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66화 (66/334)

〈 66화 〉 팔장 ­ 친선 비무 (1)

* * *

창단식은 뜻밖의 만남과 함께 끝났다.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날, 용봉단의 제1 연무장엔 사뭇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다시 인사하겠네. 내 오늘부터 자네들 교육을 맡을 강소소라 허이.”

염소소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것에 목리원 또한 어여쁜 미소로 화답했다.

목리원은 이틀 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장은 백운이 놈에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편이 도리어 좋을 게야. 편견 없이 널 바라볼 수 있어야 정체를 밝힌 순간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할 테니.

염소소의 말은 갈피를 잃었던 목리원에게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녀를 향한 목리원의 시선엔 어쩔 수 없는 감사함이 떠오르는 것이다.

당화서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그 태도를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아무렴, 혈사의 최전선에 있었던 전대 고수란 것은 목리원의 기준에서 존경심을 표하기에 충분한 업적이 아니겠는가.

“자, 들은 대로 나는 자네들에게 암행의 기본에 대해 알려줄 것일세. 각자 말해보시겠나? 자네들이 암행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염소소의 말에 당화서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조리있는 어투였다.

“신분과 얼굴, 그리고 암행지를 오게 된 경위의 조작입니다.”

“훌륭하구먼. 다른 사람들은?”

“암행지의 주민들과 친해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갈산의 말이었다. 그의 얼굴 위론 특유의 족제비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은 꽤나 좋은 정보가 되지요.”

강호가 이르길 괴룡(??).

제갈산은 정체를 숨기고 움직이는 일이 많은 만큼 암행의 핵심이 되는 점을 짚고 있었다.

염소소가 흡족하게 웃었다.

“아암, 제갈 놈 자식이라 그런가 머리가 아주 비상허이.”

“과찬이십니다.”

“자, 그럼 다음은 누가 말해보겠나.”

돌연 공간에 침묵이 떠올랐다.

남은 넷의 단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떠오른 침묵이었다.

염소소의 고개가 기울었고, 당화서의 입에선 한숨이 삐죽 삐져나왔다.

와중, 남궁진천이 당당히 어깨를 펴고 말했다.

“목격자의 몰살.”

“목격자가 없게 만드는 게 암행이란 생각은 안 허나?”

“….”

그대로 침몰했다.

염소소는 껄껄 웃었다.

“즈그 할애비를 꼭 빼닮았구나.”

저것이 욕일까 칭찬일까.

남궁진천은 그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에 빠졌다.

그런 중 일운이 말했다.

“으음, 아무래도 무력을 숨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적을 방심하게 해서 끌어들인 후 잡아 고문이라도….”

“방법 자체는 그럴싸 하네만. 자네는 스님이 맞긴 한가?”

“….”

일운이 침몰했다.

그것에 혜운이 깔깔 웃자, 염소소가 그녀를 바라봤다.

혜운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미인계라도 쓰죠. 원래 남정네라는 것이 침대 위에선 수다쟁이가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염소소는 참 많은 말이 떠올랐으나, 그중 무엇도 내뱉지 못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외면이었다.

“…그래, 우리 묵룡께선 어찌 생각하시나.”

염소소의 얼굴엔 그제까지 없던 따스함이 깃들었다.

그것에 힘입은 목리원은 자신감에 가득 차 크게 외쳤다.

“죽림이랑 외투를 둘러야 하오! 검은색이면 더욱 좋소! 아! 그리고 웃을 땐 입꼬리만 올려서 웃어야 하오! 그래야 무게감이 있어 보이오!”

물론, 내뱉는 말이 정상적일 리는 없었다. 목리원은 철저히 ‘강호협객전’스러운 답을 내뱉었다.

당화서는 새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화서는 죄송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염소소는 지그시 웃었다.

“다들 엎드려 뻗치시게.”

염소소는 생각했다.

임무의 하달은 늦어도 한 달 내.

이들을 빠르게 교육하려면 회초리보다 좋은 것은 없을 터라고.

*

염소소의 교육은 혹독한 면이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기초가 있는 당화서와 제갈산은 열외 되었으나, 나머지 넷의 단원은 그야말로 목숨줄이 오가는 상황에서 교육을 들어야 했다.

주로 상황극이었다.

염소소는 마을의 노파인 척 단원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할 때면 끝이 뭉툭한 비수를 쏘아냈다.

겁주기용 비수가 아니었다.

실제로 가장 많은 오답을 냈던 목리원과 남궁진천은 전신이 멍들어 푸르딩딩하게 부어 있었다.

염소소는 감탄했다.

“…자네들은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어떤가 싶네.”

그래도 오성은 뛰어난 것 같은데 하는 짓은 어찌 이리 똑같이 멍청할까.

아니, 똑같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리라.

목리원이 틀리는 부분은 항상 대화였다. 목리원은 신이 나서 제 목적을 다 불어버렸다.

남궁진천이 틀리는 부분은 상대의 비위를 맞춰주는 상황. 남궁진천은 허리를 굽힐 줄 몰랐다.

“묵룡은 그렇다 쳐도 검룡 자네는 왜 그러나? 예절이라면 어려서부터 교육받았을 것 아닌가.”

“남궁의 후계는 허리를 굽히지 않소.”

“그래, 내가 잊었구먼. 남궁혁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제대로 된 교육을 했을 리가 없지.”

“태상가주를 모욕하는 것이오?”

“네 욕이다 멍청한 놈아.”

남궁진천의 눈이 부릅 뜨였다.

“눈을 왜 그따위로 뜨는고? 왜? 생사결이라도 해주리?”

남궁진천의 눈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아직 이길 수 없다.’

남궁진천은 언젠가 자신이 저 노파보다 강해질 것을 알았지만, 아직은 싸우면 필패라는 것을 알았다. 용봉지회의 결승에서 얻은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교만하지 않고 언제나 정진.

남궁진천은 언젠가 이 수모를 톡톡히 갚아주겠다는 마음을 속에 띄워 올렸다.

그는 상대가 노인이라 한들 봐주는 법이 없었다.

염소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선이 향한 곳은 당화서가 있는 방향.

당화서는 또 얼굴을 가린 채 사과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물론 뭐가 죄송한지는 본인도 몰랐다.

*

교육이 이어진 지 어느덧 사흘. 주로 용봉단 내에서만 움직이는 단원들이었으나 이제 그들 또한 무림맹의 일부로서 일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임무의 하달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이전에 잡혔던 일정.

“이틀 뒤면 백검대와의 비무입니다.”

바로 친선 비무였다.

단순한 비무는 아니었다. 친선 비무는 곧 각 단과 대의 서열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경쟁의 장.

여러 특혜를 받고 있는 용봉단인 만큼 그곳에서 실력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맹 내부에서의 입지가 애매해지는 상황이었고, 당화서는 그것을 중점적으로 피력했다.

“백검대에서 나올 무인의 수는 저희와 같이 여섯입니다. 예, 백 명 중 여섯 말입니다. 최정예가 나온다는 말이겠지요.”

단원들 또한 진지한 기색이었다.

하나 이 순간만큼은 당화서도 걱정을 더 하지 않았다.

‘무력 하나는 출중한 인간들이니.’

비무 만큼에서는 훌륭한 성과를 내줄 것이다.

“대진표는 어찌 짤 것이오?”

목리원이 물었다.

당화서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정보가 없습니다. 무릇 친선 비무라 함은 대진표부터가 경쟁에 포함되는 면이 있으니 이 또한 저희가 고려해야 할 사항 중 하나입니다.”

그리하며 한 마디를 더했다.

“아, 그래도 승부의 방식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오! 무엇이오?”

“연승전.”

그 말에 단원들의 몸이 들썩였다.

연승전이라 함은 비무의 승자가 계속해서 다음 승부를 이어 나가는 방식의 승부. 즉 대진 순서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는 형태란 말이었다.

언제나 주인공으로 살아온 단원들인 만큼, 이들 모두가 대진 순서에서 좋은 차례를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선봉은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일운이 손을 들었다. 선봉은 곧 가장 먼저 비무대에 오르는 사람을 뜻하는 말.

일운은 가장 먼저 승부에 나서 최대한 많은 승수를 챙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나 그런 마음을 가진 게 어디 일운 뿐이겠는가.

“나도! 나도 선봉에 서고 싶소!”

“제가 설 건데요.”

“역시 선봉은 내가 낫지 않겠나? 내가 단번에 쓰러져서 적들을 방심시키는 역할을 하겠네!”

차례로 목리원과 혜운, 그리고 제갈산이었다.

제갈산은 비무에서 좋은 성적을 보일 마음이 없었다.

“응? 누님, 전략적으로 봤을 때 나를 버림패로 쓰고 상대 패 하나를 까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오.”

“…무인이 비무를 피하는 게 아주 자랑이구나?”

“강자는 힘의 삼 할을 숨기는 법이지!”

“숨길 힘은 있고?”

“없소!”

제갈산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그것에 당화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나 그것이 마냥 머리 아픈 기색은 아니었다.

사실만 따져보자면 그랬다. 제갈산의 방책은 전략적으로만 보면 꽤 좋은 수단이었다.

아무렴, 버림패라는 것은 어차피 계속 선수가 보이는 중간 보다는 앞으로 빼내 전략을 하나라도 더 캐는데 이용하는 게 맞지 않겠나.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음, 저는 제갈산을 선봉에 세우는 게 좋다고 봅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반론은 없었다.

이들의 목적은 승수를 챙기는 것.

그런 만큼 제갈산이 첫 상대를 알아주는 방책을 사용해주는 것은 도리어 좋은 일이었고, 그에 따라 그다음 차례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내가 나가면 다른 분들은 다 쉬어도 되오! 내가 다 이기고 오겠소!”

“목 시주님, 상대를 얕잡아보는 건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요. 두 분 다 가만 계셔 보세요. 제가 먼저 나가겠다니까?”

분위기는 순식간에 시장통이 되었다.

당화서는 소리를 높이며 땡깡을 부리는 목리원과 혜원, 그 사이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 우직하게 제 주장을 펼치는 일운을 보며 뒷골이 확 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런 중 제갈산은 곁에 있던 남궁진천에게 물었다.

“남궁형은 순서에 관심이 없소?”

“나는 마지막이다.”

“음?”

“강자는 함부로 나서지 않는 법.”

남궁진천은 무심한 표정으로 쌈박질을 하는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에 제갈산은 무심코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 논리면 목아우가 마지막 아닌가?’

물론 생각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렇게 쌈박질이 거칠어지고 서로 감정까지 상하기 직전이 되던 와중.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당화서가 외쳤다.

“그만! 그마안­! 순서는 뽑기로 정합니다!”

시원할 정도의 상황 정리였다.

그녀의 화난 기색에 단원들은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수긍했다.

이후 시작된 뽑기.

목리원의 차례는 끝에서 두 번째였다.

그는 뽑기 운이 그리 좋지 않은 사내였다.

*

같은 날의 오후.

목리원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당화서와 맹을 걷고 있었다.

“…뽑기는 조작된 것이 분명하오. 아무튼 그렇소.”

“또 그 소리이십니까.”

“그렇지 않소! 어떻게 가장 마지막에 뽑은 내가 가장 안 좋은 패를 가져가는 것이오! 소저도 참 너무 하오. 관심없는 척 하더니 두 번째 순서를 한번에 쏙 뽑아버리는 게 어디 있소!”

당화서는 킥킥 웃었다.

억울하다는 듯 울분에 차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도 왜인지 어여뻐 보이는 이유였다.

“그리 말해도 안 바꿔줄 겁니다.”

“에잉….”

목리원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당화서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래도 목 소협 차례까지 가긴 할 겁니다. 저는 1승만 챙기고 내려올 심산이고, 저쪽의 대장은 금검 대주일 것이 분명하니 일운 스님과 백봉도 중간에 내려오게 되겠지요.”

“금검 대협이 나오는 것이오?”

“예, 친선 비무에서 단주와 대주의 참여는 필수입니다. 어느새 그런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하더군요.”

“오오…!”

참 저리 기뻐했다 슬퍼했다 하기도 바쁘지 않을까.

당화서는 부지런한 목리원의 감정선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 걸음을 계속 옮기던 중이었다.

“…아, 단주.”

복도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다부진 인상과 우직한 주름.

그리고 허리에 매단 검집이 금색으로 빛나는 이는 바로 백검대의 대주, 금검 권표월이었다.

“여기서 보게 되는구려.”

그가 지그시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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