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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살검협-88화 (88/334)

〈 88화 〉 십일장 ­ 내기, 경쟁 (3)

* * *

둥! 둥! 둥!

북소리와 함께 심판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비무의 심판은 청룡대주 기태운.

“비무를 시작하겠소!”

그의 목소리엔 짐짓 엄한 기색이 자리해 있었다.

한 치의 헛짓거리도 허하지 않겠다는 듯한 뜻을 그대로 보이는 형태였다.

제갈산은 그 모습에 ‘허허’ 웃으며 일어났다.

“…다녀오겠소.”

“제갈형! 힘내시오! 내 열심히 응원하고 있겠소!”

목리원이 한껏 흥분해 외쳤지만 그다지 힘은 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 옆에 있는 당화서의 눈초리가 너무 따가웠던 까닭이다.

‘지면 그날이 내 제삿날이겠구나.’

제갈산은 눈빛으로 사람을 협박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깨달았다.

당화서의 부릅 뜨인 눈은 그다지도 험악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이었다.

‘내가 목아우도 아니고 어떻게….’

열을 상대하나.

물론 싸우라면 싸우지 못할 것도 없지만 원체 나서는 일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몰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와중이었다.

‘으음….’

제갈산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진원단 소속 무인 열을 바라봤다.

‘…일류 하나에 이류 아홉.’

버리는 패구나.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는 걸 반가워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생각보다 쉬울 비무에 안심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나 이어가던 중.

“양측 위치로!”

기태운이 외쳤다.

척!

진원단의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자리를 잡았다.

맹의 합격진이었다.

제갈산의 족제비 같은 눈이 조금 가라앉아 더 실눈이 되었다.

마음이 가라앉으며 떠오른 표정이었다.

‘진이라….’

암만 그래도 제갈가의 소가주인데 진으로 상대하려는 것은 무슨 속셈일까.

전략이라기엔 무인들의 기색에 긴장이 역력하다.

또한 진중함이 묻어 있었다.

제갈산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 정도로 무시 받으면 나라도 기분이 나쁜데.’

잘그락.

제갈산이 품에서 옥돌을 꺼냈다.

“개시!”

기태운의 외침.

그와 동시에 무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검수들이 가장 앞 열, 그 뒤로 창수들이 있었다.

5개의 검과 5개의 창이 제갈산을 원형으로 포위하며 짓쳐들었다.

원형방진(????).

맹의 하급 무사들도 알 정도로 유명한 진이었고, 그 정도로 간단하며 효과는 확실한 진이었다.

그리고, 제갈산에겐 그 파훼법이 너무 쉽게 보이는 진이었다.

툭.

제갈산이 옥돌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하자 이변이 일었다.

“흡…!”

검수들의 검로가 흔들린다.

순간적으로 시야와 인지가 어그러지며 인 현상이었고, 그들의 움직임이 뒤틀림에 따라 창수들의 창도 엇나가기 시작했다.

원의 중심을 빈틈없이 찔러야 할 원형방진.

그것이 어그러져 원의 중심만을 찌르지 않는 진이 되었다.

쿵!

검과 창이 얽힌 한가운데, 제갈산이 처음 그 자세로 선 채 턱을 쓸었다.

“진은 너무 하셨소. 내가 그래도 제갈이오.”

제갈산이 발끝으로 제 앞에 있는 검 하나를 밀었다.

그리하며 단전의 내공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용(?)이오.”

탁!

발을 디디자 제갈산의 신형이 흐려졌다.

보법 중에서도 그 신묘함으로는 으뜸으로 꼽히는 제갈세가의 비전.

딛는 걸음걸음이 진법으로 화하는 수법.

천기미리보(?????)였다.

“무스….”

무인 중 하나가 놀라 말을 흘리던 중, 어느새 그의 앞으로 나타난 제갈산이 손바닥으로 그의 턱을 올려쳤다.

빠악!

“…끅!”

머리가 뒤흔들리는 충격에 무인이 쓰러진다.

그것에 다른 무인들이 놀랄 틈도 없었다.

제갈산은 희끗희끗한 신기루만 남기며 하나 둘 무인들을 쓰러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법을 사용하고 딱 10수.

“허어… 그래도 용이라는 것이군.”

누군가의 중얼거림대로, 제갈산은 열 명이 되는 무인을 일 수에 하나씩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괴룡! 승!”

“우오오오!”

기태운의 판정과 동시에 목리원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제갈산은 목리원의 환호성에 엄지를 척 치켜드는 것으로 화답을 해냈고, 그리하며 당화서를 바라봤다.

‘휴….’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안도.

다행히 당화서가 흡족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갈산은 오늘도 무사히 장을 지켜냈다.

*

강찬은 ‘오!’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도 진왕의 아들이란 것인가! 한 수는 있군!”

“저 정도로 끝은 아닐 걸세.”

권표월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강찬이 고개를 갸웃하자, 권표월은 웃는 상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내 직접 상대해보지 않았나.”

일전에 있었던 친선 비무.

그날 권표월은 목리원을 시작으로 용봉단의 무인 여섯을 모두 상대한 일이 있었다.

당연 가장 탁월했던 것은 목리원과 남궁진천이었다.

하나, 그 다음으로 탁월한 이를 꼽자면 권표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갈산을 꼽을 것이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력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강호인으로선 훌륭한 자세이나, 제갈산은 다만 그리 치부하기엔 결벽적인 면모가 있었다.

비장의 한 수를 숨기는 정도의 느낌이 아니라, 들켜선 안 되는 수를 숨기고 있는 느낌이란 말이었다.

‘사정이야 있겠지만 걱정되는군.’

권표월은 혈사가 있던 날부터 쭉 이 중원 강호를 살아온 사내였다.

그러니 아는 것이다.

보통 저렇게까지 제 실력을 숨기는 이들은 그 비수가 향하는 곳이 명확히 정해져 있음을.

“자네는 또 혼자만 아는 소리를 하는 구먼! 나도 알려 주시게!”

“미안하네. 말하면 실례가 될 듯하여.”

권표월은 강찬의 투정을 그리 흘려넘기곤 비무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저기 권룡이 올라오는군. 집중하지.”

“에잉….”

강찬은 입맛을 다시다 비무장 위를 올려다 봤다.

마침 올라오는 것은 권룡 일운.

상대는 일류 다섯에 이류 다섯이었다.

아직까지 내각의 용병은 올라오지 않은 상황.

볼 게 뭐가 있겠는가.

권룡 일운의 압승이었다.

심지어 내공이라곤 단 한 톨도 쓰지 않고 외공만으로 일군 승리.

“이래서 소림소림 하는구먼.”

태산북두의 후기지수는 강했다.

*

“수고하셨소!”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혜운은 지그시 웃으며 고개 숙이는 일운을 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 차례죠?”

혜운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당장 수련 진도가 영약이 급한 때도 아닐뿐더러, 이런 다대일 비무는 정신적인 피로가 심하여 꺼려지는 까닭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안 나갈 수는 없는 일.

‘대충 빨리 끝내고 나가야지.’

용병은 후반 3조에 배치될 것이 확정적인 상황이다.

상대할 것이라고 해봐야 이류에서 일류 사이의 무인이니, 혜운의 입장에선 어서 이 일을 끝마치고 외출이라도 하고 싶었다.

당화서의 성난 기색을 보니 깔끔하게 승리만 한다면 외박도 허락해줄지도 몰랐다.

떠오른 생각에 따라 혜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얼레?’

비무장 위로 올라온 혜운의 시선이 무인 중 한 사람을 향했다.

이류의 젊은 무인이었다.

나이는 목리원과 비슷한 정도일까.

하나 키는 다른 무인들보다 한뼘은 작았고, 얼굴은 곱상한 것이 꼭 소녀 같이도 보였다.

뽀얀 피부와 여리여리한 외모.

이것은 혜운이 썩 즐기는 취향 중 하나였다.

혜운의 혀가 입술을 핥았다.

‘이건….’

얘기가 달라지는데.

“양측 위치로!”

기태운의 외침에 혜운이 자리로 향했다.

순간 젊은 무인과 혜운의 눈이 맞았다.

혜운이 눈웃음을 짓자, 그 무인이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귀여워라.’

계획 변경이었다.

굳이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개시!”

기태운의 외침과 동시에 시작된 비무.

챙!

혜운은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온 무인의 검을 보지도 않고 막았다.

시선은 여전히 청년에게 박혀있었다.

와중 혜운의 시야를 가로막고 나온 다른 무인이 검을 휘둘렀다.

혜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검을 튕겨냈다.

챙!

“좀 비켜봐요. 안 보이잖아.”

압살.

그리 표현해야 할 것이다.

혜운은 힘들다며 평소엔 잘 쓰지도 않던 강검을 휘두르며 청년을 제외한 다른 무인들을 차례차례 바닥에 눕혀 버렸다.

“악!”

“끄억!”

“읏!”

검에 실린 내공에 무인들이 꺽꺽대며 무릎을 꿇는다.

그렇게 아홉이 모두 사라진 직후.

“어머, 소협만 남으셨네요?”

청년, 진원단의 막내 소오와 혜운 둘만이 비무대에 남았다.

소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혜운이 싱긋 웃었다.

“잘 부탁드려요?”

혜운의 신형이 일순 사라졌다.

그것에 화들짝 놀란 소오가 ‘으악!’ 소리를 내며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렀고.

챙!

그것이 혜운의 검과 부딪쳤다.

하나, 이후의 일은 이제까지와 양상이 달랐다.

“아앗…!”

혜운이 눈을 질끈 감으며 휘청였다.

꼴에 가련한 척이라도 하겠다는 듯 검을 쥐지 않은 주먹이 뺨 쪽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다.

속된 말로 작업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내, 내공이 웅혼하시군요….”

혜운이 그리 말하며 소오를 띄워줬다.

소오로선 고개를 갸웃할 일이다.

그렇지 않나. 이제까지 선배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쓸어 담던 여인이 갑작스레 저러니 어리둥절한 마음이 샘솟지 않겠나.

하나, 혜운의 속셈을 알기에 소오는 너무 어렸다.

혜운은 목리원과 동갑으로 판단했지만 소오는 그것보다 더 어린 16세.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였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검만 수련한 탓에 여인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알지 못하는 순수한 영혼이었다.

그러니 생각하고만 것이다.

‘서, 설마…!’

선배들이 백봉의 힘을 다 빼놓은 것인가!

지금 백봉은 전보다 훨씬 무력해진 상태가 아닐까!

라고.

‘선배님들!’

소오는 결의에 찬 얼굴로 바닥에 엎어진 선배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흐아아압!”

소오의 기합에 힘이 들어갔다.

내달리는 걸음 또한 기백이 넘쳤다.

눈빛은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혜운은 히죽 웃었다.

“꺄악!”

챙!

혜운의 검이 소름 끼칠 정도로 정교한 움직임으로 소오의 검과 맞부딪쳤다.

그 속에 깃든 힘 또한 똑같았으니, 이어지는 양상은 대등했다.

검과 검이 연신 맞붙었다 떨어지고, 소오의 기합과 혜운의 비명이 비무장 위에 뒤섞였다.

그러면서도 혜운은 중간중간 눈빛을 나누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격렬한 움직임에 의도치 않게 부딪친 척 몸을 들이밀기도 했고, 실수인 척 소오의 목덜미를 손으로 쓸거나 비음을 흘리기도 하며 검초를 이어갔다.

효과는 확실했다.

소오의 얼굴은 어느새 조금씩 붉어지더니 이제와 홍당무와 같은 색이 되어 있었다.

“허억… 허억…!”

어리둥절한 얼굴로 쭈뼛쭈뼛 소오가 발을 물린다.

그것에 비무장 아래 관객석이 침묵했다.

와중 목리원이 당화서에게 물었다.

“소, 소저….”

“목 소협. 눈 감으십시오.”

“으, 응?”

“감으라고.”

저런 거 보지 마.

그런 의미로 당화서가 눈을 부릅뜨자, 목리원은 흠칫 놀라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이러면 되었소?”

“되었습니다.”

당화서는 핏발 선 눈으로 혜운을 바라봤다.

꺄악꺄악 하며 까마귀 소리나 내는 것이 아주 신나 죽겠다는 꼴.

‘면담이 필요하겠구나.’

아주 긴 면담이.

채앵!

와중 마지막 검초가 오갔다.

소오의 검은 언뜻 보기 간발의 차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안타깝게 혜운에게 닿지 못했다.

“좋은 승부였어요. 소협.”

혜운이 손을 내밀어 쓰러진 소오를 부축했다.

소오의 몸이 쩌적 굳었다.

헤운은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참아내며 일어선 소오에게 속삭였다.

“소협?”

“예, 예?!”

“좋은 비무였어요. 소협만 괜찮으시다면 이후에 따로 무학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싶은데….”

소오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실례가 될까요?”

애틋한 혜운의 목소리에 소오의 고개가 크게 저어졌다.

“저, 전혀 아니오!”

“어머, 감사드려요!”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그에 따라 소오는 왜인지 모를 두근거림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이냐…!’

16세 소년 진원단 막내 소오.

그는 걸려선 안 될 덫에 걸리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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