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77화 (77/334)

〈 77화 〉 구장 ­ 임무, 첩보 (8)

* * *

선우는 멍하니 목리원을 말을 곱씹었다.

그 말의 의미를, 그리고 그와 함께 찾아오는 감동을 곱씹었다.

그럴수록 선우는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있구나.’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저 그들만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닌, 밑을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무엇도 내어줄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었다.

선우는 생각했다.

지금 목리원이 이다지도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다만 그의 외모뿐만이 아닌, 저 굳은 의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당화서가 나타난 것은 그런 순간이었다.

“뭘 혼자 멋있는 척하고 있습니까.”

웃음기가 배어있는 목소리에 목리원의 고개가 돌아갔다.

직후 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소저! 같이 가는 것이오?!”

“목 소협을 혼자 보내고 제가 잠이나 편히 자겠습니까.”

“소저…!”

목리원의 눈망울이 일렁였다.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울면 같이 안 가줄 겁니다. 자, 뚝!”

목리원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당화서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고맙소! 내 무슨 변고가 있더라도 소저만큼은 꼭 안전하게 지켜 보이겠소!”

“변고가 없게 만들어야지요.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참으로 멍청한 사람이라, 그럼에도 미워하긴커녕 더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당화서는 목리원이 꼭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를 다독였다.

‘나중 일은….’

성공이든 실패든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게 되겠지만 지금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당화서 또한 목리원의 이런 협의에 구원받은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훈훈해진 분위기 속, 마당으로 나온 이는 당화서가 끝이 아니었다.

“목아우!”

“제갈형!”

제갈산이 나왔다.

목리원과 제갈산은 ‘크흡!’하고 숨을 참더니 양팔을 벌리곤 뜨겁게 포옹했다.

“역시 제갈형! 믿고 있었소!”

“내가 아우를 두고 어딜 가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사나이의 우정!

목리원이 그런 생각에 부르르 떨자, 흠칫한 제갈산이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서 떨어졌다.

“큼, 크흠! 아무튼 몰래 담 넘는 일에만큼은 자신이 있으니 나만 믿으시게!”

“자랑이다 이 녀석아.”

당화서가 헛웃음을 내뱉자 목리원이 해맑은 얼굴로 수다를 떨었다.

“히야! 참으로 다행이오! 내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혼자 가면 어떡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소!”

“안 갈 생각은 죽어도 안 하시는군요.”

“아암! 그것이 협이니까!”

목리원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흐르고 출발까지 이각 정도 남은 시간.

일운과 혜운이 나타났다.

다른 말이 더 오가진 않았다.

일운은 불공을 외며 미소를 지었고, 혜운은 여기 남아서 할 것도 없다는 등의 혼잣말을 하며 자리를 잡았다.

이는 목리원도 놀랄 일이었다.

아무렴, 본인의 말이 억지였음을 가장 잘 아는 것이 그가 아니겠나.

그렇기에 저 혼자 출발하더라도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한 상태였다.

“함께 해주어 고맙소.”

하여 더욱 감동적인 상황이었다.

목리원은 자신의 억지에 어울려준 동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와중 혜운이 말했다.

“아직 다 오진 않았잖아요?”

목리원은 쓰게 웃었다.

그랬다.

아직 남궁진천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목리원은 그가 나오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나오지 않을 것이오. 검룡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지 않소. 또한 우리 중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지 않소. 검룡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옳고 합리적인 일을 하는 것이라 보오.”

감정이 상할 정도로 의견을 주고받긴 했지만 목리원은 남궁진천을 원망하지 않았다.

참으로 오만하고 고집이 강한 사람이긴 하나, 그 또한 품은 대의가 있는 사람이다.

아니, 어쩌면 그야말로 가장 원대한 대의를 품은 사람이리라.

그른 협의가 아닌 다른 협의.

이는 목리원이 이미 스승에게 교육받아본 개념이었다.

목리원은 남궁진천이 자신과는 다름을 인정했다.

“어쩔 수 없다고 보….”

“뭐가 어쩔 수 없나.”

순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딘가 성난, 그리고 굳은 목소리엔 중후한 멋이 있었다.

단원들의 고개가 모두 장원 쪽을 향했다.

그곳에 남궁진천이 있었다.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한 채였다.

“검룡…?”

“착각하지 마라. 돕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남궁진천의 걸음은 무거웠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기세 또한 사나웠다.

그는 목리원의 코앞까지 다가와 말을 내뱉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내가 함께 가는 것이 성공률이 높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단 전체를 위해서 이것이 옳은 선택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남궁진천의 벽안엔 노골적인 분노가 깔려 있었다.

목리원은 그 기색에 따라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고맙소. 함께 나와 주어서.”

“명심해라. 묵룡.”

“무엇을 말이오?”

“너는 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네 협의는 너와 네 주변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남궁진천은 드물게 감정적이었다.

어지간해선 협박 따위를 하지 않는 그가 목리원의 멱살을 쥘 정도였다.

남궁진천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번들거리기까지 하는 눈으로 목리원의 눈을 노려봤다.

“앞으로 있을 모든 일이 이번과 같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나는 앞으로도 계속 네놈의 뜻을 가로막을 것이다. 이 단을 위해서, 백도 무림을 위해서. 네놈 뜻대로 되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다.”

턱!

그리 말하고 남궁진천이 목리원을 밀어냈다.

목리원은 순순히 그에게 밀려난 이후, 재차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검룡의 뜻을 이해하오.”

목리원은 억지는 부릴지언정 자신의 옳음을 강요하는 사내는 아니었다.

또다시 부딪친 두 사람으로 인해 험악해진 분위기 속, 당화서다 뒤늦게 나서 중재에 들어갔다.

“…자, 어쨌든 모두 모였군요.”

당화서가 나서자 다른 단원들이 일부러 활기차게 호응했다.

여러 사고가 있었지만 결국은 하나로 뭉쳐 나아가게 된 상황.

그들의 표정이 나쁠 수가 없었다.

“자, 그럼 갑시다.”

슬슬 노을이 다 저무는 시간대였다.

참으로 긴 밤이 되리란 것은 자명한 일.

단원들이 긴장을 띄워 올리며 대열을 갖추자, 당화서가 말했다.

“선우라고 했느냐.”

“예, 예!”

“장원의 구조를 대강이나마 말해보거라. 그리고 마인들이 기거하는 곳도.”

선우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당화서를, 그리고 용봉단을 올려다 봤다.

분명 사지로 뛰어드는 꼴이었다.

하나 이들의 얼굴 위에선 긴장을 넘어선 두려움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것에 선우 생각했다.

‘영웅….’

영웅호걸(????).

정한 길을 위해 나서며 한치의 두려움도 없는 호인이라.

그 단어로 표현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꼭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리라고.

이 순간, 선우는 왜인지 심장이 크게 뛰는 기분을 느꼈다.

*

작전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일단은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요. 인질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이니만큼 최대한 상대를 방심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당화서의 말에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무력은 모른다 하나, 그것이 겁먹을 이유는 아니었다.

아무렴, 무림에 포함되는 보편적인 집단의 구성을 생각해보면 저쪽에 절정의 고수가 셋 이상은 없을 것인 까닭이다.

장원에 있는 마인은 겨우 스무 명 남짓.

단의 규모다.

그중 절정 이상의 고수를 꼽으라면 단주급 무인 하나와 부단주급 무인 몇 명정도가 끝일 터.

그에 반해 이쪽 전력은 어떠한가.

수는 여섯이지만 전원이 절정 이상이다.

개중 목리원과 남궁진천은 초절정을 바라보는 지경의 무인이다.

전력상에 모자람은 없는 것이다.

소가장의 장원을 코앞에 둔 상황.

작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던 중, 남궁진천이 나섰다.

그는 자리에 일어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시선은 내가 끌겠다. 당장 저 앞에 있을 놈들은 그리 급이 높지 않을 터다. 소란을 일으키는 동안 다른 쪽으로 잠입해 인질을 확보해라.”

그는 미끼가 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 말릴 틈도 없었다.

쿵.

남궁진천이 진각을 밟으며 달려나갔다.

이윽고 ‘쾅!’ 소리가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우, 거 성질 한번 급하시구먼.”

제갈산이 헛웃음을 내뱉으면서 말했다.

*

담벼락을 넘어온 남궁진천은 주변을 둘러봤다.

“열다섯.”

딱 봐도 마인이다.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도, 호흡이 거친 것도, 그 외의 모든 것이 저들이 마인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최대가 일류인가.’

그리 판단을 끝낸 남궁진천이 자세를 다잡았다.

그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속 또한 분노에 절여져 있었다.

이는 남궁진천이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누군가는 비합리적이어야 하오. 누군가는 눈앞의 약자를 위해 뛰어들어야 하오. 그래야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웃을 수 있소.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목리원의 말.

헛소리라 치부하며 밀어내려 해도 좀처럼 밀어내 지지 않는 말이었다.

왜 이런지는 남궁진천 본인도 몰랐다.

그저 떨쳐내려 하면 그 말이 조금 더 목을 옥죄어오는 기분이 들 뿐이었다.

‘헛소리다. 궤변이다.’

목리원이 이제까지 강자였기에 할 수 있는 헛소리일 뿐이었다.

저 입바른 소리는 본인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꺾일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아니, 그날이 오늘일지도 몰랐다.

저 속에 있을 마인이 목리원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강적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자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분명 그럴진대, 그리된다면 목리원을 한껏 비웃어줄 수 있을진대.

“…불쾌하다.”

남궁진천은 그것이 너무 불쾌했다.

목리원이 스스로의 말을 증명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떠올리게 되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불쾌함이 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쳐라­!”

마인중 하나가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곳곳에 포진해있던 마인들이 성난 기운을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남궁진천에겐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화아악!

청색의 기파가 온 공간을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그것에 달려들던 마인들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러자 남궁진천의 검이 한차례 가로로 길게 그어졌다.

“버러지 같은 것들.”

서걱.

단 일수에 일어난 일은 경이적이었다.

마인 중 앞서 달려오고 있던 절반.

그들의 허리가 끊어지며 몸이 두동강 났다.

핏물과 몸뚱어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철푸덕’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뒤늦게 살아남은 마인들이 경계를 다졌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검룡 남궁진천은 다음 세대의 주인이라 평해졌던 이의 이름이었다.

지금이야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됐으나, 그것이 그의 무력이 퇴보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패배는 그에게 더욱 강한 힘을 쥐여줬다.

남궁진천이 팔을 들어 올리자 검이 높게 치켜세워졌다.

공간을 장악한 기파는 마인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그들의 숨을 옥죄었다.

“쓰레기 같은 것들.”

남궁진천은 그리 말하며 기파를 가다듬었다.

검에 실린 것은 여전히 분노였다.

이것이 마인들에 대한 분노인지, 목리원에 대한 분노인지, 그도 아니면 목리원의 말을 떨쳐내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인지 남궁진천은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지금 자신의 마음은 이제까지의 생애 중 가장 불쾌한 기분을 떠올리고 있었고, 마침 눈앞엔 짜증을 털어낼 좋은 상대들이 있다는 것.

“죽어라.”

남궁진천이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허공을 가르는 움직임이었으나, 그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남궁의 검은 하늘의 검이다.

남궁의 검은 제왕의 검이다.

상대를 베기 위해 쫓아 달려가는 행위 자체가 사치이자 불명예라.

하여 이름 붙이길 제왕검형(?王??).

가장 오만하고 무거운 검이 내리 그어지자, 공간을 장악한 기파가 그들의 정수리 위에서 버려져 아래로 떨어졌다.

서걱.

절삭음과 함께 마인들이 모두 스러졌다.

그제까지도 남궁진천은 이를 빠득 갈며 짜증을 토해낼 뿐이었다.

‘여전히 불쾌하다.’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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