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오장 용봉지회 (20)
* * *
그리 많은 사람이 몰린 비무장이었음에도 사위는 고요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자리한 그 누구도 이리 압도적인 승부는 예상하지 못했으니, 어찌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사회자의 외침이 흩어지는 중에도 고요하던 비무장 한가운데.
목리원은 숨을 몰아쉬며 검을 거뒀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겨냈다.’
그 순간 차오른 충동을 깔끔하게 이겨냈다.
검을 휘두름에 살기를 더하지 않았으며, 전해지는 남궁진천의 살기도 그저 읽어 내는 데만 그쳤고 마지막 순간 검을 찔러넣지도 않았다.
등골이 짜르르 울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완벽한 승리였다.
스스로와의 싸움에서도, 남궁진천과의 싸움에서도.
목리원의 시선이 관객석의 가장 높은 곳을 향했다.
그곳엔 결과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남궁혁이 있었다.
‘그저 검수일 뿐.’
목리원은 남궁혁이 말한 그 말의 뜻을 조금 더 확실히 알게된 것 같았다.
순간.
“…진 건가.”
남궁진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리원은 그제야 남궁진천을 돌아봤다.
‘아.’
도발에 관한 사죄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떠올리기도 잠시, 목리원은 그제야 눈에 들어온 남궁진천의 행색에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 정도로 그는 멍한 기색이었다.
머뭇거리던 목리원은 이내 하려던 말을 멈추고 포권을 취했다.
“좋은 승부였소.”
지금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은 도리어 기만이리라는 생각에 해낸 행동.
남궁진천의 고개가 들렸다.
그는 많은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눈빛으로 목리원을 보다, 이내 허탈하게 말을 내뱉었다.
“…좋은 승부라.”
남궁진천은 제 손을 바라봤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손의 떨림은 그 기색이 겁쟁이의 것과도 닮아있었다.
그것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에 남궁진천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 한 것인가.”
“…무엇을 말이오?”
“어떻게 그런 검을 만든 것인가. 자네는 어떻게 그런….”
확신으로 검을 휘두른 것인가.
남궁진천은 그 말을 짓씹었다.
표정은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목리원은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 답을 내뱉었다.
“그저 지기 싫었을 뿐이오.”
“그게 방법이 되나?”
“내게는 되오.”
남궁진천의 시선이 목리원을 향했다.
목리원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아주 만족스러운 승리는 아니었소. 나는 순수한 실력이 아닌 도발을 가미해 이긴 것이니. 이것은 상대의 감정을 이용한 승리이니 협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과정의 정밀함은 훌륭했다고 한들 방식에 미진함이 있던 것은 맞으니.
“하지만 말이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이기고 싶었소. 증명하고 싶었소. 야망으로 휘두르는 검은 그리도 쉽게 부러진다는 것을.”
“내가 잘 못 되었다고 말하는 건가.”
“잘 못 되지 않았소. 하나, 올바르지도 않았소.”
목리원은 그리 말하고서야 자신이 왜 이기고 싶었는지, 그 이유를 선명히 깨달았다.
“…그래, 이기고 싶은 이유가 그것이었던 것 같소. 검룡께선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으셨기에, 다만 앞으로 될 것이 조금은 협에 닿아있길 바라는 마음이었소. 검룡께선 그리도 대단한 사람이니 다른 이들을 지키는 데 그 힘을 써주길 바랐소.”
목리원은 언제나 그런 가르침을 받아온 사내였다.
검은 너무나도 차갑기에 그것을 든 검수의 가슴은 뜨거워야 한다.
그리하여야 검이 올바른 곳에 휘둘러진다.
목리원은 자신의 마음을 울린 그 가르침이 남궁진천의 마음도 울리기를 바랐다.
남궁진천은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표정은 더욱 찌푸려지고 있었다.
남궁진천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생애 첫 패배.
거기에 더해 이제까지 살아오며 쌓아온 모든 가치관이 종잇장처럼 구겨졌으니 당장 다른 생각을 떠올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증명….’
목리원은 증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증명하지 못했다.
자신은 글렀던 것인가.
이 승부는 질 수밖에 없었던 승부였던 것인가.
수많은 의문이 떠오른다.
이것 역시 직전 맞붙었던 목리원의 검과 같이 좀처럼 그 답을 보여주지 않는 의문들이었다.
“…우승은 축하하네.”
남궁진천은 그리 말하고 비무장을 떠났다.
그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떠오른 심란함을 수습할 시간이.
*
용봉지회의 시상식은 사흘 뒤에나 있었다.
즉, 당장의 목리원이 할 일이라곤 비무대를 빠져나와 당화서에게 가는 것뿐이었다.
“소저! 내가 이겼소!”
목리원은 웃으며 당화서에게 달려갔다.
당화서는 다가오는 목리원의 모습에 덜컥 몸을 멈춰 세웠다.
저 어벙한 얼굴을 보니 그제야 실감 나기 시작한 것이다.
“…예, 정말 이기셨군요.”
목리원이 이겼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남궁진천에게.
언제나 그랬듯, 그 스스로 내뱉은 말을 지키며.
돌연 묘하게 가슴이 찡한 기분이 떠올랐다.
어딘가 대견하고, 또한 그 해맑음이 너무나도 눈부셔 괜히 자신이 우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목 아우! 나도 있네! 나도 봐주게!”
“냅둬요. 이쪽은 보지도 않는 것 같구만.”
제갈산과 혜운이 궁시렁거리는 것에 목리원은 뒤늦게 그쪽도 바라봤다.
“아! 응원해줘서 고맙소! 내 기감을 넓혀 다 듣고 있었소!”
“전 응원 안 했는데요.”
“앗…!”
목리원이 섭섭하다는 듯 혜운을 바라봤다.
그것에 혜운은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니 잠깐, 내가 왜 미안해야 해?’
다시 생각해보니 미안할 이유는 없는 듯해, 혜운은 콧방귀를 뀌고 돌아섰다.
“뭐, 수고했고 잘 쉬세요. 저는 피곤해서 들어가렵니다.”
“잘 가시오!”
목리원은 떠나는 혜운에게 손을 흔들었다.
당화서는 잠시 그 꼴을 보다, 목리원의 손을 ‘탁’쳤다.
“밥이나 먹으러 가지요. 거기서 축하도 마저 하구요.”
“아! 알겠소!”
제갈산은 그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중증이구먼.’
당화서의 견제가 엄청났다.
아주 목리원과 여자가 엮이면 발작을 하는 게 중증도 저런 중증이 없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진 못 할 말이었다.
제갈산은 독에 절어 며칠 내내 설사하는 경험 따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
서현이 죄다 뒤집어질 정도로 큰 소란이 인 와중에도 목리원과 일행들은 평온했다.
그들은 그저 언제나 들르던 구석진 객잔에서 내내 먹던 음식들을 시키며 담소를 나누기 바빴다.
“용봉지회는 당연히 우승 상품이 있네. 목아우는 이때까지 그걸 몰랐단 말인가?”
“모, 몰랐소…! 그래서 우승 상품이 뭐요?!”
“소림의 소환단이라네.”
“소환단! 그 소림의 대표적인 영약 중 하나 말이오!”
“그래, 한 번 먹으면 반갑자 공력이 쑥쑥 솟는다는 바로 그 소환단 말일세.”
“오오…!”
목리원은 눈을 빛내며 기쁨을 토해냈다.
아무렴, 이번 남궁진천과의 비무에서 그런 어울리지 않는 수까지 보인 이유가 바로 공력의 부족 탓이 아니던가.
‘마침 깨달음도 코앞에 있다!’
그저 검수일 뿐.
그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깨달음이 계속에서 뇌리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건드려보면 성련의 4번째 별을 띄울 수 있을 시기.
그에 맞게 공력을 보충할 방법이 생기니 기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사흘 후 시상식에서 소환단을 받는 것이오?”
“그렇네. 아, 대신 받은 소환단은 시상식이 끝난 직후 소림의 인물 앞에서 먹어야 하네. 빼돌리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지.”
“꽤나 철저하구려.”
“아무렴, 소림의 비전 중 하나인데. 아마 그날엔 일운 스님께서 그 일을 도와줄 걸세.”
목리원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중, 돌연 떠오른 의문에 그런 말을 내뱉었다.
“아, 그럼 2등과 4강 진출자는 무엇을 보상으로 받소?”
목리원의 시선이 당화서를 향했다.
그녀가 받을 상에 궁금증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당화서는 피식 웃으며 그런 목리원에게 답을 건넸다.
“2등은 만년한철을 받습니다. 4강 진출자가 받는 것은 별 쓸 데도 없는 무림맹의 비급 중 하나구요.”
목리원의 얼굴이 멍해졌다.
“만년한철…? 비급…?”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소환단.
물론 영약씩이나 되는 만큼 귀한 재보임은 분명하나, 1등 상인 것을 생각하면 지금 들려온 다른 상에 비하면 특출나게 뛰어난 보상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만년한철.
이 무림에서 가장 튼튼하다는 그 강철이 어찌 소환단보다 작은 가치를 지니겠는가.
또 비급은 어떻던가.
쓸 데 없다고 한들 맹의 비급이다.
분명 그 안에도 배울 것이 넘칠진대 어찌 소환단과 비교해서 그 급이 떨어지냐는 말이다.
노골적으로 의문을 드러내는 목리원의 얼굴에 당화서는 설명을 덧붙였다.
“용봉지회의 특수성이지요. 이제까지 상위권에 올라간 이들이래 봐야 죄다 명문에서 나온 것들이니, 만년한철이나 비급보단 영약에 더 무게를 두는 것입니다. 다른 두 가지는 돈으로 해결되는 것에 반해 소환단은 돈으로 해결이 안 되니까요.”
“아…!”
“그리고 목 소협도 소환단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만년한철은 탐나는구려.”
목리원은 허름한 제 장검을 쓰다듬었다.
벌써 십 년을 넘게 사용해 정이 들어버린 검이지만, 그럼에도 이 검을 영원히 쓰라면 목리원은 자신이 없었다.
목리원도 결국 무인.
좋은 검에 대한 욕심은 차고 넘치리만큼 있는 것이다.
당화서는 그 씁쓸한 미소에 쿡쿡 웃었다.
“검이 필요하면 말하십시오. 한 자루 정도는 사드릴 수 있으니.”
“저, 정말이오?!”
“그럼 농이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그 와중 소외된 제갈산은 또 묵묵히 제 술잔을 기울이며 떠오른 생각을 억지로 주워삼켰다.
‘하다하다 돈으로 매수까지….’
제갈산은 당화서가 두려웠다.
*
식사는 좋은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내내 당화서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던 제갈산은 그녀가 몰래 흘린 독에 중독되어 설사병이 나 먼저 가버린 와중.
당화서는 산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처소 앞에 멈춰 섰다.
“그럼 들어가 쉬십시오. 오늘 하루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늦은 밤.
앞으로 사흘 간은 꽤나 힘들 것이다.
아무렴, 용봉지회의 새로운 우승자가 된 목리원을 강호인들이 가만 두겠는가.
당화서로선 여기저기 치일 목리원을 생각해서라도 이만 쉬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건넨 말이었으나, 목리원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목 소협, 안 가십니까?”
“그 전에 할 게 있지 않소?”
“할 것이라니 무스….”
덜컥.
당화서의 몸이 들썩였다.
목리원이 한 발 앞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늦은 밤.
장소는 숙소 앞.
그리고 할 게 있다는 말.
설마설마 저 목리원이 말하는 것이 ‘그’ 의미인가.
당화서는 떠오른 생각에 눈이 핑핑 도는 기분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그랬다.
저리 순진해 보이지만 목리원이 어떤 사람이던가.
색마나 요녀 얘기만 나오면 그리 뺨을 붉히며 좋아하는 어엿한 사내가 아니던가.
‘너, 너무 이른…!’
아직 관계도 제대로 맺지 않았는데 밤일은 너무 빠르지 않나.
그런 생각까지 떠오른 순간.
“약속, 잊은 것이오?”
당화서는 그의 말에 그제야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아….”
먼저 ‘아차’하는 심정, 그 뒤로 수치심이 차올랐다.
자신이 먼저 그런 약속을 걸어놓고 까먹고 있다는 것에, 그리고 목리원을 음흉한 사내로 몰아가며 도리어 제가 음흉한 상상을 했다는 것에 차오른 감정들이었다.
“음? 소저?”
“…아니, 잠시. 잠시만.”
당화서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열기가 여간 뜨거운 게 아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화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떠오른 자괴감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괴감을 지워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금씩 머리가 식는다.
열기 또한 밤공기에 서서히 식어간다.
그제서야 당화서는 입을 열었다.
“으… 죄송합니다.”
“무엇이 말이오?”
“…그런 게 있습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리 중요한 일이 있었음에도 그런 음흉한 생각이나 먼저 떠올린 것을 보면, 분명 그게 맞을 터였다.
“소저.”
당화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여전히 해사한 미소를 짓는 목리원이 있었다.
아니, 그 어딘가 조금은 곤란한 기색이 있었다.
“으음… 혹시 말해주고 싶지 않다면 그리하셔도 되오. 내가 너무 보챈 것일지도 모르겠구려.”
당화서는 속이 일렁이는 기분을 느꼈다.
또였다.
그는 또 이런 따스한 배려로 자신을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먼저 부탁한 일인데.”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당화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아니에요. 도리어 제가 목 소협께 실례가 되는 일을 부탁할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아니, 확실히 이것은 실례가 되는 부탁일 터다.
왜 아니겠나, 제 욕심만으로 상대방의 삶을 어딘가에 묶어버리는 일일진대.
사실, 이리 말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니 불안감까지 치솟고 있었다.
겨우 깨달은 연심은 제 성질에 맞지 않는 섬세한 면이 있어, 당화서는 혹여 목리원이 제 말에 실망감을 느낄까 하는 걱정까지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것일까.
목리원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 소저가 내게 부탁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실례되는 일이 아니오. 협의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예?”
“소저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해주지 않았소.”
목리원은 진심을 전했다.
“소저는 강호를 모르는 내게 강호를 알려주었소. 또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도 타인을 지키려 하는 호협함을 보여주었소. 그뿐이오? 이제까지 먹은 밥이나 지낸 숙소, 거기에 용봉지회에 와서까지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나는 아마 평생을 가도 소저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할 것이오.”
“….”
“그러니 소저는 내게 할 수 있는 모든 부탁을 할 권리가 있소.”
목리원이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당화서의 손등 위로 겹쳐졌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해주시오. 이리 보답하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서라도.”
당화서의 표정이 흔들렸다.
눈망울은 기묘한 떨림을 품기 시작했다.
달빛을 등진 채 다가온 사내가 너무 어여뻐, 또 그 말씨가 너무 고와 심장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제까지 차오른 걱정이 그의 말 몇 마디에 눈 녹듯 녹아버리는 것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이리 불안해하고 또 행복해하게 되는 것은.
당화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다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머뭇거리던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