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49화 (49/334)

〈 49화 〉 오장 ­ 용봉지회 (22)

* * *

화려했다.

오늘 하루 축제를 위해 꾸며진 거대한 비무대는 온갖 진귀한 장식들과 강호 명문들의 깃발이 차례로 꽂혀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검왕 남궁혁.

그는 굳은 얼굴로 연설을 이어갔다.

이번 용봉지회가 성공적으로 끝나 만족스럽다거나 강호의 앞날이 창창하다거나 따위의 의례적인 말.

필요에 의한 것임을 알고는 있으나, 자리한 관객들은 그것에 지루함이 차오르는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왜 아니겠나.

오늘 이들이 모인 이유는 검왕의 연설 따위가 아니지 않던가.

오늘의 주인공이 될 이들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단 말이다.

관객들의 시선은 내내 한 방향을 향해 있었다.

아직까지 굳게 닫혀있는 비무장 한 가운데의 문.

바로 수상자들이 나오는 문이었다.

[…이제부터 본 행사에 들어가겠다.]

순간 남궁혁이 그리 말했다.

그 뒤를 이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 비무장을 메웠다.

남궁혁은 무심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둥. 둥. 둥.

북이 울렸다.

그제까지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그 뒤로 한 쌍의 남녀가 나왔다.

바로 4강 진출자인 당화서와 현공이었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걸어 나온 두 사람이 남궁혁의 앞으로 당도해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남궁혁은 예의 의례적인 태도로 수상자들을 독려했다.

상품 지급은 없었다.

그들이 받을 것은 맹의 비급.

이곳을 나간 이후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을 골라 받아 가는 까닭이다.

관객들은 패를 받아드는 남녀를 보며 수근대기 바빴다.

“독봉이 화려하게 부활했군. 이제 독봉의 이름을 낮게 부를 이가 없겠어.”

“선룡 또한 대단했네. 상대가 상대인 만큼 4강에 그쳤으나, 이번에 그가 나오지 않았다면 결승에 오르는 것이 선룡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라는 말에 주변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검 목리원.

이번 용봉지회의 가장 큰 이변이자 중원 무림의 이변이 된 사내.

그의 이야기가 이어짐에 따라, 자연히 관객들의 관심은 다음 수상자에게로 향했다.

[다음, 준우승 검룡 남궁진천.]

남궁혁이 웅혼한 내력을 담아 읊조렸다.

제 손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음에도 그 기색은 사무적이었다.

“와아아아아!!!”

관객들의 함성과 함께 단상 위로 오르는 사내가 있었다.

짙푸른 벽안과 날카로운 선이 인상적인 미남자, 남궁진천이었다.

“표정이 좋진 않군. 패배가 그리 충격이었던 것인가?”

“말도 마시게, 지금 안휘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검룡이 심마에 빠져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네. 일각에선 그가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오더군.”

“에이, 그건 너무 비약이 아닌가.”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아니겠나.”

수근거림이 이어진다.

준우승.

분명 찬사를 받아야 마지않은 성적이었으나, 하필 그것이 검룡인 것이 문제였다.

언제나 압도적인 패자의 위치에 있던 이가 고꾸라지니, 남 얘기를 좋아하는 무림인들은 그를 씹고 뜯으며 저열한 쾌락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 그들이 아주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궁진천은 실로 심마에 빠져 며칠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니.

생애 첫 패배.

그리고 그와 함께 떠오른 의문들.

그것은 분명 남궁진천의 드높던 자신감을 갉아먹고 있었다.

남궁혁은 제 손자를 바라봤다.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음울한 기색을 품은 얼굴과 맥이 빠져있는 걸음걸이가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곧게 서라.”

남궁혁은 작은 소리로 그리 말했다.

남궁진천은 슬쩍 미간을 좁히다, 이내 남궁혁의 말을 따랐다.

“죄송합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 강호는 비정하여 그리 약점을 보이는 이를 동정하는 법이 없으니.”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남궁혁은 그 이상의 훈계를 더하지 않고, 그저 행사를 이끄는 데에 집중했다.

[상품은 만년한철, 검룡은 이것으로 원하는 검을 지으라.]

남궁혁의 뒤로 대기하고 있던 세가의 무인이 성인 남성의 상체만 한 궤짝을 들고나왔다.

남궁진천이 포권을 취하자, 무인이 그의 뒤로 기립했다.

그리고 남궁진천과 함께 비무장을 떠났다.

[다음으로….]

말이 거기까지 나온 순간, 비무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제야 나올 오늘 행사의 주인공에 긴장을 품은 것이었다.

다만 주인공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생긴 긴장은 아니었다.

이 순간은 새로운 용(?)이 탄생하는 순간.

그에게 내려질 용의 별호가 무엇일지에 긴장이 차오른 것이다.

[…우승자의 시상을 시작하겠다.]

남궁혁은 세가 무인에게 곱게 밀봉된 서찰 하나를 받았다.

그 속에는 오늘 목리원에게 내려질 별호가 쓰여 있었다.

별호를 미리 지정까지 하는 것인가.

서찰에 꽁꽁 싸매 선포까지 하는 것인가.

그런 의문을 품은 이들은 없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용의 별호는 특별하다.

무려 중원 무림 전체가 인정하는 기재라는 증표인 만큼, 그것을 수여하기까지 무림 명문의 고수들이 여러 차례 의논을 나눌 정도로 신중하게 정해지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별호의 다른 일례로 왕(王)이 있다고 하면 그 무게를 실감할 수 있겠는가.

관객들의 시선이 서찰에 꽂힌다.

남궁혁이 서찰을 펼치는 그 움직임에 꽂힌다.

고요하게 침묵한 비무장 위.

남궁혁의 입술이 달싹였다.

[새로운 용이 탄생했다.]

일찍이 이 강호의 왕(王)으로 군림한 절대자가 이른다.

[압도적인 기량을 보인 신예가 있다. 그 검으로 스스로를 증명한 무인(?人)이 있다.]

이번 용봉지회동안 한 사내가 보인 위업을 나열한다.

[때로는 패도적이고, 때로는 유하며 또한 때때로는 호쾌한 검을 휘두르는 사내다. 하나, 그런 중에도 그가 내내 품은 하나의 성질이 있다.]

목리원을 정의한다.

[발디딘 자리를 묵색으로 칠하여 어둡게 빛내는 용이오, 그리하여 제 존재를 알리는 용이니. 백도 무림은 앞으로 그를 이리 칭할 것이다.]

그를 나타낼 성질을 정의한다.

[묵룡(??). 단상 위로 오르라.]

묵룡(??) 목리원.

이제부터 그리 불릴 사내가 문을 빠져나왔다.

그제까지의 정적이 무너져 내렸다.

“와아아아아!!!”

공간 전체가 찢어발겨지는 소음이 터져 나왔다.

피부가 다 익어버릴 열기가 터져 나왔다.

눈부신 미소를 뽐내는 사내가 그 광기의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단상 위, 남궁혁은 마침내 제 앞으로 당도한 목리원을 보며 말했다.

[우승을 축하한다.]

그리 말하고 패를 건넸다.

뒤이어 나오는 것은 소림의 인물, 권룡 일운이었다.

[상품은 소환단. 묵룡은 이를 받아 정진하여 무림의 정의에 힘쓰라.]

그것으로 끝.

남궁혁은 손을 저어 목리원을 물렸다.

목리원이 비무장을 떠난다.

하나 비무장의 열기는 가시지 않는다.

짧고 굵게 끝난 시상이었으나, 그 열기는 회가 끝나기까지.

아니, 회가 끝나고도 그날이 다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오늘, 강호에 새로운 용이 태어났다.

*

목리원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밀실 한가운데 섰다.

그리하며 속으로 제 별호를 외쳤다.

‘묵룡!’

협룡이 아닌 것은 아쉬웠지만 이게 어딘가.

아무렴, 다름 아닌 용(?)의 별호가 아닌가.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후기지수에게만 내려진다는 그 별호가 제게도 내려진 것이란 말이다.

이제부터 어딜 가도 용으로 불릴 것이다.

누군가 정체를 묻는다면, ‘강호 동도들은 나를 묵룡이라고 부르고 있소!’라고 말해야 할 터다.

‘동도들은 나를 묵룡이라고 부르고 있소…!’

그 장면을 상상한 목리원이 주먹을 꽉 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감격에 겨운 것이었다.

권룡 일운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런 목리원을 바라봤다.

‘참으로 기뻐 보이시는구나….’

이해하지 못할 감정은 아니었다.

자신 또한 권룡이라는 별호를 받은 날 좀처럼 잠에들지 못하고 히죽거렸던 일이 있으니.

물론 저리 노골적으로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만큼은 공감하는 것이다.

“목 시주님,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아! 고맙소! 내 기쁨에 취해 잠시 못난 꼴을 보였구려!”

목리원의 뺨을 말갛게 물들었다.

일운은 지그시 웃으며 그런 목리원을 향해 궤를 들이밀었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하시겠습니까?”

사람 주먹만 한 궤.

그것이 열리는 순간 목리원은 탄성을 내질렀다.

“오…!”

알싸한 향이 밀실을 가득 채운다.

그와 동시에 청량한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었다.

소환단.

소림의 대표적인 영약 중 하나인 그것이 공기 중으로 드러나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목리원은 침을 꼴깍 삼키며 포장지에 곱게 쌓여있는 소환단으로 손을 뻗었다.

“이대로 섭취하면 되는 것이오?”

“예,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는 동안 저와 사제들이 호법을 설 것입니다.”

“알겠소! 그럼 실례 좀 하겠소!”

“얼마든지요.”

목리원은 더 지체하지 않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 상태로 조심스레 소환단의 포장을 벗긴 후, 그것을 입안에 삼켰다.

‘호오…!’

입 안에 넣은 순간 ‘화악’하고 향이 터진다.

침과 맞닿는 순간, 그것과 동시에 영약이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위장으로 넘어간 영약이 선명하게 감각을 일깨우는 순간, 목리원은 재빠르게 구결을 읊었다.

사아아­.

묵색의 기파가 흘러나온다.

목리원은 소환단이 흡수되며 느껴지는 정순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소림의 영약이라 해야 할까.

‘어찌 이리도 맑을 수가 있을까.’

이전 먹어본 인면지주의 내단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정순함이었다.

삿된 기운이나 불필요한 찌꺼기는 단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본디 자신의 것이 아닌 내력이라면 이를 흡수하는 동안 마찰이 없을 수가 없을진대, 소환단은 그 어떤 내력에라도 기꺼이 융화되어주겠다는 듯 제 성질을 포기하며 그의 일부가 되어주고 있었다.

단전이 점점 크기를 불린다.

그와 동시에 혈도를 달리는 내공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극마지체라는 체질 탓에 폭급하기 그지없는 목리원의 내공은 더욱 강해진 스스로의 힘에 크게 기꺼워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진정하거라. 욘석아.’

목리원은 제 내공에 고삐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그리하며 심상의 세계를 열었다.

그곳엔 아직 다른 것에 비해 그 광채가 볼품없는 검의 별자리가 있었다.

목리원은 제 통제 속에서 날뛰고 있는 내공을 그 별자리 속에 밀어 넣었다.

화아아악­!

순간, 목리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더 중후해졌다.

마침내 완성한 네 번째 별자리가 그의 심상을 넓혀준 것이었다.

하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성련신공은 조화의 무공.

이제 막 제대로 자리 잡은 검의 별자리를 다른 별자리와 제대로 이어줄 필요가 있었다.

앞선 3성을 완성할 때와 마찬가지로, 목리원은 세 번째 별자리와 네 번째 별자리 사이에 길을 틀었다.

그리하며 순행하는 별자리에 하나의 규칙을 더했다.

천(?), 지(?), 인(人).

그리고 검(?).

세 번째와 네 번째 별자리가 그 접점을 그리 정의했다.

“스으으….”

목리원은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그의 눈빛엔 이전보다 훨씬 맑은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제 완연한 절정의 중입.

일운은 영약을 먹자마자 바뀐 목리원의 기도에 놀란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어쩐지, 애초에 깨달음이 아닌 내공이 모자라셨던 것이구나.’

보인 검술에 비해 경지가 낮다 했더니 그 이유가 이것인 듯하다.

간혹 보이는 경우였다.

원한다면 깨달음의 수위에 맞는 영약을 섭취할 수 있는 명문과 다르게, 다른 영세한 문파의 무인들은 깨달음을 체득시킬 내공이 없어 곤혹을 겪는 경우과 왕왕 있는 것이다.

문득, 일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축하를 해야 하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자신 또한 엄연한 무인.

비슷한 경지의 동년배가 먼저 성장해 자신을 앞지르는 순간 떠오르는 박탈감과 질시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불가의 제자답지 않은 마음이라, 일운은 애써 그것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성과가 있으셨군요.”

“호법을 서주어 고맙소! 내 스님께는 계속 신세만 지는구려!”

목리원이 웃으며 건넨 말에 일운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아닙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음?”

“그런 것이 있습니다.”

절대 뒤처지지 않으리라고.

재능이 모자라다면 그것을 메꿀 만큼의 노력을 더할 것이리라고.

그리하여 이 찬란한 재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고.

권룡 일운.

그는 드높은 벽 앞에서 포기가 아닌 도전을 떠올리는 사내였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