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칠장 무림맹, 창단 (1)
* * *
호북성에서 무한에 가기까지는 또 일주일이 걸렸다.
그간 일행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져 있었다.
다른 것보다 가장 우울했던 목리원이 기운을 차린 게 컸다.
분명 곽칠과의 대화에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겠으나, 당화서와 제갈산은 구태여 그것을 묻지 않았다.
아무렴,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보단 목리원이 기운을 차렸단 사실이 더 중요했던 까닭이다.
“이곳이 무한의 무림맹이구려…!”
목리원은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무한의 중심을 바라봤다.
그가 바라보는 끝에는 목리원이 이제까지 봐온 것 중 가장 커다란 전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각의 대문에 멋들어진 필체로 쓰인 이름이 있었다.
백도 무림맹(白? ???).
목리원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당화서는 그 모습에 작게 웃으며 말했다.
“바로 갈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는 다 하셨습니까?”
“암! 어찌 이곳까지 와서 망설임을 더 품을 수 있겠소!”
활기찬 목리원의 말에 제갈산 또한 껄껄 웃었다.
“음, 아마 단을 만드는 일은 우리 예상보다 더욱 쉬워질 걸세. 아니, 저쪽에서 먼저 부탁해올 수도 있겠구먼.”
“응? 그건 왜 그런 것이오?”
“마인이 나오지 않았나. 무림맹의 분위기가 평시와는 다를 걸세.”
목리원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는 심각한 낯을 만들며 이어 말했다.
“…그랬지. 마인이 나왔소.”
다시 혈사가 쓰일지도 모르는 순간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목리원은 이어 고개를 저으며 다짐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아니, 혈사가 또 일어나게 두지는 않을 것이오. 그것을 위해 배운 검이니.”
이젠 다시는 같은 이유로 흔들리지 않으리라.
목리원은 그리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갑시다!”
묵룡 목리원.
그리 불리는 이의 무림맹 입성이었다.
*
오늘의 무림맹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지난 용봉지회 이후 내내 행적이 묘연하던 묵룡과 괴룡, 그리고 독봉이 바로 이곳에 나타난 까닭이다.
당연 반가운 소식이었다.
용봉지회때부터 은연중 들려오던 이들의 입성 소식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었으니 이들로선 반갑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나.
근래 곳곳에서 마인이 목격되기 시작하며 어두워졌던 맹의 분위기는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가벼워져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런 중 나선 이가 있었다.
“다행이군. 안 그래도 전력 보강에 힘써야 할 순간이었다.”
맹의 기다란 복도를 걸어가는 것은 중년의 남자였다.
그의 인상은 무림맹의 무인이라기 보단 저 어딘가의 학사를 연상케 하는 유약한 형태였다.
하나 그저 학사라 할 수도 없는 것이, 그의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내기나 눈빛에 깃들어있는 날카로움은 분명 존재했었다.
“군사님, 직접 가시는 겁니까?”
“용봉이다. 내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느냐?”
그리 말한 군사가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고르다, 이내 한마디 말을 더했다.
“…게다가 조카 놈까지 왔다는데 한 번은 봐야지.”
“허허….”
군사의 말에 그를 보좌하던 이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아는 것이다.
무림맹의 군사 자리에 있는 이가 혈육의 정에 이끌릴 정도로 다정한 이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제 가문의 이름에 먹칠한 자를 썩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아마 수하들에게 그렇듯 군사는 조카의 가슴에도 비수로 푹푹 찌르는 듯한 말을 할 것이다.
무림맹 군사 제갈무연.
그는 괴룡 제갈산의 삼촌이 되는, 이 무림맹에서 가장 악독한 혀를 가진 사내였다.
*
무림맹의 접견실은 웅장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무한에서 가장 전경이 좋은 전각 중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만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남달랐던 까닭이다.
어디 그것뿐이던가.
접견실 안을 장식한 수많은 명사들의 흔적.
그리고 벽 한쪽에 빼곡히 자리해 있는 백도 무림맹의 업적.
이것은 평생 이런 광경과 거리가 있어 온 목리원을 주눅 들게 하기엔 충분한 것들이었다.
아니, 기실 목리원이 이리 주눅 들어 있는 이유를 따져보자면 다른 게 더 컸다.
“말은 들었다. 또 어디서 남편을 잃은 아녀자를 희롱했다지.”
“희롱이라니요. 거 무슨 섭섭한 말씀을. ‘협의’를 행한 것이지요.”
“네놈 협의는 미망인의 젖무덤에나 있나보구나.”
“실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보다 삼촌께선 주름이 많이 느셨습니다? 맹의 일이 쉽지만은 않으신….”
“누구처럼 뺀질거리지는 않아서 말이다.”
단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말싸움이었다.
아니, 이를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향해 웃고 있다.
말 또한 상대방을 걱정하는 듯한 형태로 해내고 있다.
그런 중 말속에 담긴 의미만이 이리 날카로우니, 목리원은 자연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목리원은 당화서에게 속삭였다.
“소, 소저. 말려야….”
“두십시오. 가족끼리의 해후가 아닙니까.”
저걸 해후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화서는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저 능글맞은 제갈산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는 일은 좀처럼 없는 까닭이다.
“목 소협도 지금 잘 구경해두세요. 이런 광경은 돈 주고도 못 봅니다.”
목리원은 우물쭈물하다 당화서의 말에 따랐다.
슬금슬금 굴러간 눈동자가 두 사내를 향했다.
군사 제갈무연은 평온한 안색이었다.
그 특유의 유약한 분위기가 너무나도 강해서 달싹이는 입술만 아니었다면 지금 말을 내뱉는 게 그라는 걸 모를 정도였다.
그것을 상대하는 제갈산 또한 마찬가지.
이마에 핏대가 서 있긴 하나, 원체 족제비 같은 얼굴이라 실실 미소를 띠니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할 일도 참 없으신가봅니다. 거 이런 시국에 저희 얼굴이나 보겠다고 이리 오고.”
“무림맹은 고수를 박대하지 않는다. 용봉씩이나 되면 내 직접 나설 이유가 되지. 아, 널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난 네가 용의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으니.”
제갈무연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본선 결승에도 못 가고 추하게 패배를 부르짖었다지.”
“어휴, 권룡은 역시 권룡이더구려.”
제갈산이 작위적인 기운을 가득 담아 껄껄 웃었다.
제갈무연은 그런 그를 보다 ‘흥’하고 코웃음을 치곤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얼굴 위로 떠올라 있는 것은 싱긋 웃는 미소였다.
“미안하오. 오랜만의 재회라 조카와 말이 조금 길어졌구려.”
“아, 아니오!”
목리원은 제게 화살이 돌아오자 바짝 굳어서 일어났다.
그리하며 포권을 취했다.
“목리원이오! 강호 동도들은 나를 묵룡이라 불러주고 있소!”
얼떨결에 내뱉은 말.
목리원은 한발 늦게 평소에 상상하던 말을 내뱉었다는 것에 신이 나선 얼굴을 붉혔다.
당화서는 그 모습에 싱긋 웃으며 따라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독봉입니다.”
제갈무연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독한 혀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도 혀를 써선 안 될 순간은 알고 있었다.
“군사 제갈무연입니다.”
제갈무연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직후 다시 자리에 앉아 말을 이었다.
“이곳까지 온 목적은 단의 창설을 위한 것이겠지요?”
무림맹은 정파 무림의 본산이었다.
그런 만큼 그 정보의 정점에 있는 그는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당화서와 당가 간의 갈등을, 그리고 그 묘한 알력다툼 사이에서 당화서가 할 만한 선택을.
당화서는 구태여 그걸 캐묻지 않았다.
이들이 제 입장을 잘 알수록 유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던 까닭이다.
“예, 처음엔 그저 입성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나 예까지 오는 여정에 의지가 더해졌습니다. 마인을 만나 참상을 겪고 나니 꼭 이곳에서 백도 무림의 본을 세우는 것에 힘을 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지 뭡니까.”
싱긋 웃으며 호기롭게 내뱉는 말은 당화서답지 않았다.
제갈산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목리원의 허리를 찔렀다.
목리원은 당화서가 멋있다는 듯 눈을 빛낼 뿐이었다.
“안 그래도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갈무연은 학자처럼 웃으며 말했다.
“첩보가 있습니다.”
마인이 나타났다.
비단 목리원의 일행이 만난 게 끝이 아니라 이 중원 강호 곳곳에서.
그저 마공에 손댄 마인이 아닌 소속을 가진 마인.
저 서부의 신강 너머 십만대산에서 내려온 악마들이.
“천마신교가 움직인 듯하더군요.”
천마신교(???).
3대 천마 이무백 이후 중원 강호에서 두려움으로 화한 이름이었다.
그들의 준동이 확정된 만큼, 중원은 지금보다 더욱 어지러워지리라.
“쉽지 않은 시국입니다. 그런 만큼 저희로서도 더 많은 영웅들이 필요하지요. 특히 용과 봉 같은 젊은 영웅들 말입니다.”
단순히 그들을 환영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눈치 없는 목리원조차 알 정도로 노골적인 기색이었다.
그 정도로 제갈무연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창설 계획 중인 단이 있습니다. 백도 무림의 젊은 얼굴이 될 단이지요.”
제갈무연의 미소가 짙어졌다.
“무림맹은 용과 봉을 모으고자 합니다. 그들로 새로운 단을 창설하고자 합니다.”
백도 무림에는 혈기와 희망이 필요했다.
“용봉단(???). 저희는 여러분께 그곳의 가입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지금의 무림에는 사성과 육왕의 뒤를 이을 이름이 필요했다.
*
소림의 깊은 내각.
권룡 일운은 가부좌를 튼 채 한참이나 명상하다, 이윽고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몸을 뒤로 돌린 채 고개를 깊이 숙였다.
“어인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그곳엔 고목 나무와도 같은 노승이 있었다.
하나, 그저 노승이라면 일운이 이리 깊게 고개 숙이지 않았을 것이다.
“맹에서 연락이 왔더구나. 내용은 들었더냐?”
“방장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지요.”
소림의 방장, 불성(??) 원명.
전대 무림맹주이자 현 백도 무림의 절대자 중 하나인 그가 웃었다.
“가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구나.”
노승의 얼굴 위론 장난기가 맺혀 있었다.
소년과도 같은 미소였다.
일운은 그것에 쓰게 웃었다.
“…속세에 이리 미련이 많아 부끄러울 뿐입니다.”
“가거라.”
일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의 얼굴 위론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원명은 그런 그의 기색이 기껍다는 듯 껄껄 웃었다.
“속세에 미련이 있으면 어떠하더냐. 그곳에 부처의 뜻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도 좋은 게다.”
궤변.
하나, 너무나도 달콤한 궤변이었다.
일운은 알았다.
지금 원명이 내뱉는 말은 다만 무림의 정의를 위한 것만이 아닌 제 욕심을 가엾이 여긴 이유도 있다는 것을.
일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다, 이내 젖어든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권룡 일운이 다시 속세를 나섰다.
*
사천의 아미산 금정봉.
무림의 구파 중 하나인 아미파가 있는 그 사찰에서, 혜운은 보따리를 짊어졌다.
‘더는 이렇게 못 살아.’
속세가 너무 그립다.
맛있는 밥도 그립고 신나는 분위기도 그립고 그 외의 많은 것이 그리웠지만, 가장 그리운 것은 그것이었다.
‘남자.’
남자가 그립다.
싱싱한 젊은 남자가.
마침 혜운에겐 좋은 변명거리가 있었다.
무림맹에서 제게 온 전서.
혜운은 그걸 빌미로 이곳에서 탈출할 심산이었다.
“운아, 어딜 가려고 하는 게냐?”
흠칫.
혜운의 몸이 떨렸다.
몰래 도망가려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스승이 소리소문없이 다가와 웃고 있었다.
혜운은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싸우면 필패.’
설득은 절대 안 먹힌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무림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오겠습니다아아앗!!!”
탓!
혜운은 도주했다.
빛살처럼 사라지는 혜운의 모습에 그녀의 스승은 껄껄 웃었다.
“안 보내준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모르겠구나.”
“괜찮겠습니까?”
그녀의 곁에 있던 여승이 물었다.
그것에 혜운의 스승은 말했다.
“놔둬 보거라. 남색도 저러다 질리겠지. 다~ 부질없다는 것은 겪어 봐야 아는 일이 아니겠느냐.”
주름이 자글자글한 비구니의 미소에 여승은 곤란한 듯 웃었다.
‘저 년이요?’
혜운이 밥은 굶어도 남자는 못 굶는 인간이란 걸, 아무래도 그녀의 스승은 잘 모르는 것 같다는 까닭이었다.
*
남궁세가의 연무장.
남궁진천은 검을 거두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노골적인 파괴의 흔적이 역력한 연무장 바닥이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초식은 모두 익혔다.
이 이상은 온전히 자신의 수련과 경험에 의해서만 완성될 터.
‘떠난다.’
남궁진천의 뇌리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푼수처럼 웃으며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검을 휘두르던 사내, 목리원이었다.
남궁진천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두 번은 지지 않는다.’
그의 눈엔 이제까지 있어 본 일 없던 강렬한 호승심이 서려 있었다.
“오라버니?”
어린 여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린 남궁진천의 눈에 들어온 것은 10살은 더 차이가 나는 어린 여동생이었다.
“소아야.”
남궁소아가 팔짱을 끼며 새침한 얼굴을 만들었다.
그런 중에도 뺨은 말갛게 타오르고 있었고 눈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 새침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떠나는 것이에요?”
주제에 하지도 않던 존댓말까지 하는 모습.
정확히 목리원을 만난 다음 날부터 내내 보이던 모습이었다.
남궁진천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궁소아가 벌떡 뛰려는 걸 꾹 눌러 참곤 말했다.
“그, 그럼 소아도 갈….”
“집에 있어라.”
남궁진천은 그리 말하고 남궁소아를 지나쳐갔다.
등 뒤에서 남궁소아가 울먹거렸지만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궁진천은 어린 동생의 철없는 사랑보다 제 검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제왕검형.
남궁진천은 새로운 무기를 들고 무림맹을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