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65화 (65/334)

〈 65화 〉 칠장 ­ 무림맹, 창단 (8)

* * *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겠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사백운은 그 흉악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긋한 미소와 함께 남궁진천에게 말을 걸었다.

“검왕께선 잘 계시오? 내 찾아뵙지 못한 지 꽤 되었구려.”

“예.”

남궁진천은 그리 말하곤 술잔을 들었다. 그렇게 더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술잔을 입앞으로 가져다대는 순간, 당화서의 흰자위로 핏발이 섰다.

‘대답 길게 해라.’

그런 의미를 가득담은 눈초리에 남궁진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직후 퉁명스러운 얼굴로 술잔을 내려둔 남궁진천이 이어 말했다.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말로는 강호를 유람하실 계획이라 들었습니다.”

“오! 역시 검왕이시군! 내 옛 생각이 나오. 검왕께선 그리 혼란한 와중에도 비무를 즐기던 분이셨지.”

사백운의 미소에 당화서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이로써 위기 하나를 넘겼다. 이런 식으로 계속 부드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면 될 터.

“아, 그러고 보니 원명 대사께서는 어찌 지내시나?”

다음 타자는 일운이었다. 일운은 사백운의 것과 똑 닮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를 이어갔다.

그렇게 일운의 차례가 끝나고, 혜운과 제갈산의 차례가 끝나고서야 드디어 당화서의 차례였다.

“독봉은….”

사백운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당문과는 관계없는 외인이라고 해도 무림맹주. 당화서의 사정 정도는 훤히 꿰고 있는 만큼 그녀에게 가문에 대해 묻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이다.

당화서는 쓰게 웃으며 사백운의 말을 받았다.

“이리 맹에 힘을 보탤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런가. 내 일정이 바빠 자주 찾지는 못하겠지만 언제나 응원하겠네.”

사백운은 그리 말을 마쳤다. 다만 예의로 하는 말이라기엔 그 기색이 꽤나 진중했다.

당화서에겐 옅은 감동을 주는 태도였다.

이어 사백운의 시선이 향한 곳은 목리원이 있는 자리. 순간 사백운의 기색이 달라졌다.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보다 더한 호의가 그의 얼굴에 걸린 것이다.

“내 처음 뵙는구려. 자네가 바로 안휘를 뒤집어놨다는 묵룡이겠지? 이리 만나게 되어 기쁘오.”

목리원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의 호의에 상대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떠오른 탓이었다.

하나 드러낼 수는 없는 일. 목리원은 최대한 밝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저야말로 맹주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인 것을.”

목리원 답지 않은 진중한 태도였다. 이는 다른 단원들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태도였다. 그렇지 않겠나. 저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인간이 다른 사람도 아닌 무림맹주를 보고도 잔잔한 태도를 보이니 기이함이 먼저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주로 목리원에게 호기심을 품은 사백운이 질문을 잇는 형태였다.

“듣자 하니 그리도 무재가 대단하다지. 사문은… 아, 미안하네. 이제껏 밝히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이해해주게. 내 백도 무림에 자네와 같은 이들이 나올 때면 영 즐거운 기분을 참기가 힘들어서 말일세.”

사백운의 태도는 어찌 당연하다 말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 용봉의 자리나 용봉지회의 우승자라 하면 명문에서 나오는 것이 당연한 기조 속에서 송곳처럼 튀어나온 영세 문파의 고수가 아닌가.

정파 무림 전체의 질적 향상을 생각해야 하는 입장에서 목리원은 참으로 기꺼운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만큼 사백운의 질문은 길게 이어졌다. 반대급부로 목리원의 태도는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그런 기이한 분위기가 한참이나 이어지던 와중, 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노파가 말을 내뱉었다.

“맹주, 이제 슬슬 이 늙은이도 소개해주어야 하지 않겠남?”

“아, 내 정신 좀 보게나. 미안하오.”

사백운이 ‘아차’하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에 단원들의 시선이 노파를 향했다.

“내 이분을 소개 시켜드리기 위해 데려왔건만 그만 깜빡 잊어버렸군. 미안하네. 요즘 나이가 들어서 말일세.”

단원들 모두가 느꼈다. 사백운이 ‘이분’이라 칭할 정도면 보통 사람은 아니리란 것을.

“강소소 대협이네. 혈사가 있던 날 함께 전장의 선봉에 섰던 전대의 고수시지.”

“아…!”

당화서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감탄사를 흘렸다.

“혹시 저희 단에 자문으로 오신다던 분이 이분이신 겁니까?”

“잘부탁허이.”

가명으로 강소소라는 이름을 쓴 살성 염소소가 웃었다.

당화서는 뒤늦게 단원들에게 설명했다. 막 창단된 단인 만큼 여러 교육을 위해 외부에서 자문이 오기로 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이 강소소라는 노파라는 것 등을.

단원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으나, 그럼에도 그 속에 부정적인 기색은 없었다.

전대의 고수라고 소개했음에도 눈곱만큼도 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 오묘함에서 그녀가 초월지경에 다다른 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초월지경의 고수에게 받는 교육이라니, 이것은 아무리 명문이라 해도 쉬이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와중 염소소의 시선이 목리원을 향했다. 그녀는 아직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목리원의 모습에 지긋이 웃으며 슬쩍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는 없었다.

전음입밀(?音??).

무인이 은밀하게 말을 전할 때 사용하는 잡기였다.

­자리가 끝나면 전각 뒤로 나오거라.

목리원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는 화들짝 놀라 염소소를 바라봤으나, 염소소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이어지는 것은 사백운의 설명이었다.

“듣기나 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앞으로 자네들이 맡을 임무는 첩보나 잠행과 관련되어 있을 걸세. 이분이 그쪽으로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니 부디 좋은 공부가 되길 바라네.”

뒤로도 많은 대화가 오갔으나 목리원의 시선은 염소소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나 염소소가 두 번 다시 목리원에게 시선을 주는 일은 없었다.

‘…대체.’

누구길래 전음까지 보내며 말을 거는 것일까.

목리원의 속엔 그런 의문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

“내 잠시 볼일 좀 보고 오겠소!”

연회가 끝난 후, 그리 말하고 단원들 사이에서 나온 목리원이 전각 뒤뜰로 향했다.

그곳엔 먼저 와있던 염소소가 의자에 앉아 들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왔는고?”

염소소의 시선이 목리원을 향했다. 그녀의 얼굴 위로 피어나 있는 것은 퍽이나 다정한 미소였다.

목리원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하며 포권을 취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뭘 선배까지야.”

염소소가 끌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하며 목리원에게 다가갔다.

염소소는 원체 소담한 인상과 작은 덩치 탓에 목리원의 명치에나 겨우 정수리가 닿을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특유의 여유로움 탓에 왜인지 거대하게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목리원의 속에 긴장이 차올랐다. 이 강호에서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전대의 고수. 그리고 자신을 아는 고수.

이에 그녀가 스승인 목선오의 지인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떠오르고 만 것이다.

목리원의 상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 목가 놈은 잘 지내는고?”

목리원은 헛숨을 들이켰다.

‘…알고 있는 분이다.’

목선오에 대해, 목선오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천살성에 대해.

그녀는 검왕 남궁혁과 같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일 터였다.

그것에 목리원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혹, 존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목선오와 관련 있는 전대의 고수라면 마일석이 말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한데 강소소라는 이름은 목리원에게 너무 생소했다. 그러니 답은 하나인 것이다.

이 노파가 쓰고 있는 ‘강소소’라는 이름은 가명이라는 것.

“끌끌, 꽤 눈치가 빠르구나.”

염소소가 들썩거리며 웃었다.

“그래, 그 거지 놈이 날 무어라 소개하더냐. 살객? 아니면 탕녀? 그것도 아니면 흑도?”

“…아!”

목리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살객, 탕녀, 흑도. 마일석이 이른 것 중 이 모든 것에 해당하는 여인이 있었던 까닭이다.

“살성…!”

“오, 제대로 불러주는 게냐.”

목리원의 기색이 밝아졌다. 아니, 밝아졌다 정도가 아니라 웃음꽃이 피었다.

살성 염소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익히 들어왔던 까닭이다.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 그년이 없었다면 네놈은 살아서 이 강서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네놈을 살리는 데에 찬성했던 네 명 중 하나가 그 망할 흑도였으니.

제 처우를 결정짓던 이들 중 찬성에 표를 던진 넷 중 하나. 넷의 반대와 둘의 중립, 그리고 셋의 찬성이 나온 순간 최종적으로 결정권을 쥐었던 여인.

“은인을 뵙습니다!”

살성 염소소는 목리원의 은인이었다.

목리원이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하고 싶었던 감사의 말이 너무 많아, 그것을 갑작스레 정리하려니 절로 그리된 것이다.

염소소는 그런 목리원의 모습에 흐뭇한 듯 미소를 지었다.

“참 곱게도 자랐구나. 목가 놈 젊을 때랑은 아주 딴판이야.”

“스, 스승님 말입니까?”

“그래, 거지 놈이 말해주지 않더냐? 목가 그놈이 젊었을 땐 원체 추하게 생겨 추룡(??)이라는 별칭까지 있었다고.”

목리원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 홱홱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 거짓일 겁니다! 스승님은 그리 노인이 되셨음에도 호쾌함이 느껴지는 외모가 아닙니까! 젊었을 때는 분명….”

목리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할 말이 궁한 탓이다.

당연했다. 실제로 젊을 적의 목선오를 본 염소소와 그저 늙은 얼굴만 봐온 제 주장 중 더 신빙성이 있는 게 어느 쪽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아니겠나.

염소소는 차마 무어라 말을 더하지 못하는 목리원의 모습에 끌끌 웃다, 이내 장난스레 물었다.

“그래, 그래서 목가 놈은 잘 지내느냐는 질문의 답은 언제 줄 것이냐?”

“아, 잘 지내십니다! 떠나기 전엔 작은 텃밭을 만들어 소일거리에 열중하셨습니다!”

“거 참 안 어울리는 취미구나.”

목리원은 아직도 허둥대는 채였다.

갑작스러운 은인과의 만남과 그 은인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까닭이다.

이후에야 목리원은 겨우 그런 말을 꺼냈다.

“…제가 감사하는 말씀을 먼저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감사 말이냐?”

“걸왕께서 선배님의 이야기를 하실 때면 다짐했던 것이 있습니다.”

“음?”

“선배님께 제게 생을 허락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목리원은 아직도 포권을 한 채였다.

고개는 깊숙이 떨어지고 있었다.

“선배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혈사가 끝나던 날 목숨을 잃었겠지요. 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도 모르고 삶을 끝맺었을 겁니다. 그리하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리 말한 목리원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덕에 저는 이다지도 넓은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이는 짐승이라, 협을 모르는 사마외도라.

그런 가르침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아온 목리원은 드디어 제 은인 중 하나에게 마음속에 품어왔던 말을 전했다.

그것에 염소소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다 곱게 휘었다.

“뭘 감사까지 하고 그러느냐.”

“당연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저 내켜서 한 일이다.”

염소소는 그리 말하곤 목리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목리원의 상체를 일으켰다.

“한데 말이다. 그리 감사하는 사람치곤 구해준 보람이 없게 사는구나.”

“…예?”

목리원의 얼굴 위로 의문이 맺혔다.

염소소는 끌끌 웃으며 말했다.

“직전 연회 말이다. 왜 그리 기가 죽어있었던 게야.”

목리원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건….”

“백운이 그놈이 널 미워할 것이 두려웠더냐?”

“….”

“왜 널 미워할 것으로만 생각하는 게야.”

목리원의 얼굴 위로 곤란함이 스쳐 지나갔다.

목리원으로선 그랬다. 정도를 위해 평생을 일해온 사백운을 마주하며 그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운 것이다.

염소소는 그런 목리원의 모습에 작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인석아.”

“…예.”

“무에 그리 잘못했다고 그리 기가 죽어있어. 너는 목가 놈의 자식이 아니더냐. 협객이 되려는 사람이 아니더냐.”

염소소는 목리원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재차 결심했다.

'원래 이리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만.'

아무래도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론 안 되겠다고.

“목가 놈이 항상 하는 말이 있지 않더냐. 죄짓지 않은 이는 도망칠 필요가 없다고.”

목리원은 아직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 또한 죄가 아닌 협의를 쌓으려 하는 아이였다.

한데 그런 아이가 천성 탓에 미움받을 것을 먼저 걱정한다니 얼마나 마음이 아린 일인가.

그 얼마나 속이 상하는 일인가.

­살객이면 뭐 어떻소. 그 검이 사특한 이들을 향한다면 그 또한 협인 것을.

염소소는 제게 살아갈 희망을 불어넣어 줬던 이의 제자가 이리 기죽어있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네 처우를 결정하는 날, 나는 자라난 네가 어떤 이일지 확인하고 결정을 내리겠다 말했다. 혹여 살귀로 자라난다면 내 손으로 직접 너를 베겠노라 일렀다.”

그리고 그 답은 이미 나왔다.

“그리고 나는 너를 인정했다. 너는 살귀가 아닌 협객으로 잘 자랐어. 그러니 지레 겁부터 먹지 말거라.”

염소소는 그리 말하고 씨익 웃었다.

“사백운 그놈은 겁쟁이다. 하지만 협을 아는 놈이다. 그러니 당당히 어깨를 펴고 증명하거라. 천성은 너를 결정짓지 못했다는 것을. 너는 엄연한 협객이 되었다는 것을.”

그 말에 목리원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염소소는 그런 목리원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그것을 도와주마.”

은혜에는 은혜로.

저 사천의 당문에서나 외치는 말이었으나, 또한 이 강호의 생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었다.

염소소는 그저 그 말을 따르는 것이다.

­빚 말이오? 내게 갚을 필요는 없소. 그저 언젠가 당신과 같이 협을 고민하는 이가 나온다면 그 후배를 조금 도와주시오. 그거면 될 것 같소.

몇십 년의 해묵은 은혜라, 염소소는 목선오 본인이 아닌 제자가 강호에 나오고서야 겨우 그것을 갚을 기회를 얻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