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35화 (35/334)

〈 35화 〉 오장 ­ 용봉지회 (8)

* * *

순식간에 끝내겠다.

그리 마음먹은 두 여인이었으나 승부는 그리 쉽게 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준 차이가 극심한 것도 아닌, 일류의 끝자락에 걸친 이와 막 절정의 초입에 들어간 이의 비무였으니.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서로를 너무 잘 아는 두 무인의 비무였으니.

투웅­!

쏘아지는 혜운의 검이 당화서의 권에 튕겨 나간다.

검면을 후려친 것이다.

이어지는 것은 당화서의 조법.

혜운은 몸을 크게 뒤로 물리는 것으로 목을 향해 날아오는 손을 피했다.

두 여인은 동시에 생각했다.

‘역시….’

까다롭다.

당화서의 무공은 끔찍하리만큼 섬세했다.

이는 독기의 통제를 위해 평생을 아파해온 그녀가 살기 위해 터득한 기예였다.

한 줌의 독기라도 잘못 흐르지 않도록 언제나 스스로의 몸을 정련해온 당화서는 그 성정만큼이나 세밀하게 내력을 운용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혜운이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봉(?)의 이름을 받은 기재.

유쾌하지 않은 소문이 항상 뒤를 따라다님에도 그녀가 아미의 대표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재능 탓이었을 정도로, 그녀는 뛰어난 검수였다.

빠르게 몰아치면서도 신기루처럼 흩어지는 검법.

그것은 당화서에게 하나의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퉁­!

또다시 튕겨 나가는 검.

그리고 비무장 위로 퍼져나가는 독기.

혜운은 이를 빠득 갈았다.

‘더럽게 짜증나네.’

절정과 일류 사이에는 벽이 있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절대 뚫지 못할 벽이.

하나 이 또한 결국은 무공, 결국은 몸을 쓰는 일이다.

무인의 비무는 경지로 결정짓는 싸움이 아닌 만큼, 그 상성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당화서와의 비무는 검수와 맞붙을 때와 그 근본부터가 달랐다.

표독스럽게 자신을 노려보는 저 여인의 진짜 무기는 조법이 아닌 독.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몸에 저릿함을 일게 하는 이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마비독, 거기에 산공독.’

움직임이 둔해진다.

거기에 내공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흩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장기전으로 가면 필패.

그렇다고 단기 결전을 내기엔 방어가 너무 단단했다.

“까다롭네요.”

“스님 성격만 하겠소.”

“말투 한번 천박하셔라.”

“천박한 건 그쪽 몸뚱어리고.”

당화서의 눈에 핏대가 섰다.

분노나 짜증 따위의 감정도 분명 있었으나, 그보단 역시 그녀가 본격적으로 독기를 뿌리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꺼내시오. 검기.”

“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인지요?”

“전력을 다하지도 않은 상대에게 이겨 봐야 무어 즐거울까. 패배자에게 변명거리나 남겨주는 것이지.”

혜운은 웃음을 흘렸다.

“원하신다면.”

사아아­.

혜운의 검 위로 백색의 빛무리가 깃들었다.

아직은 제대로 자리잡지 않은 희미한 빛.

그녀의 검기였다.

‘도발일 테지.’

혜운은 알았다.

그녀의 말이 자신의 내공을 한시라도 빨리 닳아 없어지게 하려는 술수임을.

하나 그것이 도발에 응해주지 못할 이유는 아니었다.

어차피 아껴봐야 흩어질 내공.

좀 더 짧은 순간에 승부를 낼 수 있도록 몰아붙이는 게 그녀에게도 옳은 판단인 것이다.

“갑니다.”

당화서는 재차 긴장을 더 했다.

‘이젠 검에 닿아선 안 된다.’

곧 죽어도 검기다.

저리 희미하다 한들 검기다.

이제까지처럼 검면을 후려쳐보겠다고 깝죽거렸다간 그 기파에 내공이 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하나.

‘더 접근한다.’

당화서의 몸 주위로 아주 희미한 암녹색의 기파가 피어올랐다.

절정에 닿지 못하여 그 흉내만 겨우 내는 기파였다.

독기가 풀리며 전신이 찢어발겨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으나, 지겨우리만치 익숙한 통증이었기에 당화서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리하며 무공을 발현했다.

스으으­.

흑천독라공(?????).

4성에 이른 당문 직계의 비전이 그녀의 육신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이어 당화서의 신영이 흐트러졌다.

스륵­.

사영보(???).

그녀는 당문에 있을 적 발바닥이 다 부르틀 정도로 연습했던 그 보법으로 미끄러지듯 쏘아져 나갔다.

아래에서 위로 손을 크게 휘저었다.

빈틈이 여실히 보이는 동작이었으나, 혜운은 그것을 찌르는 것이 아닌 후퇴를 선택했다.

당화서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기파에서 지독한 독기를 느낀 탓이다.

“쯧, 눈치는 또 빨라선.”

“칭찬 감사합니다.”

혜운이 검을 휘저었다.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던 독기가 검풍에 휩쓸렸다.

찰나 깨끗해지는 공기에 혜운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재차 쏘아져 나갔다.

비무는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

과거의 일이었다.

이제 막 14세, 혜운이 용봉지회에 참석할 자격을 얻은 나이에 있었던 일.

그때의 혜운은 그녀를 아주 많이 좋아했었다.

그 감정에 동경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옳을 정도로.

­반갑습니다. 시주께서 바로 그 독봉이 맞으시지요?

­누구시오?

­아! 저는 아미의 혜운이라 합니다.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

­아… 아미파. 만나서 반갑구려. 한데 지금 내가 인사를 나눌 경황이 없어 그런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소?

­아, 네!

자신보다 일 년 앞서 용봉지회에 참여한 여인.

그리고 14세의 나이로 독봉(??)이라는 별호를 얻은 여걸.

당시의 당화서는 어린 혜운에게 그다지도 빛나는 사람이었다.

­어때? 정말 멋있지 않니?

­무시당한 것 같….

­뭐 어떠니, 지금이야 그렇겠지만 내가 본선에 나가면 다를걸? 아니, 이번이 아니어도 계속 성장하면 다를걸? 오히려 좋은 일 아니야? 저 표정이 바뀌는 걸 구경하는 것도 유흥거리가 되리란 거잖아?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일조차도 기껍게 여겼다.

당화서는 용봉지회가 있는 내도록 홀로 시간을 보냈으나, 그 고독조차 매력으로 화할 정도로 고고한 사람이었으니.

14세의 혜운은 그만큼 그녀의 모든 것을 동경했으니.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면 무공으로 증명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와 같은 선상에 설 정도로 재능있는 여걸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난 자신 있거든. 분명 독봉도 날 인정하게 될 거야.

혜운은 그 말을 증명했다.

바로 다음 해인 15세 때의 용봉지회에서.

­백봉, 그런 별호를 받으셨더구려.

­과분한 별호죠.

­겸양 떨 필요 없소.

­티가 나던가요?

기뻤다.

드디어 당화서와 같은 선에 오른 것이.

그녀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이.

어쩌면, 그녀에게 도발의 말이나 했던 것은 그런 이유일지도 몰랐다.

­음, 들리는 말들론 제가 당 시주님을 제칠 거라고 하더라구요.

­겸양을 떨지 말라 했지, 오만하라 말한 적은 없는데.

­자신 없으신가요?

­스님께선 주제를 모르는 분이시구려.

­비무대에 오르면 알겠죠.

­마침 다음 경기로군. 내 스님의 불심에 조금 도움을 줄 수 있겠어.

그 해의 혜운은 당화서에게 패배했다.

삼초지적에 끝난 일방적인 승부였으나, 그럼에도 기뻤다.

그 해 비무에서 그녀를 상대하며 삼 초를 넘긴 것은 자신과 남궁진천 뿐이었으니.

16세의 당화서는 아직 자신이 동경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당 시주님! 다음번엔 꼭 제가 이길 수 있도록 노력….

­할 필요 없소.

­네?

­…그리만 아시오. 아, 색은 적당히 즐기시고. 그다지 좋은 취미는 아닌 것 같더구려. 지금에야 식사 자리나 한다 한들, 정도를 넘으면 돌아오기 힘들지 않겠소?

­으읏…!

그랬기에.

그다지도 그녀를 동경했기에.

혜운은 당화서가 미웠다.

­…도주, 말입니까?

­예, 당문에서는 부정하고 있지만 도주가 확실하죠. 그러지 않고서야 당문이 그리 선보이고 싶어 안달하던 독봉이 반년째 칩거할 리가 없잖습니까?

마지막 만남이었던 15세의 용봉지회 이후, 당화서의 모든 행적이 끊겼다.

겨우 조별 결승까지 올라 백봉(白?)의 이름을 받았건만, 드디어 그녀의 호적수로서 강호에 인정받기 시작했건만 그것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간 것이다.

그날의 혜운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고고하던 그녀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우상이 스러졌다는 것에, 꼭 손에 쥐고 싶었던 보물을 잃은 아이처럼 방황하던 혜운이 내린 결론은 결국 그런 형태였다.

­…그것밖에 안 되는 여자였던 거지.

보답받지 못한 마음이 으레 그렇듯 그녀는 그제까지 품었던 동경을 분노로 만들었다.

다 타들어 간 동경을 그러모아, 그것을 양분으로 불꽃을 피워 올렸다.

­멍청하긴.

그렇게 성장했다.

­검기상인! 대단해요! 어떻게 벌써부터….

­호들갑 떨지 말렴. 아직 멀었으니까.

­네?

­시간은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지 않니. 어쩌면 독봉은 더 높은 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게잖아.

­에이, 벌써 5년 째인 걸요. 뭐 강호야 아직 사저랑 독봉을 붙여두고 입씨름하지만, 도망이나 다니는 여자가 어떻게 사형이랑 같이….

­사매.

­네, 넵!

­도망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잖니. 당문도 구파도 세가도, 그 누구도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 말하지 않았어.

어쩌면 아집일지도 몰랐다.

혜운은 그저 자신이 증명하기도 전에 사라진 당화서에게 자신의 이름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렴, 이미 깨져버린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 이어 붙이고 싶었을 정도로 깊은 동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다림은 길었다.

원망이 되어버린 동경은 그 일그러진 색채를 어둡게만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온 연회 날.

혜운은 이제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감정을 한 채 그녀를 마주하게 됐다.

­그 옷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웬 기생오라비를 곁에 두고 웃는 계집이 있었다.

절대 보여선 안 될 모습을 보이며, 자신을 앞에 있는 그녀가 있었다.

상상치도 못한 실망스러운 모습.

이 일그러진 동경이 드디어 끝을 맞이할 순간이건만, 그래야 맞는 얼굴이건만.

그 순간의 혜운은 실망이 아닌 다른 감정을 느꼈다.

­응? 소저, 왜 그러시오?

­아닙니다. 싫은 얼굴이 보여서.

우스운 일이었다.

그리 원망하고 있었음에도 당화서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어린 날의 빛이 다시 떠오르는 기분을 느껴버렸으니.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려버리는 자신이 있었으니.

‘무공은 내가 이겼네.’

그딴 생각이나 하며 좋아하는 스스로가 있었으니.

이어지는 모든 행동은 결국 그 연장선이었다.

‘어떻게 해야 독봉이 진심이 될까.’라는 고민 아래서의 행동인 것이다.

­6년이 지났을진대, 크게 변하신 건 없는 듯하군요.

그녀의 무공 수위를 헐뜯은 것도.

­뒤에 서 계신 시주님은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제가 소개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굳이 목리원에게 관심을 보이며 그녀를 자극한 것도.

­당시주님은 제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요. 승부욕이 강하신 분인 만큼 저와 같은 선상에 놓이는 것에 분을 느끼셨을 수도 있으실 테구요.

목리원을 통해 그런 이간질의 말을 전한 것도.

‘뭐, 사심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그 사심 쪽은 완전히 식어버렸으니 둘째치고,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당화서가 진심이 되었으니 상관없는 일.

혜운은 그저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이 없는 5년간 내가 이만큼이나 성장했다는 것을.

또한 확인하고 싶었다.

당화서라는 여걸이 아직 건재한지를.

빠아악­!

그렇기에, 자신의 명치에 주먹이 꽂히는 순간.

혜운은 숨이 턱 틀어막히는 고통에도 웃을 수 있었다.

*

순간의 틈을 노린 일격이었다.

당화서는 주먹에서 느껴지는 손맛에 유쾌한 듯 미소 지었다.

쨍그랑­.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이는 맑은 소음, ‘쿨럭’하고 기침을 내뱉는 혜운, 이어지는 사회자의 선고까지.

[독봉! 승리!]

“와아아아아아!!!”

당화서는 그제야 자신이 승리했음을 깨닫고 주먹을 거뒀다.

혜운은 무릎을 꿇은 채 끅끅대는 와중에도 웃으며 말했다.

“비겁하게 산공독이 뭔가요?”

“비겁은 무슨, 상정하고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니오.”

“와, 뻔뻔해라.”

“스님껜 듣고 싶지 않은 말이구려.”

당화서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참….’

몇 년이 지났음에도 한결같이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말본새는 비구니 같지 않고, 색을 탐하는 그놈의 성정은 더욱 비구니 같지 않았다.

‘떠나기 전 굳이 충고까지 해줬는데.’

그놈의 색은 왜 그리 밝히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사실상 그런 점 탓에 혜운이 못마땅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나, 그런 당화서조차 인정하는 것은 있었다.

“무공은 쓸 만해지셨구려. 아직 나한테는 안 되지만.”

혜운의 고개가 들렸다.

그녀는 잠시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푸흡’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산공독 대비만 했어도 제가 이겼을 텐데요?”

그리 말하곤 철푸덕.

혜운이 바닥에 엎어졌다.

패배한 주제에, 그녀의 얼굴 위론 시원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 속상해라.”

웃기지도 않는 엄살.

혜운은 그런 말이나 중얼거리며 기꺼운 기분을 만끽했다.

짧은 비무였지만 그 결과물은 달콤하여라.

긴 시간 얼룩지고 일그러진 혜운의 동경은, 겨우 명치에 꽂힌 주먹 하나로 말끔하게 자리를 되찾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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