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오장 용봉지회 (21)
* * *
“…무림맹에 가려고 합니다.”
당화서는 그리 서두를 던졌다.
그리고 이어 지난 일을 말했다.
“그날 밤 목 소협께서는 저와 당운경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들으셨겠지요. 예, 저는 당문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굳이 그 이유와 관련된 이야기를 깊게 하진 않았다.
당화서에게 제 유년기는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던 순간이었고, 또한 남에게 말하긴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던 까닭이다.
그저 울부짖으며 제발 그만해달라고 빌었던 일을, 당화서는 목리원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하여 당화서는 유년기의 일을 얼버무린 채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목 소협을 만나, 그리 수양현을 떠나던 날 저는 결심했습니다. 더 이상 가문을 피해 도망 다니지 않겠다고. 내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 살고 싶다고.”
“…그랬구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당화서는 고개를 들어 목리원을 마주했다.
그는 어떤 이야기든 다 들어주겠다는 듯 편안히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기를 복 돋아주는 미소였다.
“무엇이 필요하오?”
“당문이 어찌할 수 없는 지위. 그것이 필요해 저는 무림맹으로 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림맹엔 그것이 있소?”
“무림맹에 입적해 단주의 지위를 달면 생깁니다. 백도 무림의 본산이라 일컬어지는 무림맹인 만큼, 그곳의 단주급 무인들은 이전까지의 소속이 무엇이었든 그 순간부터 무림맹으로 소속이 바뀌게 되지요.”
“소저는 맹의 단주가 되고 싶은 것이었구려.”
“그리하여 당문이 저를 해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또 그렇게 지위를 쌓고 쌓아, 언젠간 당당히 당문에 돌아가 죄를 묻고 싶었다.
이 용봉지회는 그것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소림사로 향하는 일 또한 그것을 위한 과정이었다.
한창 혈사가 있던 20여년 전 무림맹의 맹주였던 사내.
불성(??) 원명의 추천서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용봉지회가 끝나면 단주가 되기 위한 여정을 떠나려 했습니다. 이제 목 소협과도 헤어져야 할 터였지요. 한데 말입니다.”
당화서는 머뭇거림을 토해냈다.
이제야 겨우 부탁을 말할 순간이 되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것은 고집이라는 결론이 나온 까닭이었다.
“한데?”
목리원은 부드럽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당화서는 꼼지락꼼지락 맞잡은 목리원의 손가락을 만졌다.
그리하며 말했다.
“…목 소협과 함께 맹으로 가고 싶어졌습니다. 더 함께하고 싶습니다.”
두서없는 말이었다.
당화서는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붉어진다.
수치심에 눈망울이 일렁거린다.
고개가 아래로 푹 꺼진다.
핑핑 돌아가기 시작하는 머리는 말한다.
빨리 이 말을 수습할 다음 문장을 내뱉으라고.
하나, 그리 허둥지둥해서 떠올린 말이 제대로 된 형태일 리는 없었다.
이쁘게 포장될 일도 없었다.
나오는 말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필요합니다.”
“무엇이….”
“저는, 목 소협이 필요합니다.”
당화서는 겨우 그리 말을 내뱉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쭉 생각나는 감정을 토해냈다.
“그래서 함께 가고 싶습니다. 목 소협이… 저와 함께 무림맹으로 가주셨으면 합니다.”
당화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어코 이 실례되는 부탁을 그에게 해버린 것에 심장은 쾅쾅 날뛰고 있었다.
맹에 입적하는 순간 그 소속이 맹으로 바뀐다.
이는 목리원이 자신과 함께 맹으로 향하는 순간, 그의 삶이 맹에 귀속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분명 목리원에겐 유쾌하지 않은 일이리라.
‘거절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런 생각에 당화서의 머릿속엔 목리원이 부탁을 거절할 것이리란 예측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나.
“좋소.”
“역시… 네?”
아니었다.
목리원은 너무 쉽게 승낙의 말을 내뱉었다.
당화서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했다.
하여 목리원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진정 제대로 생각은 하고 허락하는 것인지, 도리어 그것에 대한 걱정까지 차올라 물었다.
“지금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습니까? 목 소협, 맹에 들어간다는 것은 함부로 생각할 일이 아니에요.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일은….”
“말하지 않았소. 나는 소저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목리원은 이전과 같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부탁이 협의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할 수 있다 말했소. 그리고 무림맹에 입적하는 것은 조금도 협의에 어긋난 일이 아니오. 아니, 차라리 협의를 지향하는 일이라 할 수 있지. 왜 아니겠소. 무림맹은 이 중원 무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영웅들의 둥지이지 않소.”
“그런 얘기가….”
“그리고 나 또한, 소저와 헤어지고 싶지 않소.”
쿵.
당화서의 심장이 아주 크게 뛰었다.
이는 직전까지 해내던 불안으로 인한 박동과는 궤를 달리하는 움직임이었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고민에 순간적으로 당화서는 머릿속이 과부하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하나, 얄궂게도 목리원은 그 생각을 이어가게 두지 않았다.
“나는 소저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소. 배우고 싶은 것이 있는 까닭이오.”
“배우다니….”
“현실적인 협말이오. 나는 그것을 모르오. 내가 아는 협은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허황된 협이오. 이것이 싫진 않으나, 나는 알고 있소. 현실은 이야기보다 잔혹하다는 것을. 꿈만 쫓아서는 협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목선오도 마일석도 이른 일이었다.
낭만 속에 사는 것이 협객이긴 하나, 그것이 현실을 외면하라는 말은 아니라고.
진정한 협객이라면 당면한 현실 속에서 행할 수 있는 협을 고민해야 한다고.
“나는 협을 알고 싶소. 그리고 그것을 내게 알려줄 이는 소저밖에 없다고 생각하오. 소저는 내가 아는 이들을 통틀어 가장 호협한 사람인 까닭이오.”
당화서는 현실적인 여인이다.
하나, 그럼에도 이타적인 여인이다.
그녀는 항상 고민하는 사람이었고, 또한 항상 스스로를 다그쳐 더 나아지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목리원은 당화서가 좋았다.
그녀의 인간성이 좋았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 또한 그런 감정과 멀지 않았다.
“나는 소저를 알고 싶소. 소저의 곁에서 그 호협함을 배우고 싶소. 이왕이면 그 과정에서, 이리도 의로운 소저가 행복했으면 좋겠소. 그러니 나는 소저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오.”
당화서는 길게 이어진 목리원의 말에 힘없이 웃어버렸다.
‘…말을 왜 그리도 애매하게 하십니까.’
목리원의 말이 너무나도 모호한 형태로 전해진다는 생각 탓이었다.
분명 목리원은 자신의 의로움을 칭송하고 있는데, 그 말본새가 너무 달콤한 게 아닌가.
꼭 오해해버리고만 싶게, 그는 그리 말을 하고 있단 말이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소저를 만난 일은 내 인생에 찾아온 두 번째 행운이라 생각하오. 그리고 그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오. 그러니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첫 번째는 무엇이었습니까?”
“내 스승님께 거둬진 일이오.”
스승님 다음이라.
나쁘지 않았다.
당화서는 그제야 목리원이 계속 곁에 남아있으리란 사실을 실감했다.
그것에 기쁨을 토해냈다.
너무나도 벅차올라, 당화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조금도 감사할 필요가 없소. 당연한 일이니.”
“그럼에도 감사합니다.”
당화서는 목리원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감정에 취해 한 일이었으나 당화서는 당장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시원하고 따스한 향.
그에게서 풍겨오는 그런 체취가 있어, 부끄러움보단 편안함이 먼저 떠오르고 있던 까닭이다.
용봉지회가 끝난 날의 밤.
휘영청 떠오른 달조차 이 순간만큼은 구름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조금은 더 어두워진 땅 위로 진 사내와 여인의 그림자는 그리 오랜 시간을 겹쳐 있었다.
*
사흘은 빠르게 지났다.
당화서의 걱정과는 다르게, 정말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가버렸다.
서현이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목리원의 우승 이후 서현은 단 한 순간도 조용했던 적이 없을 정도로 왁자지껄했고, 마침내 그 경이로운 검술을 선보인 목리원에 대한 관심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태였다.
명문들은 그 기색이 더 험악했다.
이제까지 목리원이 다니는 골목에서 대기하기만 하던 이들이 이젠 몸이 달아올라 먼저 숙소가 있는 장원까지 찾아오고 있었다.
아마 이 장원이 남궁세가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목리원은 이미 들이닥친 명문들에게 엉망진창으로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정말 단 한 발짝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
하나, 목리원은 그 활달한 성정에 맞지 않게 지난 사흘간 조용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아직 안에 계시더냐?”
“그렇소. 목아우도 참 대단하지, 어찌 된 게 사흘 동안 저 방안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더구려.”
“수련을 한다 했지.”
“깨달음을 수습한다고 들었소.”
“곧 출발해야 할 터인데 너무 늦는구나….”
당화서는 걱정스레 닫힌 목리원의 방문을 바라봤다.
하나 그런다고 문이 열릴리는 만무.
목리원은 지금 문밖에서 대기 중인 두 사람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스으으.
방 안은 옅은 묵색의 기파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목리원은 그 방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심법을 운용하며 명상에 빠져있는 것이었다.
목리원은 수습해야 할 깨달음이 많았다.
검왕 남궁혁이 넌지시 던진 한마디 말이나 비무에서 얻은 여러 검술적 깨달음, 그리고 생애 처음 본성을 이용하며 얻은 기교적인 깨달음까지.
그는 그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깨달음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그것을 심상 위로 덧씌워가고 있었다.
‘나는 검수일뿐.’
그 무엇도 아니다.
내려진 별은 나를 정의할 수 없으며, 검을 휘두르는 마음은 온전한 나의 것이다.
본성조차 결국은 ‘검’을 이루는 파편에 불과하니, 검수인 나는 그것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실로 그것을 해냈다.’
남궁진천과의 비무에서 그 실마리를 얻었다.
천살성은 아예 통제가 불가능한 별이 아니었다.
즉, 이 살심은 검수로서의 의지가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기벽이리라.
‘살심은 검의 일부, 별 또한 검의 일부.’
목선오의 오랜 가르침대로, 또한 남궁혁이 이른 대로 별은 결국 별일 뿐이었다.
이것은 제게 쥐어진 검일 뿐이었다.
참으로 흉측한 생김새였으나, 이런 흉측한 검조차 그 검수가 누구냐에 따라 성질이 달라질 터다.
‘그저 검수일 뿐.’
목리원은 다시 되뇌며 성련신공을 운용했다.
머릿속으로 구결을 외웠다.
스으으.
새까만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심상, 그 위로 세 개의 별이 떠오른다.
목리원은 그것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세 번째 별 뒤를 짚었다.
그곳에 희미한 빛무리가 일기 시작했다.
‘검의 별일지어라.’
목리원은 빛무리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이름에 걸맞게도, 새로 새겨진 빛무리는 이리저리 몸을 뒤틀더니 이내 검의 형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완전히 자리를 잡자 별들이 운행했다.
첫 번째 별자리부터 순차적으로, 일정한 경로를 따라서.
별의 일주가 이어진다.
이제까지 셋의 별자리가 겨우 밝히던 심상이 네 번째 별자리가 더해짐으로써 더욱 눈부신 빛을 발했다.
목리원은 네 번째 별이 제대로 안착한 것을 느끼고서야 눈을 떴다.
후욱 하고 내뱉는 숨에 따라 기운이 갈무리 되었다.
이어 목리원의 어깨가 편안히 내려앉았다.
목리원은 싱긋 웃었다.
‘4성이다.’
아직 공력이 충분치 않아 완전한 4성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조차도 몇 시진 뒤면 해결될 터.
목리원은 차오른 기쁨을 굳이 억누르지 않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벌컥.
방의 문을 열었다.
그곳엔 이미 준비를 마친 채 그를 기다리는 당화서와 제갈산이 있었다.
“갑시다!”
목리원을 그리 외치며 걸음을 내디뎠다.
향하는 곳은 결승이 있던 비무장.
오늘, 목리원은 용(?)이 될 것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