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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살검협-52화 (52/334)

〈 52화 〉 육장 ­ 표행, 인연 (2)

* * *

운성표국의 표행은 바로 다음날이 출발이었다.

애초에 이 도시에 큰 볼일이 없던 당화서로선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도시의 정문 밖.

당화서는 꽤나 큰 규모로 이어진 행렬과 그 가운데 굳게 밀봉된 짐마차들을 보며 목리원에게 말했다.

“여기서 약 열흘 정도를 가야 한다더군요.”

“열흘! 그럼 호북성에 도착하는 것이오?”

“예, 아마 큰일은 없을 겁니다. 산적이란 놈들도 제 손익을 생각하며 움직이다 보니 이리 거대한 행렬은 잘 건드리지 않지요.”

“이 근방이면 녹림패가 있다 들었소. 그 녹림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오?”

“그래봐야 흑도 아닙니까.”

“아하.”

목리원은 단번에 이해했다.

어느 이야기에서나 악당으로 나오는 녹림이 상대를 봐가면서 싸운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긴 했으나, 따지고 보면 그들도 흑도 무림인.

그들의 특성대로 손해가 되는 일은 하려 하지 않을 게 분명한 것이다.

“으음… 그럼 전투는 없겠구려.”

평화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목리원으로선 적잖게 아쉬운 일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가 동경하는 낭협과 같이 위기의 순간에 나서 검을 휘두를 일이 없단 말일진대.

“표행이라 해봐야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험한 일은 잘 없습니다. 그랬으면 이 직종에 종사하는 이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겠지요.”

“이해했소.”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하나 사고라는 것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일! 내 이리 표행에 삯을 받고 참여하게 됐으니 온 힘을 다해 경계할 것이오!”

당화서는 지그시 웃으며 답했다.

“장하십니다. 참으로 훌륭한 마음가짐이셔요.”

“흠!”

목리원의 얼굴에 뿌듯함이 감돌았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제갈산은 ‘역시 연인보단 모자 관계가 어울리는 쌍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순간, ‘둥둥’ 하는 북소리와 함께 행렬을 지휘하는 표두의 외침이 울렸다.

“그럼 표행을 시작하겠소!”

표행의 시작이었다.

*

표행을 시작한 지 이틀.

아직 행렬에 위기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내내 경계를 놓지 않았던 목리원에게는 약간의 지루함이 더해진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 목리원의 입장이었고 그를 구경하던 다른 무인들에겐 이번 행렬이 특별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저 평소와 같던 행렬에 바로 그 묵룡 목리원이 더해졌는데.

이번 세대 동안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 같던 검룡 남궁진천을 쓰러트리고 용봉지회의 우승자가 된 신예가 함께하니, 이들로선 심심할 틈이 없는 것이다.

“기도가 범상치 않구려.”

“그것뿐인가. 얼굴도 참… 묵룡이 웃을 때 독봉의 표정을 봤는가? 아주 홍당무가 따로 없더군.”

“억울하구만.”

“어쩌겠나. 세상이 이런 것을.”

그는 참으로 완벽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사내였다.

다만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예술품을 본 듯한 감상을 일게 했고, 혹여 날카로운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면 그 진지한 모습에 탄성까지 일게 했다.

다만 생김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무력도 출중하고 젊음까지 있으니 표국의 무인들로선 그에 대한 동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오해가 깨지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

동경이란 감정의 한 가지 특성 때문이었다.

바로 그것을 품은 대상에겐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하게 되고 그 대상이 보이는 의아한 모습도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것.

즉, 그런 말이었다.

“묵룡이 뺨을 붉히는군.”

“독봉과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오.”

“괴룡만 옆에서 고생하는구먼. 저 떨떠름한 표정 좀 보시게.”

세 사람이 헛소리나 하며 깔깔대는 모습도, 남들 눈에는 좋게만 보인다는 말이다.

“소저! 내 방금 엄청난 생각을 떠올렸소! 강호협객전 6장의 낭협 말이오! 어쩌면 그는 도법보다 권법이 어울리는 사내일지도 모르겠소!”

“그렇군요. 꽤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소? 힘을 숨겨야 한다면 무기를 들고 다니기보단 아예 주먹만으로 다니는 게 더 타당하지 않겠소! 낭협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는 권법가일 게 분명한 것이오!”

“목 소협은 상상력이 뛰어나시군요.”

“일리가 있지 않소?”

“꽤 재밌는 말이었습니다.”

목리원이 헛소리를 하면 그저 그것을 귀엽게 여긴 당화서가 대꾸해준다.

제갈산은 이게 대체 무슨 대화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린다.

이것이 지난 이틀간 오간 대화의 끝이었다.

오늘도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들이나 해내며 길을 옮기길 한창.

“여기서 쉬어가겠다! 야영을 준비하거라!”

표두가 그리 외쳤다.

당화서는 ‘아’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오늘은 야영인가 보군요. 하긴, 근처에 들를 마을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야영이라… 낭만이 있구려.”

“이것도 낭만입니까?”

“그럼! 나는 야영에도 낭만이 있다고 생각하오! 모닥불을 피운 후 그곳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그리고 술 한잔에 오가는 우정!”

목리원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낭만이오!”

목리원은 낭만에 취했다.

와중, 표사 몇 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천막을 치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잠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말.

그것에 목리원이 웃으며 거절을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 그보다 먼저 제갈산이 입을 열었다.

“아! 고맙네, 방해되지 않도록 구석에 가 있겠네.”

“예.”

목리원은 당황했다.

제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탓이었다.

제갈산에게 끌려가다시피 구석으로 온 목리원은 뒤늦게야 입을 열었다.

“제, 제갈형 이러면 안….”

“이게 맞네. 목아우.”

“무슨 말이오?”

“이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란 말입니다.”

의문에 답한 것은 당화서였다.

그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을 더했다.

“제갈놈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용의 별호가 지닌 무게를 생각하라고.”

“그건 그렇소만….”

“저들로서도 저희가 직접 천막을 치도록 두는 게 불편한 겁니다. 저희가 어딜 가서 ‘운성표국은 잠자리도 안 만들어주더라.’라는 말을 하면 곤란하니까요.”

“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

“없어도 저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목리원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나, 분노보단 의문이 진한 표정이었다.

“다르다니?”

“저들은 저희를 모르니까요. 또한 목 소협도 모르니까요. 해명하려 하기보단 익숙해지십시오.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런 설명을 해가며 직접 일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입니다.”

목리원은 그제야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긴 했다.

당화서의 말처럼 강호가 용을 향해 품는 감정이 특별하다면,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을 두려워 한다면 이런 일은 어딜 가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해명해가며 입씨름을 하는 것보단, 그렇게 감정을 소비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서로에서 더 마음 편한 일인 것이다.

“…내 또 하나를 배웠구려.”

목리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왜인지 용이라는 칭호가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에 절로 그리된 것이었다.

당화서도 제갈산도 그런 목리원을 이해하고 있었다.

태생이 명문이라 언제나 이런 대접을 받았으나, 그들 또한 이런 대접에 마음이 불편한 순간은 있어 왔던 까닭이다.

“…뭐, 정 불편하다면 상황을 봐서 돕는 걸로 하지요.”

“그래도 되겠소?”

“야영이 잦을 겁니다. 이제부턴 마을이 잘 나오지 않으니까요. 할 수 있다면 그리 하는 게 훨씬 옳은 일이지요.”

당화서가 웃으며 말을 내뱉자, 목리원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당화서의 손을 붙잡았다.

“고맙소! 역시 소저밖에 없소!”

흠칫­.

당화서의 어깨가 들썩였다.

꽤나 큰 목소리였던 터라, 근처에서 일하던 표사들은 목리원의 말에 ‘오’하는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훔쳐봤다.

당화서는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돼, 됐으니까 일단 나중에….”

“응? 알겠소!”

목리원이 싱글벙글하며 손을 뗐다.

그제야 당화서 또한 크게 심호흡하며 정신을 붙잡았다.

‘이렇게 갑자기 들어오면 어쩌자는 건지…!’

곤란하기 짝이 없는 순진함이었다.

당화서가 순간 차오른 열기를 흩어내려 훅훅 호흡을 내뱉는 중, 제갈산은 목리원에게 한 발 가까이 붙었다.

만약의 상황, 아예 당화서를 떨쳐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목리원이 도망갈 틈은 만들어주어야겠다는 그 나름의 선의에 의한 행동이었다.

*

달이 차올랐다.

오늘따라 유독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밤하늘의 별이 더욱 찬연하게 빛났다.

이런 날이면 목리원이 꼭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검무를 추는 것.

표행을 이어가는 와중이지만, 도저히 검무를 참을 수 없었던 목리원은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검무를 췄다.

사아아­.

묵색의 기파가 별빛을 반사했다.

그리하며 그 찬연한 빛으로 허공을 수놓았다.

언제나처럼 너무나도 느린 동작이었으나 딱 하나 다른 것이 있었다.

기파의 농도.

어느새 절정의 중입까지 오른 묵리원의 기파는 이제 시야를 다 가릴 정도로 짙어져 있었다.

검무가 이어지며 목리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사고는 이미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 검과 별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리 검무에 심취해있던 목리원은, 돌연 들려온 ‘부스럭’ 소리에 화들짝 놀라 검을 멈췄다.

“누구냐!”

자연히 입에선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시선 끝에 있던 이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자, 잠깐! 훔쳐볼 생각은 없었소! 미안하오!”

수풀 사이로 사내 하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목리원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아!’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표사님이 아니시오?”

운성표국 소속의 흰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삼류 무인.

분명 목리원의 기억에도 있는 사내였다.

사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목리원에게 말했다.

“미, 미안하오! 내 잠시 큰일을 보려고 나왔다가 웬 빛이 번쩍거리는 것에 홀려서 왔소! 수, 수련은 훔쳐보지 못했소! 근처에 오자마자 묵룡 대협이 알아차려서….”

횡설수설하는 사내의 모습에 목리원은 뒤늦게야 놀란 마음을 다스렸다.

“그랬구려… 나야말로 미안하오. 하긴, 이리 트여있는 곳에서 너무 소란을 피운 것인지도 모르겠소.”

무림인에게 수련을 엿보는 행위는 목숨으로 죄를 물어도 모자란 행위다.

분명 그런 말이 강호에 있긴 하지만, 목리원은 이리 야외에서 수련하는 경우라면 마냥 상대에게 죄를 묻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였다.

“형장은 이름이 무엇이오?”

“과, 곽칠이오….”

곽칠.

목리원은 그 이름에 맑게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반갑소. 나는 목리원이오.”

“이미 알고 있소. 내 어찌 묵룡을 모르겠소.”

사내가 힘없이 마주 포권을 취했다.

목리원은 그 모습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분위기를 풀고자 다음 말을 이었다.

“반갑소 곽 대인. 그러고 보니 대인의 이름이 내가 좋아하는 문호와 닮으셨구려.”

“무, 문호 말이오?”

“그렇소. 내가 존경하는 문호의 이름이 바로 ‘곽칠표’라오.”

흠칫­.

곽칠의 몸이 잘게 떨렸다.

목리원 그 반응에 환한 웃음을 만들었다.

그도 곽칠표를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아, 아시오? 하긴! 그 곽칠표를 모르는 것도 이상하긴 하겠구려! 무려 [강호협객전]의 필자가 아니오!”

환한 미소와 함께 전해지는 말.

그것에 곽칠의 안색은 점점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그, 그렇소…?”

수상하기 그지없는 반응이나, 그로선 당연한 것이었다.

말해 뭐할까.

운성표국의 삼류 표사 곽칠.

그가 바로 20여년 전 붓을 꺾은 강호협객전의 저자, 곽칠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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