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68화 (68/334)

〈 68화 〉 팔장 ­ 친선 비무 (3)

* * *

비무 날이 밝았다.

목리원은 검을 차고 비무대 위로 오를 준비를 했다.

그가 첫 순서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내 고집을 들어주어 고맙소.”

바로 전날, 그가 계획했던 일을 다 엎길 부탁한 까닭이다.

단원들은 그 진중한 기색에 웃으며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금검 대협과 비무를 하고 싶소. 그를 비무대 위로 끌어내고 싶소. 대협께 검을 나누는 일의 즐거움을 말하고 싶소.

이곳에 있는 단원들은 모두 알았다. 언제나 아이 같던 목리원이 진지한 얼굴로 말할 때면 꼭 신비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힘내십시오.”

당화서가 웃으며 말하자, 목리원이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고집부린 만큼의 결과물을 내어 오겠소.”

그가 비무대로 올랐다.

*

권표월은 비무대 위로 올라오는 목리원을 보며 심란한 얼굴을 만들었다.

머릿속엔 주르륵 그날 밤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내 대협의 이야기를 들었소. 곧 인사평가가 있다는 것을 몰랐소. 미안하오.

­아, 아니네. 나야말로 미안한 일이지. 기대를 저버린 것이니.

­그러니 미안한 부탁을 하나만 더해도 되겠소?

­…무슨 말인가?

­비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오.

­허허, 그것은 미안하지만….

­그저 비무이지 않소.

달빛조차 어둑하니 음영 진 복도의 한가운데에서, 그 순간 목리원이 보인 미소를 권표월은 잊을 수 없었다.

­검으로 협을 세우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중요한 일이나, 그래도 그렇지 않소. 검으로 협을 휘두르기 위해 검을 아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오.

아이의 고집과도 같은 말이었으나 그의 말엔 묘한 마력이 있었다.

권표월은 차마 그의 앞에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여 그저 곱씹을 뿐이었다.

그가 떠나가며 했던 말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오. 내 대협의 입장은 이해하오. 대의를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이 있음은 나 또한 알고 있으니. 하여 그저 말하러 왔소.

­…무엇을 말인가.

­나는 비무의 선봉으로 올라가 단 한 번도 지지 않을 것이오. 아마 내가 전승을 거둔다면 백검대의 인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오. 그러니 말이오.

그 순간 목리원이 띄워 올렸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그땐 어쩔 수 없이 금검이 올라와 본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어쩔 수 없이 말이오.

꽈악.

권표월의 주먹이 쥐어졌다.

그런 중에도 눈빛엔 묘한 일렁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입가에 저도 모르게 그려지는 것은 미소였다.

‘어쩔 수 없이… 말인가.’

어쩔 수 없이 비무대에 올라 어쩔 수 없이 비무를 해라. 참으로 말장난과도 같은 말이었으나, 권표월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아주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은 다른 생각을 다 내려두고 비무대에 오를지도 모르겠다고.

그저 검을 나누는 행위에 즐거워할지도 모르겠다고.

왜 이제와 이런 것에 새삼스러운 욕구가 떠오르는 것인지.

권표월은 그 이유가 있다면 아마 저 사내의 눈빛이리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맑구나.’

목리원은 눈빛은 맑았다. 아주 투명한 호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

둥! 둥!

북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심판으로 나온 청룡대의 무인이 외쳤다.

[양측 위치로!]

목리원은 그 말에 비무장 한가운데로 섰다.

맞은편으로 올라오고 있는 사내는 백검대에서도 쾌검으로 유명하다는 무인이었다.

“내 묵룡과 검을 나누다니 영광스럽구려. 왕일이라 하오.”

쾌검수 왕일이 포권을 취하자 목리원도 포권을 취했다.

“좋은 승부가 되었으면 좋겠소.”

그리 말하지만 목리원의 신경은 저 멀리로 가 있었다.

금검 권표월.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각오가 다져지는 것이다.

목리원도 알았다.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하나 그는 더 이상 그것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이곳은 강호 무림.’

검으로 협을 세우는 무인들의 세계, 강한 자만이 옳음을 증명할 수 있는 비정한 세계.

철부지의 땡깡이면 어떠하겠는가. 현실을 모르는 낭만이면 어떠하겠는가.

그저 증명하면 될 일이었다. 목리원은 검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일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스릉.

검이 뽑혀 나왔다.

그제야 왕일의 자세가 목리원의 눈에 들어왔다.

양손으로 검을 쥔 채 올려베기를 예비하는 자세.

이는 목리원이 탐독한 검법서 중에 분명 포함되어 있던 자세였다.

‘옥뢰진검(?雪?).’

번개처럼 쏘아지는 3번의 베기를 묘리로 삼는 검법.

목리원은 그것을 알아채자마자 자세를 바꿨다.

왕일의 것과 똑같은 옥뢰진검의 자세였다.

“…!”

왕일의 눈이 부릅 뜨였다.

직후 나오는 것은 헛웃음이었다.

‘그래, 이게 바로 그 묵룡이란 말이지.’

왕일은 긴장감에 근육을 부풀렸다.

묵룡이란 별호가 생기기까지 그가 용봉지회에서 행했던 일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던 까닭이다.

조별 예선에서 오로지 남궁진천만을 노리며 보였던 일 수의 연속은, 그리고 본선에 진입하여 보였던 변화무쌍한 검초는, 마지막으로 남궁진천을 찍어누르며 사용했던 이해를 벗어난 검술은.

그 모든 것은 지금 목리원이 장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다.

왕일은 씨익 웃었다.

“대주님을 끌어낼 생각이구려.”

“부정하지 않겠소.”

목리원이 싱긋 웃었다. 왕일은 기꺼움을 느꼈다.

아무렴, 그가 이 비무에서 대주를 끌어내기 위해 허투른 수를 쓰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는 까닭이었다.

‘대주에게 보여줄 생각이겠지!’

자신의 상대로 대원들로는 모자람을, 대주가 아니면 좁힐 수 없는 격차가 대원들과 제게 있음을.

하나 왕일은 말했다.

“쉽지 않을 것이오!”

고금제일로 논해질지 모르는 기재라, 그래봐야 아직은 열여덟의 청년일 뿐이다.

겪어본 무림이라곤 용봉지회가 끝인 애송이다.

왕일에게서 ‘빠지직’하며 번갯불이 튀겼다.

옥뢰진검(?雪?)의 짝인 뇌정공(雪??)이 펼쳐진 것이다.

그는 어린 새싹에게 보여줄 심산이었다.

강호는 재능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며, 다만 먼 곳을 바라보다 가까운 곳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개시!]

빠직!

왕일의 검이 번갯불을 튀기며 쏘아졌다.

목리원의 허리를 노리는 검이었다.

검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다. 긴장감과 결의가 도움이 된 것인지 근래 있었던 것 중 가장 깔끔한 검로였다.

‘맞았…!’

왕일은 그리 확신했다.

후배를 일깨워주기엔 충분하리만치 훌륭한 검이라고.

채앵­!

…하나, 목리원을 훈계하긴 너무나도 느린 검이었다.

후발선지(????).

더 늦게 뽑아낸 검을 먼저 도달시키는 묘리가 목리원에 의해 펼쳐졌다.

왕일은 자신의 인식을 벗어난 속도로 제 목젖에 도달한 검에 몸을 멈춰 세웠다.

“…좋은 검이었소.”

건네진 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이쿠야.’

패배가 확정된 순간, 왕일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쉽지 않을 것이오!’라는 말은 괜히 했다고.

*

양상은 끔찍하리만치 일방적이었다.

목리원은 격의 차이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압도적인 기량으로 백검대의 검수들을 찍어눌렀다.

벌써 다섯 번째 무인이 비무대에 오른 상황.

그 누구도 목리원의 일 수를 버티지 못했다.

처참한 상황이다.

분명 그리해야 할진대, 패배한 무인들의 얼굴 위론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이야~ 거 출수 한 번 기가 막히더군! 내 묵룡의 검이 뽑히는 것도 보지 못했네!”

“아무렴, 내 오늘을 기억하고 있다가 우울할 때마다 떠올릴 생각이네! ‘쉽지 않을 것이오!’ 크으~ 올해의 명대사구먼!”

“아니 이 사람이?”

가장 먼저 패배한 왕일도, 뒤를 이어 패배한 장삼과 천구용도 하진목도 모두 웃고 있었다.

이유야 말해 뭐하겠는가. 비록 패배했다곤 하나 이들 모두가 즐긴 것이다.

인정할 수 있는 상대와의 비무를, 그리고 그 순간의 긴장감을.

권표월은 그것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도.’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권표월은 씁쓸하게 웃었다.

비무대 위에선 다섯 번째 선수였던 도평이 ‘어이쿠!’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있었다.

[묵룡! 승!]

“좋은 검이었소.”

“과찬이시오! 내 묵룡의 검이 허명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구려! 한 수 배워가오!”

도평의 얼굴 위로도 호방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대주.”

순간 그를 부르는 이가 있었다.

백검대의 부대주이자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전우, 사경운이었다.

“자네 차례인가.”

“무슨 소리요. 내가 가봐야 지기밖에 더 하겠소? 그래도 부대주인데 저런 괴물이랑 붙어서 창피를 당하긴 싫다오.”

사경운이 껄껄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멈춘 그는 지그시 미소 지으며 권표월에게 말했다.

“그거 아시오? 묵룡이 전날 나를 찾아왔었소.”

“…묵룡이 말인가?”

“어쩔 수 없는 상황. 이라는 것을 말하더구려.”

권표월의 시선이 목리원을 향했다.

그는 소년과도 같은 열망을 드러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권표월은 몸이 들썩이는 것을 느꼈다.

“대주, 이러다 무림맹에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닐지도 모르오. 가서 한 수 보여주면 안 되겠소?”

사경운의 말에 권표월은 입술을 짓씹었다.

“…알지 않나.”

이치에 맞지 않는 비무다. 자신이 이 비무에서 지기라도 한다면 백검대가 전패했을 때보다 더욱 큰 손해가 돌아온다.

차라리 대주가 나서지 않은 친선비무의 전패가 훨씬 나을 수준의.

그저 즐기기에는 현실의 벽이….

‘…아니.’

아니었다. 권표월은 고개를 숙여 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바라봤다.

금으로 된 검집은 검의 무게를 언제나 잊지 않고자 덧씌운 각오였다.

그것이 권표월의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니다. 어쩌면….’

권표월은 순간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은 겁을 먹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 찬란한 광채 자체에 홀려 어느 순간 무가 아닌 직위를 쫓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권표월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보다 하수인 목리원을 앞에 두고 안전한 길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무인답지 않았다.

‘나는 직위를 위해 검을 든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하나였다.

그저 시골 동네의 무관에서 사범이나 하던 자신을 이곳까지 이끈 꿈은, 되고 싶었던 것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검성.’

그처럼 한 번의 검에도 한 번의 의를 담을 줄 아는 진중한 무인이었다.

검의 무게에 짓눌려 뽑는 일조차 두려워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다.

권표월은 그제서야 허탈하게 웃었다.

상념이 있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무인이 왜 검을 뽑길 주저하는 것이냐.

왜 검보다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이냐.

권표월은 스스로를 욕했다.

그리하고서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대원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이 더 좋은 자리를 맡을 수 있는 이들임에도 자신을 따라와 주는 고마운 동료들이었다.

그저 자신이 품은 의를 동경하여 뒤따르는 이들이었다.

권표월은 그들의 눈에 맺힌 기대감에 그만 웃어버렸다.

“…하여튼 아주 망신이란 망신은 다 시키는구나.”

부대주 사경운이 자리를 비키자 대원들이 쭉 물러났다.

권표월의 눈앞에는 비무장으로 향하는 길이 뚫렸다.

권표월은 그것을 바라봤다.

‘진즉에 가야 했을 길을….’

권표월의 발이 떨어져 비무대를 향했다.

걸음 중에 검이 뽑히고 금색의 검집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겨우 포장에 홀려 이제야 가는구나.’

비무대 위에 서 있던 목리원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잘 부탁하오.”

권표월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하고 독하다. 결국 그가 이 자리에 자신을 끌어냈으니 결국은 그의 승리라 해도 무방했다.

그런 중에도 맑고 순수하다.

무인으로서 본이 되는 모습이다.

하여 권표월은 잊기로 했다.

“대원 다섯이 자네에게 패배했지.”

복잡한 인사평가도, 대주로서 보여야 할 품위도, 금검이라는 허명도.

모든 것을 잊고 검수 권표월이 되어 말했다.

“그러니 다섯 수를 양보하겠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아이처럼 웃었다.

“오시게.”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