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69화 (69/334)

〈 69화 〉 팔장 ­ 친선 비무 (4)

* * *

꽤나 오래전의 일이었다.

18세의 권표월은 하북의 영세 무관의 사범이었다.

18세의 나이로 사범이라, 그 직책엔 권표월의 무재나 시골이라는 특성도 분명 존재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랬다.

권표월은 그저 관장의 아들이기에 자연스레 사범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딱히 그것에 불만은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일은 무엇보다 즐거웠으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범님 소리를 듣는 것은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자랑스러운 직책이었으니.

권표월은 그런 작은 일에도 만족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제 인생이 평생 그리 평탄할 줄로만 알았다.

검성 목선오는 그런 와중에 만난 사내였다.

“기골이 훌륭하오.”

혈사가 일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권표월은 강호를 유랑하다 우연히 제 마을에 들른 목선오를 보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목선오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줄 알았던 제 아버지를 단 1초에 쓰러트린 까닭이다.

그저 친선 비무였기에 아버지도 목선오도 만족한 비무였으나 권표월은 그랬다.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가 있는 것이오?”

젊은 그는 혈기왕성했고 향상심이 높았다.

하늘 위에 새로운 하늘이 존재함을 아는 순간 차오르는 열망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순간 목선오가 내뱉은 말이 있었다.

권표월의 인생 자체를 뒤흔든 말이었다.

“검에 싣는 것이네. 바라는 이상의 풍경을.”

“이상?”

“매 검초… 아니, 검을 뽑는 순간마다 신념을 두르는 것이지. 꺾이지 않는 신념보다 강력한 무기는 없는 것 아니겠나.”

솔직히 말하면 목선오는 추남이었다.

불거진 광대뼈와 주먹코, 그리고 좁쌀만 한 눈의 두 배 길이는 되는 늘어진 눈썹까지.

하지만 권표월은 그가 미소 짓는 순간 절세의 미남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낭만을 사는 검객은 그리도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었다.

그날부터 권표월의 꿈은 협객이었다.

“아버지! 강호를 배워 오겠습니다!”

“그래, 내 언제나 응원하마.”

19세의 나이에 권표월은 강호에 나섰다.

21세의 나이에 무림맹에 입단했다.

그리고 23세의 나이에 혈사, 혈천교와의 전쟁에 나섰다.

돌이켜도 끔찍하기만 한 순간의 연속이었으나 그 시대를 살아간 무인이라면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있었다.

혈사의 시대는 협객의 시대였다.

그날의 무림은 어느 때보다 정의로운 무림이었다.

하나 되지 못했던 백도 무림은 무림맹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쳤다.

언제나 반목하던 초월지경의 절대자들은 사성과 육왕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적을 향해 달려 나갔다.

권표월은 그런 나날 중 목선오와 재회했다.

추억 속의 검객은 검의 별이 되어있었고, 시골 무관의 사범이었던 청년은 맹의 무인이 되어 있었으나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훌륭한 기골이오.”

그날의 권표월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꿈이었던 사내가 여전히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협을 쫓아왔소. 협객이 되기 위해.”

좀 더 늙은 목선오는 추함 위로 선기가 더해졌다.

세월에 따른 주름이 더해졌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목선오는 여전히 미소가 멋들어진 협객이었다.

“부끄럽구려. 하나 뿌듯하오. 내가 당신에게 협객으로 보였다는 것이.”

그것으로 족했다.

혈사는 끝났다.

하지만 권표월의 강호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부르짖고 싶었다.

검을 뽑는 순간마다 신념을 품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검은 그다지도 무거운 것이라 함부로 휘둘러선 안 되는 것임을.

금검이라는 칭호는 그가 35세가 되던 날 얻은 것이었다.

금색의 검집은 38세, 백검대의 대주가 되던 날 얻은 것이었다.

끊임없이 나아가기만 하여, 그리도 내달리기만 하여 또 3년.

오늘의 권표월은 드디어 깨달았다.

자신이 검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음을.

신념의 휘두르는 일을 잊고 그저 검의 무게만 신경 쓰는 사내가 되어있었음을.

아니, 휘두를 신념조차 흔들리고 있었음을.

“공리검(??).”

그리고 이제야 그런 허물을 벗어 던지게 되었음을.

“검초를 다스리는 검법이네. 가전 무공이지.”

눈앞의 젊은 혈기를 통해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자네의 검은 무엇인가.”

양보했던 5초는 이미 끝났다.

목리원은 초절정의 벽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화려한 검초나 기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갈했다.

금검 검표월은 그가 좇는 이상만큼이나 절제되고 무게감 있는 검을 휘두르는 사내였다.

목리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신난 기색을 떠올리며 빛나고 있었다.

“만련이검(??理?).”

목리원이 말했다.

“만 가지의 검초를 담아 하나의 뜻으로 다스리는 검이오.”

오늘 비무 중 처음, 목리원이 제 것의 기수식을 취했다.

“직접 만든 무공이오.”

권표월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의 입가엔 목리원의 것과 똑 닮은 미소가 맺혔다.

“대종사와의 비무라,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네.”

“나 또한.”

양보한 5초가 모두 끝난 상황.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는 두 사내가 있었다.

이곳은 백도 무림의 본산인 무림맹.

그리고 비무대 위.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내가 동시에 움직였다.

권표월의 공리검이 절제된 움직임으로 쏘아져 나갔다. 명치를 노리는 찌르기였다.

그것에 화답하는 목리원의 검을 올려 베기였다.

하나 단순한 올려 베기의 동작은 아니었다.

묵룡의 상징과도 같은 변초.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뻗어나갈 자리를 찾아 쉼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채앵!

올려베기가 선택한 바꾼 형상은 내려치기.

찔러 들어오던 권표월의 검은 경로가 비틀려 목리원을 빗나갔다.

그 순간 각도가 뒤집힌 목리원의 검이 권표월의 목을 노렸다.

권표월은 검을 역수로 쥔 채 손잡이 끝으로 목리원의 검날을 후려쳤다.

쩌엉! 하는 울림이 비무대 위를 강타했다.

하나 같이 내력이 실린 동작들이라 그 여파만으로 비무대가 다 울릴 지경이었다.

검초는 계속해서 오갔다.

목리원의 검은 몰아치는 폭풍이었다.

권표월의 검은 폭풍 한가운데서도 쓰러지지는 않는 뿌리 깊은 나무였다.

언뜻 목리원이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양상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나, 이 비무를 보는 이들 중 그것에 현혹될 정도로 수행이 낮은 이는 없었다.

남궁진천은 미간을 구겼다.

‘체급 차이.’

용봉지회의 결승때와 비슷한 양상.

하지만 권표월이 그날의 자신처럼 쓰러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초절정이라는 벽을 넘겨, 목리원과 비교해도 압도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체급.

그것이 이런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 터였다.

남궁진천은 팔짱을 낀 채 눈을 부릅떴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빛나는 그의 벽안엔 형형한 기색까지 담겨 있었다.

남궁진천은 저 비무를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

목리원을 무릎 꿇릴 방법을,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압도적인 힘.’

더욱 압도적인 체급 차이로 몰아치는 검 앞에서도 오연해 지리라.

남궁진천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내의 비무는 과연 친선 비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것을 본 모든 이들에게 영감이라 할 것을 피워주고 있었다.

막혀있던 벽을 뚫을 자그마한 단서를 쥐어 주고 있었다.

보는 사람만이 그 정도였다.

하면 당사자들은 또 어떻겠는가.

채앵!

검초가 오간다.

검에 품은 뜻이, 그것을 지탱하는 신념이, 또 서로의 이상이 오간다.

목리원과 권표월의 입가에선 미소가 지워질 줄 몰랐다.

한순간 긴장을 늦췄다간 그대로 고꾸라질지도 모르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칼춤을 추는 것과도 같은 행위.

그것에 따라 떠오르는 짜릿한 전율이 전신을 헤집는 것이었다.

위협과 긴장감에 사고가 일점으로 몰리는 와중, 두 사람이 떠올린 생각은 놀라우리만큼 똑같았다.

‘즐겁다!’

그들은 이 비무를 즐겼다.

오가는 검은 그리도 많은 것을 서로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검의 형상은 마음의 형상이라, 또한 그 사람의 본질이라.

목리원은 강직하고 절제된 권표월의 검에서 그의 우직한 성격을, 절제된 격식을, 잔불처럼 꺼지지 않는 열정을 느꼈다.

권표월은 몰아치는 목리원의 검에서 그의 변덕스러움을, 톡톡 튀어 오르는 성격을, 겁화처럼 화려하게 타오르는 열정을 느꼈다.

또다시 검초가 오간다.

쾌에서 강, 다시 유에서 중.

한번 검을 휘두르는 순간 총 네 번의 변화를 품고 쏘아진 목리원의 검을 권표월이 손목을 뒤트는 것만으로 막아냈다.

이어진 권표월의 동작은 오늘 중 가장 큰 움직임이었다.

권표월이 크게 앞으로 발을 디뎠다.

쿵! 소리와 함께 그의 공력이 비무대 위를 휩쓸었다.

목리원은 직감했다.

‘맞서면 안 된다!’

체급의 차이란 실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이것에 맞붙었다간 10할의 확률로 패퇴하게 될 것임을.

목리원이 발을 물렸으나 권표월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자네는 초절정을 모르는군.”

권표월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미소였다.

미혹을 떨쳐낸 이상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는 저 어리고 재능 있는 협객이 아직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일러줄 생각이었다.

“기파라는 것은 결국 심상의 발현이라네. 잘 기억해두게나.”

권표월의 몸에서부터 기파가 터져 나왔다.

그의 기파는 바위의 빛이었다.

하나 조금의 투박함도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형상이었다.

공리검이라는 별 볼 일 없는 가전 무공으로 초인의 경지에 이른, 투박한 바위를 깎아 보옥을 만든 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형상이었다.

권표월이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그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 한 동작만을 수련해온 것인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깔끔함이 깃든 검이었다.

검의 형상을 한 기파였다.

일생을 갈고닦아 일군 것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내는 기예.

초월의 문턱에 선 이들의 증명과도 같은 기예.

완전한 형태의 기공(??)이 이 자리에 재현되었다.

그것이 목리원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아.’

그 순간 목리원의 직감은 말했다.

지금 당장 이 비무대의 어디로 도망친다 한들, 저 검에서 벗어나진 못할 것이리라고.

살기는 없었다.

하지만 생존 본능은 부르짖었다.

패배였다.

그것에 목리원은 웃었다.

‘엄청나다.’

이대로 자신은 지고 말리라.

하나 그것이 발악해선 안 된다는 뜻은 아니리라.

목리원에게서 묵색의 기파가 터져 나왔다.

제대로 휘두르지조차 못하는 어설픈 기공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유성칠검의 3식, 십이지검(?二?).

묵색의 운무 속에 떠오르는 투명한 별이 공간을 점하며 목리원이 쏘아지는 경로를 죄다 빛으로 물들였다.

그는 항거할 수 없는 거인 앞에서 발버둥 치는 소인이 되어, 가진 모든 것을 끌어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쿵!

권표월의 옷자락을 베어냈다.

이날, 목리원은 초절정의 벽을 마주했다.

*

비무장에 정적이 일었다.

아득한 무리를 마주한 젊은 무인들은 최후에 오갔던 수를 헤아리는 데 정신이 팔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권표월은 그 한가운데에 선 채 무릎 꿇은 목리원을 바라봤다.

그러다 제 옷 앞섬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는군.’

흉내다.

그가 보인 기공은 절정의 끄트머리에서나 초절정을 바라보며 겨우 흉내 낼 수 있다는 어설픈 기공이었다.

한데 목리원은 절정의 끝자락도 아니었다.

그는 완연한 절정의 중입.

즉, 목리원은 그저 가진 무재와 응용력만으로 제겐 허락되지 않는 기예를 억지로 손에 쥐어 버린 것이다.

권표월은 그 경이적인 재능에 감탄했다.

확신으로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추월당한다.’

머지않아 이 젊은 협객은 자신이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경지까지 내달려버릴 것을.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권표월은 싱긋 웃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백도 무림의 새로운 고수가 나온다면 그저 환영하면 될 일.

또한 아직 강자는 자신이었으니.

“훌륭한 비무였소.”

그는 그저 상대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목리원은 멍한 표정으로 직전의 상황을 곱씹다, 그제야 후련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수 배워가오!”

목리원의 비무가 끝났다.

하나 용봉단의 비무는 끝나지 않았다.

권표월은 직후 용봉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은 누구시오?”

그렇게 추가로 5연승.

권표월은 무림맹의 대주가 어떤 의미인지.

또한 초절정의 무인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들에게 여실히 알려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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