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56화 (56/334)

〈 56화 〉 육장 ­ 표행, 인연 (6)

* * *

언젠가의 목선오는 말했다.

“원아, 무림에 발을 들인다면 말이다. 너도 언젠가는 사람을 베어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강호 무림은 검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세계인 만큼, 그 검 끝이 사람의 살갗을 뚫을 때가 있으리라고.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강호의 생리라고.

“그날의 네 상대가 누구일지 이 스승은 모른다. 추악한 악귀일 수도 있겠고, 혹은 어쩔 수 없이 악을 행한 자일수도 있겠고, 그저 광인일 수도 있다.”

“…그럼 저는 누굴 베어야 하나요?”

“누구도 베어내려 하지 말거라.”

어린 목리원은 그 뜻을 몰랐다.

목선오가 지그시 웃으며 내뱉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 당시의 그가 내뱉은 말은 그다지도 어려운 면이 있었으니.

“너는 다만 증명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거라.”

“증명이요?”

“네가 악하지 않다는 것을. 너의 검이 협을 위함인 것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휘두르거라.”

목리원은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알 것만 같았다.

“사람이 아닌 신념을 바라보며 검을 휘두르거라.”

그리하여 자세를 다잡았다.

패웅추가 쏘아져 나왔다.

목리원은 바닥에 발을 디딘 상태로 검을 끌어당겼다.

묵색의 기파가 첨예하게 벼려졌다.

그리고 쏘아져 나갔다.

성련문의 조사가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완성한 첫 번째 검식.

칠성극검(七???)이었다.

콰앙­!

패웅추의 관절부를 묵색 기파가 꿰뚫었다.

피가 튀었다.

패웅추는 눈을 크게 뜨다, 이내 ‘핫!’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목리원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내지른 검은 1초뿐이었다.

탓­.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재차 검을 이어낸다.

2초와 3초와 4초, 그리고 하반신을 노리는 5초부터 7초까지.

그 모든 식을 다 펼쳐 그를 몰아붙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신념을, 배운 것을, 다만 휘둘러야 할 형태로.’

목리원은 그 말을 되뇌었다.

칼끝이 살점을 파고들며 이는 감각을 외면하고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혈향을 외면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배운 것을 휘둘러야 할 형태로.’

목리원의 눈엔 보이고 있었다.

지금 찔러 들어가면 저 사내를 죽일 수 있을 빈틈과 약점이.

저 사내가 살기를 품은 채 제게 지르는 권의 궤적이.

그리고 그것들을 깨부수며 성장할 자신이.

하나 외면했다.

상대를 살해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검으로 배운 협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것만을 생각하며 기파를 터뜨렸다.

묵색의 기파가 응축했다.

검 위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물결과도 같은 흐름을 만들었다.

2식, 유성검(??).

성련문의 개파조사 되는 사내가 검을 수련하던 날 밤 우연히 마주한 유성을 검으로 형상화한 초식이었다.

명백한 쾌검이었다.

머리 위에서부터 곧게 떨어져 내리는 검이 일순 기다란 묵색의 실선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서걱­.

패웅추의 옷섬이 베였다.

그 아래 피부 위로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목리원은 이번에도 그것을 외면했다.

그리고 다음식을 이었다.

­원아, 성련문은 협객의 문파다. 성련신공은 협객의 무공이다. 우리는 검에 살의가 아닌 낭만을 담는단다.

화악­!

목리원의 몸 주위에서 흘러나온 기파가 주변을 장악했다.

3식은 기파를 몸에서부터 먼 거리까지 흘려보낼 수 있는 경지가 되어, 이제야 겨우 쓸 수 있게 된 식이었다.

­그러니 원아, 검을 휘두르며 급소를 보지 말아라. 살의를 보지 말아라. 너는 그저 이 검으로 행하고자 하는 것을 바라보거라.

패웅추의 몸이 굳었다.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하여 희열 어린 미소를 띄워 올렸다.

‘막아선 안 된다.’

이 초식은 막아서는 안 되는 초식이다.

지금부터 뻗어 나올 초식은 분명 ‘기공(??)’의 영역에 걸쳐있는 초식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기공을 통해 응수해야 할 것이었다.

패웅추의 마기가 들끓었다.

그것이 전신을 뒤덮고 그 너머까지 뻗었다.

와중에도 목리원은 굳은 얼굴로 검을 쏘아내고 있었다.

­조사께선 일 년 간 하나의 검식 만을 행하셨다. 하나, 그 검식에 새겨지는 의미는 저 하늘의 별자리가 기울어감에 따라 달라졌다고 하더구나.

넓게 퍼진 목리원의 기파가 흐릿하게 빛났다.

곳곳에 주변보다 옅은 백색으로 빛나는 점이 떠올랐다.

­조사께서 기록한 일지에는 그런 말이 적혀있었다. ‘계절과 시간이 변하는 것을 일러주는 열둘의 별자리가 있어, 나는 내 검의 성장을 눈치챌 수 있었다’라고.

묵색의 밤하늘 위로 떠오른 별이 발광했다.

­원아, 오늘부터 일 년간 너는 이 스승과 함께 그 별자리를 바라볼 것이다. 그것을 모두 눈에 새기거라. 언제라도 떠올린다면 그 모양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을 만큼.

목리원은 언젠가 매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망막에 새겼던 별자리를 재현했다.

검이 뻗어나갔다.

그것이 유독 투명하게 빛나는 점들을 스쳐지나갔다.

3식, 십이지검(?二?).

검에 스쳐 지나간 점들이 폭사했다.

콰아앙­!

긴 폭음이 일었다.

그런 중에도 목리원은 쉴 새 없이 초식을 이었다.

패웅추는 양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제 몸 주위로 두른 마기를 응집해 그 사이에 모았다.

절정지경의 끝에 다다른 무리였다.

무공의 경지가 정도를 벗어나 기파만으로 물리력을 행할 수 있게 되어야만 해낼 수 있는 기예.

기공(??).

패웅추는 찢어질 듯한 긴 미소를 띄워 올리며 저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는 백색의 점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둥글게 뭉친 기를 그곳으로 내던졌다.

마환투(???).

그가 언제나 들끓는 마기를 한 점에 모아 던져냈다.

목리원의 검과 패웅추의 환이 부딪쳤다.

이윽고 일대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

주변의 나무와 수풀이 죄다 짓이겨진 황무지.

그 한가운데에서 목리원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목리원의 처참한 꼴은 당연했다.

애초에 정타를 얻어맞은 상황에서 펼친 초식이었고, 그것 외에도 저를 괴롭히는 충동을 억제하며 펼친 초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초식을 펼칠 때보다 배에 달하는 부담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흙먼지가 비산하며 가려진 시야.

목리원은 그 어딘가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봤다.

이윽고 시야가 트였다.

“그럴싸하구나!”

그곳엔 패웅추가 두 발로 선 채 웃고 있었다.

패웅추 또한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그는 가슴 한가운데가 폭발에 짓이겨져 붉게 녹아내린 상태였고, 팔 한쪽은 걸레짝이라도 된 것처럼 너덜거렸다.

목리원으로선 절망적인 일이었다.

이제 정말 의지만으로 검을 휘두르기엔 몸 상태가 따라주지 않았으니.

여기서 전투를 더 이어갔다간 그만 본능에 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빠득­.

목리원의 이가 갈렸다.

그는 벌벌 떨리는 팔을 애써 부여잡으며 검을 고쳐 쥐었다.

패웅추는 그 모든 과정을 즐겁다는 듯 감상했다.

그리하곤 말했다.

“그게 협객의 검인가?”

목리원의 몸이 멈칫했다.

패웅추는 다른 공세를 더하지 않은 채 재차 물었다.

“그게 천살성을 억누르고 휘두르는 검인가? 응? 더 보여줄 것은 없나?”

패웅추는 그리 몸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기세를 죽이지 않았다.

그저 즐겁다는 듯 한 발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질문을 이었다.

그는 실로 유쾌한 기분이었다.

“재밌다! 주제에 발악하며 내지른 검이 그리도 파멸적인 것이! 그리도 공격적이면서도 살기는 담기지 않은 것이!”

목리원의 검은 그가 살아생전 마주한 검 중 가장 특이한 검이었다.

살기 없이 상대를 죽이는 검이라니, 그 역설이 패웅추에겐 너무나도 기껍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더 보여다오! 그것이 끝이 아닐 터다! 네놈이 그리도 자신한 협이지 않나! 어려운 길을 걷는 자가 협객이라고 하지 않았나!”

재차 패웅추의 마기가 들끓었다.

아직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 그의 한쪽 팔에 마기가 몰렸다.

목리원은 단전의 내공을 쥐어 짜냈다.

꽈드득­.

혈관이 짓이겨지는 듯한 소리가 목리원의 귓가에 울렸다.

이것은 내상의 징조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에 목리원의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순간.

“아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패웅추의 고개가 그 방향을 향했다.

목리원 또한 마찬가지.

하나, 목리원의 표정은 패웅추보다 심각했다.

‘곽 대인!’

들려온 비명소리가 낯익다.

이것은 요 며칠 교분을 쌓아온 곽칠의 비명이었다.

이변이 생겼다.

그런 생각에 목리원이 한껏 불안함을 토해내던 와중, 패웅추가 미간을 구기며 혀를 찼다.

“…에잉, 벌써 예까지 오면 어떡하나.”

그리하곤 마기를 죽였다.

이어 해낸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꽈직­!

그는 이미 걸레짝이 되어 있던 제 팔을 아예 뒤틀어 꺾어버렸다.

목리원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의 저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무얼 하는 거요.”

목리원이 날 선 어조로 그리 묻자 패웅추는 답했다.

“뭘 하긴, 놓아주는 것 아니냐.”

패웅추는 흥이 다 식었다는 듯 투덜거리며 말했다.

제 팔이 꺾인 통증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벌써 잡히면 안 되지. 아직 보지 못한 것이 많은데.”

패웅추는 그리 말하며 바지춤에서 신호탄을 꺼내 터뜨렸다.

직후 몸을 돌렸다.

비명소리가 들린 반대 방향이었다.

“조만간 또 보자! 묵룡!”

그리하곤 달려 나갔다.

목리원은 멍하니 그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 대협…!”

곽칠이 패웅추가 떠난 자리에 왔다.

그는 비명을 내지른 사람치곤 꽤나 멀쩡한 꼴이었다.

*

“대주. 실패입니까?”

“그래! 실패했다! 천살성이 생각보다 지독하더구나!”

돌아온 산채, 패웅추는 그리 말하며 너덜거리는 제 팔을 부관에게 보였다.

부관은 헛숨을 삼키며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 정도로 강했던 것입니까.”

“강했다! 하지만 내가 더 강했다!”

부관의 미간이 좁아졌다.

패웅추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패웅추는 끅끅 웃었다.

“생포가 목적이 아니었으면 이겼을 것이란 말이다!”

“아…!”

부관의 얼굴 위로 납득의 뜻이 떠올랐다.

패웅추는 그런 부관을 뒤로한 채 산채의 그나마 멀쩡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이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기에 미쳐 생사결만을 추구하는 그는, 신교의 명령보다 제 욕망을 우선시했다.

패웅추는 목리원을 당장 생포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수로 보였던 기공.

그리고 함께 뻗어내던 검과 그 속에 깃들어있던 의(?).

패웅추는 그것을 다시 보고 싶었다.

아니, 그저 다시 보는 것이 아닌 더 발전된 형태를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생포해선 안 되는 것이다.

묵룡은 더 강해져서 그 기이한 검을 완성해야 했다.

패웅추는 끌끌 웃으며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마기를 운용했다.

‘재밌다.’

한껏 즐거운 기색을 토해내며 혈관에 마기를 흘려보냈다.

무려 천살성의 주인.

그런만큼 그의 성장은 상상 이상으로 빠를 테니, 다음 승부를 위해서라도 자신도 더 강해져야 할 것이었다.

패웅추는 그런 생각으로 마기의 한계에 도전했다.

고오오­.

마기가 건물 안을 뒤덮는다.

그것을 넘어 산채에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그의 대원들은 변화를 느끼고 산채 주변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

권마 패웅추는 초절정에 도달했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