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십일장 내기, 경쟁 (2)
* * *
견동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그의 목 뒤로는 마른침이 꿀꺽꿀꺽 넘어가고 있었다.
그게 당화서의 눈에도 보였다.
순간 견동이 내뱉는 말은 그랬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용봉단주! 지금 그 말이 영약을 강탈해가겠다는 것이랑 뭐가 다르….”
“다르지요. 정당한 비무가 아닙니까.”
당화서는 싱긋 웃으며 말하자 견동의 말문이 턱 막혔다.
어이가 없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부, 분위기가….’
회장의 분위기가 사뭇 날카로워져 있었다.
견동은 그제야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정치질에 능하고 뒷배가 든든한 견동이라 하나 피해갈 수 없는 사실.
무림맹은 무인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즉, 그 집단에서 무력이 아닌 정치로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하는 태도는 곱지 않을 것이 분명한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단주와 대주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더욱이 그랬다.
‘당했다!’
그런 생각이나 하던 중, 당화서가 말했다.
“아, 물론 무력의 차이가 있는 만큼 일반적인 비무로 가진 않을 겁니다. 제게도 그 정도 양심은 있지요. 비무는 10대 1. 저희 쪽은 명당 진원단 열을 한 번에 상대하겠습니다. 또한 기를 발출하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면 얼추 맞지 않습니까?”
공격적이고 노골적인 무시의 말이었으나 그럼에도 기세를 가져가는 말이었다.
또한 합리적인 말이었다.
애초에 당화서에게도 명분이 있는 상황.
제시한 것은 무인다운 해결책이었고, 그 와중에 우위를 직접 내다 버리는 말까지 하고 있으니 빠져나갈 구석이 있을 리가.
‘여우 같은…!’
호방한 척 말을 함에도 그 속에 깃든 것은 여우의 간사함이었다.
완벽한 덫.
그것을 깨달은 견동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던 중.
“찬성이오.”
금검 권표월이 슬며시 손을 들며 말했다.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오. 이리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맹 전체를 위해서도 이롭지 않겠소?”
이곳에 권표월이 용봉단과 친밀함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나 그런 문제를 뒷전으로 두고 보자면 그랬다.
반대표를 던지는 것은 악수였다.
금검 권표월은 맹의 다음 내각 선별 인원 중에서도 압도적인 지지율을 가진 사내다.
즉, 차기 내각주에 가장 가까운 사내다.
용봉단주인 독봉 당화서는 다음 세대를 이끌 자리에 오를 것이 분명한 여인이다.
그들의 눈 밖에 나 봐야 좋을 일은 없다.
진원단주 견동의 뒤에 현 내각주가 있긴 하지만, 그의 임기는 8년이 채 남지 않았다.
“나 또한 찬성하오.”
금검과 내각주 자리를 두고 다투던 청룡대주가 가장 먼저 의사를 표했다.
‘금검과 사이가 틀어져 봐야 좋을 것 없다.’
누가 내각주에 오르던 앞으로 계속 부딪칠 사내.
악감정은 줄여두는 게 좋다는 판단이었다.
다음으로 찬성표를 던진 것은 의약대주와 적운대주.
의약대주는 당화서와의 친분을 원했고, 적운대주는 견동의 간사한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굵직한 대주들이 비무에 찬성표를 던지니 이어지는 일은 뻔했다.
찬성 8할.
압도적인 표결로 비무 성사가 목전에 드리워졌다.
견동의 몸은 부르르 떨렸다.
염소수염 또한 파르르 떨렸다.
‘비무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필패다.
진원단에서 제일가는 고수는 부단주인 조량.
그조차도 아직 일류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기를 발출하지 않는다고 해도 절정과 일류 사이의 기량 차이는 압도적.
‘그렇다면…!’
이왕 추해진 거, 조금은 더 추해지더라도 실리를 챙겨야 했다.
“좋소! 다만 한가지, 용병을 기용할 수 있게 해주시오.”
“허….”
당화서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친선 비무의 용병 기용.
이 또한 관례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현 맹의 정책은 경쟁과 화합.
파벌을 장려하는 쪽인 까닭이다.
‘발악을 하는구나.’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기용 가능한 용병은 총 셋.
이쪽의 여섯 중 셋이 그들을 하나씩 상대할 것이고, 거기서 1승만 챙겨와도 비무는 승리로 끝난다.
“좋습니다.”
“배려에 감사하오.”
견동의 목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당화서는 그간 참아온 것을 다 풀어내겠다는 듯 견동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신난 것은 다른 단주와 대주들이었다.
그들에겐 간만의 구경거리가 생긴 것이었으니.
‘묵룡과 검룡의 검이 그리 기가 막히다던데…. 마침 견식 할 기회가 생겼군.’
대주 중에서도 가장 비무를 좋아하는 적운대주.
그가 특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
“내기 비무!”
돌아온 용봉단의 전각.
당화서의 선포에 목리원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너무 좋소!”
양 주먹은 꽉 쥐어진 채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냥 비무도 아닌 다대일.
그것도 기를 발출하지 않고 순수한 검술만을 이용한 비무.
마침 시기도 좋았다.
한창 합격을 수련하느라 다수의 공세에도 눈이 트인 상태고, 더불어 깨달음도 초절정의 목전에 둔 상태.
모자란 경험치 중 일부를 보충하기에 딱 좋은 자리가 아니던가.
‘그뿐만 아니다!’
영약이라니!
딱 4개라니!
이번 임무에서 함께 고생하고도 보상받지 못한 다른 단원들의 수와 딱 맞는 개수가 아니던가!
“역시 소저는 대단하오!”
소저는 다 생각이 있구나!
목리원이 경외를 담아 눈빛을 쏘아내자, 당화서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제갈산은 ‘얼씨구?’하는 얼굴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쪽 용병은 누가 한답디까?”
“아직 모른다. 하나 절정 이상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거참… 그럼 그 용병 중 하나는 내가 맡겠소. 수를 줄이는 게 좋지 않겠….”
“아니.”
당화서의 눈빛은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분노가 깔린 형상.
그것에 제갈산은 ‘히끅’ 딸꾹질했다.
“그, 그럼…?”
“용병은 나와 목 소협, 검룡이 맡는다.”
모르는 사람이 지금 당화서의 모습을 본다면 정파 무림맹의 단주가 아닌 흑도의 고수로 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화서의 미소는 난폭한 기색을 품고 있었다.
“단 1승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제갈산의 몸이 바짝 굳었다.
아니, 모든 단원들이 바짝 굳었다.
그 남궁진천조차도.
“대답.”
당화서의 서슬 퍼런 기색에, 단원들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무림맹의 내각은 정파 무림의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맹주전을 중심으로 총 3개의 전각으로 나눠진 전각을 관리하며, 그런 위치를 가진 만큼 전각에는 무림맹의 핵심 인력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내각주의 자리는 이른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말 그대로 권력을 끄트머리에 있는 자리였다.
“아주 잘하는 짓이구나.”
내각주 해파검(???) 견궐.
주름살이 내려앉았음에도 삐죽 솟아오른 눈꼬리와 갈색의 피부가 인상적인 마른 체격의 노인.
그는 집무실의 상석에 앉은 채 제 앞에 무릎 꿇은 견동을 바라봤다.
말해 무어 할까.
진원단주 견동은 내각주 견궐의 손자였다.
“그래, 용봉단에 시비를 걸어 비무를 하게 됐다고?”
“그, 그렇습니다….”
견궐을 ‘쯧’하고 혀를 찼다.
‘좋지 않구나.’
견동에게 용봉단의 견제를 명령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틀어질 줄은 몰랐다.
치명적인 실책이라 할 상황.
‘멍청한 것.’
보나마나 이 멍청한 손자놈이 또 주제 모르고 나불대다 선을 넘어버린 것이겠지.
“내 큰일을 맡긴 것도 아닌데 그것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것이냐?”
고작 견제였다.
구파와 세가가 맹에서의 입지를 늘리는 것을 막고자 딱 견제하는 역할 하나만을 맡겼다.
한데 그것조차 제대로 못 해 빌빌대는 꼴이라니.
견궐은 패기도 능력도 없는 손자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 봤다.
견동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는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 아직 수습이 가능합니다! 용병 셋을 기용할 수 있도록 합의를 본 상황이니 조부님께서 내각의 무인을 내주신다면….”
“그걸 수습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쾅!
견궐이 책상을 내려치자 굉음이 일었다.
견동은 ‘히끅’하고 딸꾹질을 했다.
“죄, 죄송….”
“쓸모없는 것!”
견동의 어깨가 축 처졌다.
견궐은 빠드득 이를 갈다, 이내 분노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내가 네놈을 돕는 것은.”
그래도 하나뿐인 손주라고 기회를 줬다.
재능이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각종 영약을 하사하고 고수를 옆에 붙여줬다.
그럼에도 이 모양 이 꼬라지다.
“이래서 천한 피는….”
이젠 고인이 된 몹쓸 아들놈의 비행에서 태어난 반쪽짜리.
결국 피는 못 속이는 것이다.
견궐은 마지막 기대를 접었다.
“썩 꺼지거라.”
견동은 그 말에 안색을 새하얗게 물들이며 손끝을 떨었다.
하나 견동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조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패배자였기에.
“가, 감사합니다아….”
내뱉는 말이라곤 그런 감사의 말이 끝이었다.
*
비무날이 밝았다.
친선 비무가 있을 때면 언제나 복닥거리는 비무장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그 열기가 대단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용봉단의 두 번째 비무.
거기다 근 2년간 없었던 내기 비무에, 진원단에선 용병으로 내각의 무인을 데려왔다는 말까지 돌고 있었다.
내각의 비무라면 최소 절정에 초절정의 무인들까지도 비무에 나올 수 있는 상황.
기를 발출하지 않는 비무라곤 하나, 이 비무의 볼거리가 적을 리 없었다.
“묵룡이 이길 것 같은가? 왜, 자네는 직접 검을 맞부딪쳐 보지 않았나.”
오늘 가장 신나 있는 사람인 적운대주 강찬이 권표월에게 물었다.
강찬은 산적 같은 인상과는 다르게 순박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권표월은 그 모습에 큭큭 웃으며 말했다.
“들은 대로 기의 발출이 없다면….”
잠시 늘어지는 말.
동시에 지난 목리원과의 비무를 떠올리던 권표월은 지긋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답을 이었다.
“…그래, 확실히 묵룡은 이길 것이네.”
“오!”
“그 정도로 매섭거든.”
순수한 검술의 이해도만 따지자면 목리원은 결코 저보다 아래에 있지 않았다.
권표월은 그날의 비무에서 자신이 이긴 것은 어디까지나 긴 세월 다듬어온 검로를 검기가 뒷받침해준 까닭임을 알았다.
“물론, 일대일이라면 말이지.”
권표월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경험이 없는 무인들은 다수를 상대하는 전장에 취약하다.
스승에게 얻는 배움도, 강호를 주유하며 해내는 배움도 대개 일대일의 상황을 상정해 치러지는 까닭이다.
‘자, 묵룡. 자네는 그간 얼마나 성장했는가.’
지난번과 같다면 패배할 것이다.
하나 권표월이 아는 목리원은 그 정도로 스스로를 과신하며 머무르는 사내가 아니었다.
언제나 앞을 향해 나아가며 그것을 즐기는, 그런 열정 속에 사는 사내였다.
적운대주 강찬은 소년과 같이 웃는 권표월을 보며 흡족한 얼굴을 만들었다.
‘좋은 얼굴이 됐군!’
강찬은 권표월이 맹의 하급 무사일 적부터 함께 혈사를 헤쳐 나왔던 오랜 전우였다.
그는 언젠가부터 멍하니 죽은 사람과 같은 꼴을 하고 있던 제 전우가 생기를 되찾은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다.
딱 용봉단의 비무가 있던 날부터였다.
‘묵룡이라!’
권표월이 흘리듯 건넨 말을 생각해보면 그가 맞을 터.
적운대주 극멸도(???) 강찬.
그는 새로운 ‘비무 친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감을 부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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