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40화 (40/334)

〈 40화 〉 오장 ­ 용봉지회 (13)

* * *

다음날, 아직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당화서는 침실에서 눈을 떴다.

멍하니 풀린 동공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눈을 깜빡이길 잠시, 이내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미쳤구나.’

잠기운이 슬 가시고 나서야 전날의 일이 떠오른 것이었다.

간밤에 만난 이복동생과 그의 날카로운 말.

무너지려던 자신을 붙잡아준 목리원과, 그의 미소에 마음이 씻겨져 내리던 순간까지.

그리 많은 일이 있어 복잡한 마음이 들 법한데도, 당화서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한 하나의 감정뿐이었다.

‘내가….’

사랑에 빠져 있구나.

타인을 연심으로 바라보게 되었구나.

그 사실이 너무나도 생경하게 다가와, 또한 부끄럽게 다가와 당화서는 몸을 떠는 것이었다.

기이한 감정이었다.

듣기로는 사랑에 빠진다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에 열이 잔뜩 올라 정신이 없어진다 했건만, 제 사랑이 이는 반응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심장은 쿵쾅거리기보다 꽉 조이고 있었다.

얼굴보단 폐부에 열이 가득찼고, 그것에 따라 나오는 숨이 가장 뜨거웠다.

와중 정신이 없다는 말만큼은 들었던 바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당화서는 제 몸을 살피다 문득 헛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구나.’

지금 당장 처해있는 상황이 이리 복잡하고, 해결해야 할 난제가 많은데도 그런 것들에 조금도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

그게 걱정되어야 할 진대도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 것이.

그보다 먼저 기쁨이 떠오르는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당화서는 몸을 일으켰다.

제 가슴에 손은 채로 크게 심호흡한 후, 왜인지 뜨거운 뺨을 꾹꾹 눌러 열기를 식혔다.

그리하고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순간.

­소저! 기침하셨소?!

문밖에서 목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전날의 일이 마음에 걸려 이리 찾아온 것일 터.

그런 생각에 당화서의 입꼬리가 순간 삐죽 솟아오르다, 이내 제자리를 되찾았다.

“예, 일어났습니다.”

어제 그리 눈물을 흘려놓고 웃는 모습으로 나가는 것도 모양 빠진다는 생각.

당화서는 그녀의 성정에 맞는 괜한 자존심을 부리며 문을 나섰다.

*

“잘 주무셨소?”

목리원은 언제나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조금의 구김살도 없는 웃음이었고, 또한 그것을 통해 ‘전날의 일을 모른 체 하겠다’라는 의도를 다시 한번 전하는 웃음이었다.

참으로 감사하고도 미안한 배려였다.

당화서는 그 모습에 속이 꽉 조이는 기분을 느끼며 답했다.

“예, 소협께선 잘 주무셨는지요?”

“그렇소! 아, 아주 잘 자지는 못했는데. 사실 어젯밤에 말이오. 제갈 형이 찾아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는 것 아니겠소? 서현의 한 상인의 이야기인데 말이오….”

목리원이 그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당화서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웃음을 흘리고, 또한 함께 놀라기도 하며 길을 걸었다.

그리하며 생각했다.

‘…떠날 수 있을까.’

내가 이 사내를 두고 떠날 수 있을까.

이제야 자각하게 된 연심은 과연 그 순간에 그를 놓아주려 할까.

답은 쉽사리 나왔다.

당화서는 그와 멀어질 생각을 하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하게 차오르는 거부감을 느꼈다.

참으로 곤란한 감정이었다.

이유도 뭣도 없는 설렘 따위에 그간 굳혀두었던 결심이 뒤흔들리고 있으니.

당화서는 왜 이런 감정을 품게 된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어찌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 고민이었다.

당화서가 살아온 매 순간은 인내와 고난의 연속이었고, 그 속에 다른 사람을 위해 할애할 자리는 없었다.

연심이라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몸을 지녀 그런 일에서 눈 돌리고자 했었다.

즉, 그런 말이었다.

너무나도 고단했던 삶이었기에 당화서는 사랑에조차 이유가 필요한 것이었다.

왜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인가.

…라는 생각을 떠올린 순간, 당화서는 무심코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속물적인 답을 내버리고 말았다.

‘얼굴…?’

생각한 순간 자괴감이 엄습한다.

내가 이리 얼굴에 약한 사람이었던가 싶어져, 또한 목리원 정도는 되어야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눈이 높은 사람이었던 것인가 싶어져 차오른 자괴감이었다.

돌연 붉어지는 얼굴.

그것에 목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소저?”

“아닙니다. 조금 부끄러운 일이 생각나서.”

“무슨 부끄러운 일이오?”

“비밀입니다.”

목리원의 얼굴 위로 호기심이 짙어졌다.

꼭 캐묻고 싶은데, 전날 한 약속도 있어 차마 캐묻지는 못하고 끙끙대는 모습이었다.

그조차도 아름다웠다.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아! 약속한 것이오!”

“그럼요.”

당화서는 쿡쿡 웃으며 객잔에 들어섰다.

순식간에 몰리는 객잔 내의 시선은 모두 목리원을 향한 것이었다.

­묵검이군.

­정말 대단하지 않나? 지금 저 나이에 벌써부터 검룡에 도전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될지… 선룡을 상대하며 보였던 검을 생각해보면….

­예끼, 이 사람아. 그래도 설마 검룡을 이기겠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속닥거림.

그것에 당화서가 목리원을 흘긋 바라봤지만, 그는 식사에 정신이 팔려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랬지, 참.’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목리원은 용봉지회의 결승에 오른 사내다.

나이에 비해 무력이 월등하고 그 재능조차 출중하여 온 중원 무림이 군침을 삼키는 무인.

‘그것에 비하면….’

자신은 어떤가.

당문의 도망자.

6년째 정체된 무공.

그리고 아이조차 가질 수 없는 몸뚱어리.

이런 비교가 의미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당화서는 그리 목리원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내일이 벌써 소저의 시합이구려!”

“…예.”

“어떻소? 따로 준비한 수가 있소? 나에게만 슬쩍 알려주면….”

따로 준비한 수는 없었다.

또한 이길 자신조차 없었다.

아마도 질 것이다.

그것도 처참하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검룡 남궁진천은 천외천이다.

그는 이제까지도 위대했고, 앞으로는 더욱 위대한 무인이 될 것이다.

고작 평온 따위를 바라는 자신과는 너무 비교되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것이 당연한 일인 진대도.

‘…이제 와서.’

당화서는 새삼 그것이 분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천상 무인이었다.

제아무리 가문에서 도주했다 한들, 또한 평온을 바라며 스스로를 숨겼다 한들 무공에 한해서는 욕심을 가지는 여인이었다.

다만 그 이유뿐만은 아닐 것이다.

당화서는 떠올린 이유에 하나의 이유를 덧대었다.

목리원과 같은 자리에 서고 싶다.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더욱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이리라.

당화서는 차오른 감정을 굳이 억누르지 않고 목리원을 바라봤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봐야지요.”

“소저라면 분명 해낼 수 있을 것이오!”

“그랬으면 좋겠군요.”

당화서의 주먹이 꼭 쥐어졌다.

‘떠나고 싶지 않다.’

그의 곁에 서고 싶다.

아니, 정확히는 그를 제 곁에 남겨두고 싶었다.

하나 상황은 여의지 않았다.

그리 목리원이 물려냈으나 당문은 계속해서 자신을 노릴 것이다.

아니, 회유로는 안 되는 것을 알았으니 협박이던 무력 행사던 강수를 들고 올 것이다.

그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던가.

당화서는 고민했다.

아직 그 이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연심에 흠뻑 젖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실리를 뒷전으로 뒀다.

그리하고서야 당화서는 억지에 가까운 결심을 해냈다.

‘만약….’

만약 남궁진천과의 비무에서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 만큼의 결과를 내게 된다면.

소림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림맹의 문을 두드릴 자격을 얻게 된다면.

그때는 계획을 바꿔도 되지 않을까.

당화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도박이다. 그리고 억지다.’

하나, 그것이 무에 중요하겠는가.

당화서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바로 눈앞의 사내를 통해 알게 된, 그런 진부한 진리였다.

‘죄짓지 않은 이는 도망칠 필요가 없다.’

닥친 일에 두려워할 필요도, 지레 겁을 먹고 숨을 필요도 없다.

“목 소협.”

“말하시오!”

“제가 만약 이번 비무에서 좋은 결과를 낸다면 말입니다.”

“낸다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리원이 눈을 끔뻑였다.

잠시 입을 멍하게 벌리고 그러다 이내 활짝 웃어버렸다.

“얼마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 안에서라면 무엇이든 해드리겠소!”

‘무엇이든.’

좋은 답이었다.

당화서는 또 그 답에 기대를 걸고 싶었다.

자신의 욕심을 앞세운 부탁을, 이 승부에서 이기면 함께 무림맹으로 가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하지요.”

하여 당화서는 속에 차오르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꾹 억누르고, 그 위로 목리원의 확답을 얹으며 말했다.

“꼭 지키셔야 합니다.”

당화서가 결의에 차 웃었다.

하나, 원체 인상이 딱딱한 당화서인지라 그 미소엔 왜인지 협박의 기색 또한 묻어있었다.

“무, 물론…!”

목리원은 괜히 무서워졌다.

*

비무날이 밝았다.

목리원과 현공 때의 비무가 그랬듯, 오늘 역시 비무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차오르는 열기와 습기, 그리고 함성.

목리원은 제게 할당된 꽤 한산한 자리에 앉아 비무대 위로 오르는 당화서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맞은편의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여전히 푸르기만 한 벽안.

그리고 날카로운 인상과 중압감을 품은 기도.

‘확실히 수준이 다르긴 하구나.’

이리 서현에 있던 중 제갈산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남궁진천이 살아온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목아우, 그것 아나? 남궁형이 자라며 먹은 영약 값만 따져도 안휘에 성 한 채를 지을 정도라네. 얼마나 대단한 영약을 발라 넣었는지 일각에선 남궁 형의 몸엔 아직 채 흡수되지 않은 영약들이 내단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

그가 저런 내력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영약을 먹었는지.

­아, 그 얘기도 있네. 남궁형이 자라는 동안 말일세, 그러니까 약 10세 때부터 17세 때까지. 남궁형의 대련을 맡기 위해 전대의 고수들이 돌아가며 안휘를 찾아왔었다네.

그가 경험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수와 검을 나누었는지.

­그러니까 말일세, 어쩔 수 없는 일이네. 남궁형에게 이 용봉지회는 결국 애들 장난 같은 것이야.

그가 이 용봉지회에 어떤 감상을 지닐지까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나요?”

생각이 이어지던 중, 목리원의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리원은 그것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혜운 스님?”

백봉 혜운이 있었다.

그 곁엔 헤벌쭉한 표정의 사내 하나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리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용봉지회에 올 때마다 그리 남자를 끼고 다닌다더니, 이제야 그 말이 이해되는 와중.

“뭘 그리 기분 나쁘게 보십니까?”

혜운이 목리원을 노려봤다.

목리원은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아래로 박았다.

“아, 아무것도….”

“흐음….”

혜운은 목리원을 잠시 보다 이내 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곁에 있던 사내는 두 사람의 대화엔 관심도 없는 것인지 연신 히죽거리기만 바빴다.

섭혼술에라도 당한 사람 같았다.

“독봉을 응원하십니까?”

“당연한 일 아니오? 소저는 꼭 멋진 모습을 보여줄 거요.”

“이길 거라곤 말하지 않으시네요.”

목리원의 입이 다물렸다.

그의 얼굴엔 머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기길 바라고 있긴 하오.”

돌려 건네는 답이었다.

혜운은 무심한 얼굴로 그 미소를 바라보다, 이내 비무장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사리분별은 하는 건가.”

“무슨 말이오?”

“혼잣말입니다.”

혜운은 비무장 위에 선 당화서를 바라봤다.

‘대단하긴 하지.’

당화서는 무인으로선 존경할 점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 마음가짐이나 독한 성정, 그리고 내기를 운용하는 그 섬세함까지.

하나, 결국 그뿐이었다.

“뻔한 승부네요.”

상대가 남궁진천이다.

그리고 승자 또한 남궁진천일 것이다.

“몇 수나 버틸지 모르겠어요.”

삼 초.

많아 봐야 그 정도일 터.

확신을 담은 혜운의 말에 목리원은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응? 무슨 말씀이신지요.”

“왜 소저가 버티기만 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오?”

목리원은 진정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혜운에게 말했다.

혜운으로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목 시주님도 아시지 않나요? 독봉은 검룡에게 못 이겨요.”

“부정하진 않겠소. 하나, 그것이 소저가 처참히 패할 것이란 말은 아니었소.”

당최 알 수 없는 소리였다.

혜운은 그가 사랑에 눈이 멀어 헛된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되기까지 했다.

하여 차오르는 두통을 억누르던 중.

“아! 소저가 이곳을 봤소!”

목리원이 당화서를 보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혜운 또한 당화서를 바라봤다.

‘어우, 따가워라.’

눈빛으로 사람을 죽이려면 저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혜운은 잠시 자신을 노려보는 당화서의 눈빛에 헛웃음을 내뱉다, 이내 하나의 행동을 개시했다.

굳이 이유를 찾으라면 장난기, 그리고 이 멍청한 사내를 골려주고 싶다는 나쁜 마음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턱­.

혜운이 목리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목리원은 굳었고, 당화서의 눈엔 핏발이 섰다.

‘재밌네.’

역시 놀려먹는 맛이 있는 한쌍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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