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팔장 친선 비무 (2)
* * *
“금검 대협을 뵙소!”
목리원은 환히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이제껏 무림맹에 와서 꼭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상대 중 한 명을 만난 것에 기쁜 것이었다.
시선은 그새 권표월의 허리로 향했다. 금칠이 되어 있는 검집이 목리원의 낭만을 자극하고 있었다.
“내 맹에 온 이후 금검 대협의 여러 협행에 대한 말을 참 많이 들었소!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너무 영광이오! 혹 시간만 괜찮으시다면 잠시 대화를….”
“아, 미안하네. 내 지금 갈 길이 바빠서.”
“앗.”
목리원이 그제야 ‘아차’하는 얼굴을 만들며 머쓱하게 말했다.
“…그렇겠구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일과 시간이었지. 내 미안하오. 기쁜 마음에 그만 실례했구려.”
“실례까지야. 무려 묵룡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것인데 도리어 감사한 일이오.”
그의 사양에 목리원의 눈이 반짝였다.
권표월이 소문대로의 사내 같다는 생각 탓이었다. 예를 알고 진중하며 절대 상대에게 실례가 되는 말을 하지 않는, 그런 사내 말이다.
목리원은 동경이 묻어난 얼굴로 권표월에게 말했다.
“아! 그래도 며칠 뒤면 비무가 있지 않소! 내 그날 금검 대협과 검을 나눌 수 있을 것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오!”
“음? 비무 말인가. 이거 미안하게 됐네.”
목리원과 당화서의 몸이 멈칫했다.
권표월은 머쓱함이 묻어나는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나는 나가지 않을 걸세. 대원들에게 기회를 더 주고 싶거든.”
그 말에 반문한 것은 당화서였다.
“친선 비무엔 대주와 단주가 꼭 나와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관례가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이 필수인 것은 아니네.”
목리원의 얼굴 위로 진한 아쉬움이 떠올랐다.
“그렇소? 아쉽구려.”
“하나 기대는 하고 있네. 우리 대원들 또한 자네들과 비교해서 떨어지는 실력은 아니거든. 좋은 승부를 볼 수 있겠지.”
권표월은 그리 말하곤 포권을 취했다.
“그럼 이만 실례해보겠네.”
그에게선 조금의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
곧 해가 지는 시간, 목리원은 유유자적 차를 마시고 있던 염소소를 찾아와 담소를 나누는 와중이었다.
“금검 말이냐?”
염소소의 말에 목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비무에 나오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아쉬워서….”
목리원의 기색은 오전에 비해 확연히 수그러들어 있었다.
염소소는 잠시 생각을 이어가다, 이내 ‘아’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권표월. 그놈이 금검이었지. 내 잊고 있었구만.”
“음? 친분이 있으신 겁니까?”
“친분은 아니고 그냥 들은 이야기가 있다.”
목리원의 얼굴 위로 호기심이 떠올랐다.
염소소는 끌끌 웃으며 말했다.
“아마 거짓말일 테다. 단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빠진다는 것.”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목리원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염소소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놈 검집에 칠해진 금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검을 휘두르는 일의 무게를 알라! 그런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인 게다.”
목리원의 고개가 기울었다.
제가 생각하기엔 그저 낭만적이고 멋있는 각오일진대, 염소소가 그걸 문제로 꼬집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멋있지 않습니까? 협객으로서의 자세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뜻만 따지면 그렇지. 그래, 이 무림에 있는 모든 이가 따라야 할 가르침이 맞다.”
염소소는 차를 홀짝이다, 이내 좀 더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아가야.”
“예!”
“무림인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염소소의 기색은 어딘가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빛이었다.
“강호에 매몰되어가는 것이다. 가슴에 품은 이상이 현실의 벽에 물들어가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그런 것이다. 아가는 협객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
“예….”
“물으마. 네가 생각한 협과 강호는 실제로 맞닥뜨린 것과 같더냐?”
목리원은 그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짚이는 점이 있었던 까닭이다.
‘강호협객전’으로 본 강호는 언제나 낭만과 꿈, 그리고 이상이 존재했다. 그 속에 사내의 가슴을 울리는 깊은 울림이 존재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강호는 목리원의 생각보다 조금 더 매정했다.
당화서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망자여야 했다.
잔혈곡의 강시들은 힘이 없다는 이유로 안식에조차 들지 못했다.
안휘에서 만난 어떤 미망인은, 강호협객전의 저자 곽칠표는 또 어떻던가.
“…완전히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목리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염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이 현실적인 강호다. 무로 협을 바로 세우고자 부르짖음에도 결국은 강자존의 원리로 회귀하는 것이 이 강호다. 그러니 말이다. 매몰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말씀은….”
“나는 그리 생각한다. 금검은 너무 세파에 찌들어버린 게야.”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염소소는 그 긴 세월을 무림인으로 살아오며 권표월과 같은 이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제아무리 고집이 강한 이들이라 한들 언젠가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씩 순응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슴에 품은 이상조차 현실에 끼워맞추게 되는 것이다.”
검의 무게를 알라. 권표월은 그 가르침을 아직 따르고 있을 것이다.
하나, 그것이 협객으로서의 의미는 아닐 것임을 염소소는 장담했다.
“그놈은 제 검에 가치를 매기는 사내일 터다. 협의로서의 가치가 아닌 재물로서의 가치 말이다.”
“재물….”
“몸값을 따지게 되는 것이지. 무림맹의 대주로서, 검수로서.”
목리원은 염소소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염소소 또한 그 기색을 알 수 있었다.
목리원의 표정은 그다지도 불퉁해져 버렸으니.
하여 염소소는 설명을 더 했다.
“무림맹의 대주란 맹의 중간 관리직이다. 그렇기에 대주들은 맹의 핵심이 될 더 높은 자리를 원한다. 그리하여야 제 뜻을 펼칠 수 있는 까닭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적과 무명. 그러니 그놈은 너를 꺼릴 것이다.”
“저를 말입니까?”
“너와의 비무에서 이겨봐야 본전이고 져봐야 후배한테 패배했다는 설욕밖에 당하지 않겠느냐.”
“….”
“그놈은 계산한 것이란 말이다. 너와 할 비무의 가치를. 그 끝에 이 비무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인사고과에 긍정적이리란 판단을 한 것이겠지.”
목리원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염소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인 가치.
그것은 목선오와 마일석도 이미 목리원에게 일러준 일이 있는 개념이었다.
원아, 너도 언젠가는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다.
선택이요?
그저 낭만을 좇는 철부지가 될지. 현실적인 협을 위해 무명을 쌓을지.
무엇이 다른 건가요?
낭만을 좇으면 눈앞의 사람을 구할 수 있다. 현실적인 협을 좇으면 대의를 구현할 수 있다.
…잘 모르겠어요. 옳은 협이 무엇인지.
무엇도 틀리지 않았단다. 그저 다를 뿐이지.
그저 다르다.
목리원은 이해했다.
권표월은 더 높은 자리에 올라 스스로가 주장하는 협을 세상에 떨치고자 하는 것일 터다. 그 과정에 자신과의 비무는 손해가 된다 판단한 것이겠지.
“…하지만 말입니다.”
이해는 하지만 납득은 할 수 없었다.
머리는 수긍하나 가슴이 수긍하지 않는다.
목리원은 여전히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협은 제가 아는 것과 너무 다릅니다. 도전을 모르고 성과와 이익을 따르는 것은 협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너무 편협한 것입니까?”
염소소는 목리원의 표정을 뜯어봤다.
굳은 입매와 좁아진 미간, 그리고 그 와중에도 또렷하게 뜨인 눈.
이것은 고집쟁이의 얼굴이다.
좀처럼 타협을 모르는 백치들의 얼굴이다.
그리고 염소소는 이런 백치를 알았다.
“편협한 협은 없다. 다만 검이 있을 뿐이지.”
염소소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어 염소소는 읊었다.
이 강호를 움직이는 단 하나의 규율을.
“아가야, 이 강호에서 협을 부르짖을 수 있는 이는 승자뿐이란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겠느냐.”
염소소의 손끝이 목리원의 허리로 향했다. 그곳엔 낡은 철검이 걸려 있었다.
“그의 대의와 계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검으로 말하거라. 너의 협이 옳음을.”
강자존.
그 어떤 미사여구로 꾸민다 한들 변치 않을 이 강호의 유일한 진리.
그것에 목리원의 주먹이 더욱 꽉 쥐어졌다.
“…저는.”
목리원은 제 검을 내려다봤다. 권표월의 것과는 다르게 그저 세월만이 묻어난 낡은 검이었다.
“저는… 복잡하고 어려운 계산은 모릅니다. 그것을 가슴에 품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것은 처음 스승님께 검을 배운 날 이후부터 쭉 하나였습니다.”
“무엇이더냐?”
“협객은 낭만을 좇는 이들을 일컫는다는 겁니다.”
목리원은 검집에 손을 얹었다.
그리하며 오랜 과거의 일을 되새겼다.
스승님은 무엇을 선택하셨나요? 낭만과 현실 중에요.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으음?
이 스승은 낭만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란다. 하여 한치 앞밖에 볼 줄 모르는 바보가 되기로 했다.
스승이 제게 선물해준 것을 되새겼다.
목리원의 고개가 들렸다. 목소리에 힘이 더해졌다.
“저는 차라리 백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쟁이가 될 것입니다. 더 큰 대의라는 명목으로 눈앞의 일을 외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할 수 있겠더냐? 금검은 무림맹의 대주다. 즉,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강자라는 뜻이다. 금검을 비무대 위로 끌어 올리는 일을 해결한다 한들, 너는 이후 금검과의 비무에서 이길 자신이 있느냐?”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검을 휘두를 겁니다.”
“음?”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야 목리원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았다. 결심을 내리고서야 속이 확 트인 기분을 느낀 것이었다.
“협객은 언제나 가장 어려운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염소소의 눈이 슬쩍 커졌다.
순간, 그녀의 망막에 목리원의 잘생긴 얼굴과는 안 어울리는 참 못생긴 얼굴이 겹쳤다.
어려워도 괜찮소. 협은 본디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자에게 얼굴을 비추는 법이니.
염소소에게서 끌끌대는 웃음이 삐져나왔다.
“…꼭 빼닮았구나.”
염소소는 거듭 생각하고 말았다.
목선오가 꼭 저 같은 놈을 만들어놨다고.
*
느지막한 저녁이었다.
권표월은 하루의 업무를 모두 끝낸 후 숙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내일 있을 일과를 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곧 분기의 끝, 인사평가가 있었다.
이번 분기의 실적은 충분히 채웠으나 다른 대주들이 이보다 못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즉, 더 많은 실적이 필요했고 더 완벽한 관리가 필요했다.
‘내일이면 비무인가.’
그것을 떠올린 순간 권표월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순진한 표정으로 짙은 아쉬움을 토해내던 미남자.
목리원이었다.
권표월은 그 얼굴을 떠올리자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본인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모르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권표월은 피식 웃었다.
‘…좋을때지.’
세월이 야속하다.
강자와의 비무에 그저 기대감을 품고 앞으로 제게 펼쳐질 미래를 꿈꾸던 시간이 제게도 있었을진대, 이젠 더 이상 그런 시간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에 안타까워진다.
협을 잃은 것은 아니다. 아직 가슴속에 타오르는 열정은 그 시절과 같았고, 이루고자 하는 이상은 마음 한켠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계산해야 하는 것은 생겼다.
다만 열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검을 휘두르는 일의 무게를 말하고 싶다.
좀 더 정의로운 검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이르고 싶다.
그러기 위해 무명이 필요하다. 무명을 위해서 놓아야 할 열정이 있다.
목리원과의 비무는 분명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이치에는 맞지 않았다.
권표월이 그리 스스로를 다독이며 걷던 중이었다.
“금검 대협.”
권표월의 앞길을 가로막는 이가 나타났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무렴, 직전까지 떠올리던 사내가 아니던가.
“…묵룡?”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소?”
목리원이 포권을 취한 채 부드럽게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