 결연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당화서가 혹 불편한 티를 낸다면 바로 달려가리라는 의지의 표명.
그러나 당화서는 굳건했다.
번뇌퇴산을 마친 그녀는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에 점차 목리원의 얼굴 위로 지루함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목리원이 ‘그걸’ 발견한 것은 직후였다.
‘음?’
목리원의 시선이 당화서의 머리칼을 향했다.
허리에 올 정도로 길게 기른 머리가 비단처럼 부드럽게 떨어져 내려 그녀의 등을 덮고 있었다.
목리원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 한가운데.
“소저.”
“예?”
“머리칼이 엉켜 있소. 내가 풀어도 되오?”
흠칫
당화서의 어깨가 들썩였다.
목리원이 보지 못하는 전방에서 당화서의 눈이 미친 듯이 사방으로 굴렀다.
얼굴은 새빨갛다.
또한 입꼬리는 말썽을 부리며 저 혼자 뺨을 등산 중이다.
왔다.
당화서가 순간 떠올린 생각이었다.
“소저?”
“부, 부탁드리지요.”
말하는 중에도 당화서는 목리원을 돌아보지 않았다.
손으론 책상 위에 대충 던져둔 빗을 집어 등 뒤로 내민 상태.
목리원이 빗을 집어들었다.
“내 열심히 해보겠소!”
그리 말한 목리원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집중한 얼굴을 만들었다.
이어 빗질을 시작했다.
스윽
빗이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집무실의 정적을 일깨웠다.
엉킨 머리가 투둑투둑 풀리며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목리원은 그리 당화서의 머리를 빗기던 중 가까이서 보니 더 눈에 들어오는 엉킨 부분들에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팔이 불편하여 빗질을 제대로 못했나보구려! 기다려 보시오! 내 확실히 다 빗겨보겠소!”
스윽
또 목리원이 당화서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머리칼의 촉감이 참으로 부드럽고, 언제나 그녀의 근처로 가면 풍겨오던 달짝지근한 체향이 더 짙어지는 것에 목리원은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정적과 분위기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언제나 재잘대던 목리원은 깨달음을 얻으며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물론,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목리원‘만’이었다.
‘으으…!’
당화서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숨까지 참고 있었다.
손은 옛저녁에 멈춰 일은 중단된 상황이었고, 심장은 누가 북으로라도 쓰고 있는 것인지 전신이 다 울릴 정도로 크게 뛰고 있었다.
목리원의 손길에 따라 머리칼이 들리는 느낌도, 이어지는 빗질도, 집중하니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도.
모든 것이 왜인지 머리가 쓰다듬어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했다.
‘버, 번뇌…!’
퇴산은 개뿔이.
당화서는 차오르는 두근거림에 결국 참는 것을 포기하고 입꼬리를 히죽 올려버리고 말았다.
약 이각.
짧지도 길지도 않은 극락을 당화서는 한껏 만끽해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