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오장 용봉지회 (4)
* * *
“스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오시는 길에 다른 일은 없으셨습니까?”
일운은 당황했다.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당화서와 제갈산의 환대 탓이었다.
“예, 예에… 도시 내에 사고랄 게 없었으니….”
반가워 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건 너무 가지 않았나.
그런 생각마저 떠오르는 와중, 목리원이 환히 웃으며 의자 하나를 더 가져왔다.
“스님! 여기 앉으시오! 오늘은 그때 약속했던 이야기를…!”
“아, 얼마든지요.”
일운은 지그시 웃으며 목리원의 호의에 화답했다.
그리하며 당화서와 제갈산을 바라봤다.
왜인지 부담스러운 시선들이었다.
“아참, 이리 스님께서 오셨으니 먹을 것이라도 더 가져와야 하는 것 아니오? 기다리게 목아우. 내 금방 다녀올 터이니 그동안 스님 말 상대라도 해드리게나.”
“알겠소!”
제갈산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스님, 내 스님 입맛대로 가져와 보겠소!”
턱!
일운은 제갈산의 손목을 잡았다.
그 손엔 금방이라도 제갈산의 손을 으스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실려 있었다.
“식사는 되었습니다. 오기 전에 나물로 끼니를 떼운 지라.”
눈물겨운 방어라 할 수 있으리라.
일운은 제갈산이 혹시 고기 요리를 눈앞에 내밀까 노심초사하며 그를 자리에 앉혔다.
“큼, 크흠…. 그래서 다른 분들과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셨는지요?”
“아, 다들 무리를 이루고 있어서 아직 먼저 다가가지 못하였소.”
목리원의 시무룩한 대답에 일운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지요.’
생각해보면 이 연회엔 이들과 교분이 있는 이들이 없었다.
그나마 있을 사람이라곤 제갈산이었지만, 연회에 그에게 먼저 말을 걸 정도로 담이 큰 사람이 있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지 않던가.
일운은 그제야 이들이 자신을 보자마자 환대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머쓱하긴 하셨나 보구나.’
기껏 나온 연회에 이리 구석에만 박혀 있으니 무안할 만도 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그럼 저와 같이 돌아다녀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저야 다른 시주님들과 인사를 나누어야 하는 입장이니, 겸사겸사 목 시주님께 다른 분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이런 일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그리 말하는 중, 일운의 시선이 당화서를 향했다.
“같이 가시지요. 당 시주님도 이곳은 6년 만에 들르는 것이 아닙니까.”
“예에… 뭐.”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아래로 주먹을 꼭 쥐었다.
‘나쁘지 않다.’
좋은 기회였다.
오늘 연회에서 그와의 친분을 더 다져주면 후일에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니.
“그럼 가지요. 아, 먼저 아미파 분들께 인사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당화서의 몸이 멈칫했다.
“아미… 말입니까.”
왜 하필 아미파가 먼저인가.
그런 원망이 떠올랐지만, 생각해보면 또 당연한 일이었다.
소림과 아미는 같은 불가 계열의 문파였고, 또한 저 백봉은 음탕한 성정을 제외하고 봤을 때 무학의 깊이만큼은 인정해야 할 여인이었으니.
당화서는 속에 떠오르는 불편함을 꼭 눌러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목리원 또한, 직전 들었던 백봉의 소문에 당화서와 비슷한… 아니, 그녀와는 결이 다른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새, 색봉….’
자칫 잘못하다간 사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나 떠올리는 와중.
“일운 스님, 일 년 만에 뵙지요?”
“아, 혜운 스님.”
자신들의 얘기를 하는 것을 알았는지, 그도 아니면 그저 일운을 보고 온 것인지 백봉 혜운이 아미파의 제자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일운과 혜운이 웃으며 합장했다.
그러던 중, 목리원은 흠칫 몸을 떨었다.
‘왜, 왜 날 보는 것이냐…!’
혜운이 실눈을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인지 입가의 미소 또한 음흉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움찔움찔 몸을 떤 목리원은 저도 모르게 당화서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 움직임에 혜운의 미간이 좁아졌다.
다시 고개를 든 직후, 혜운은 순간 드러났던 인상을 모두 지운 채 당화서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당 시주님?”
“…그렇구려.”
짧은 침묵.
그 속에서 제갈산이 목리원에게 속삭였다.
“목아우, 이게 여인들의 기싸움이라는 것이네.”
“과, 과연…!”
목리원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당화서를 응원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저 저 새하얀 여인이 너무 무섭게 느껴진 까닭이다.
“당시주님은….”
혜운은 그리 말꼬리를 늘리며 당화서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하다 히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6년이 지났을진대, 크게 변하신 건 없는 듯하군요.”
언뜻 칭찬으로 들릴 수 있는 말.
하나, 이는 무인에겐 한없이 모욕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녀는 지금 당화서의 무위가 변하지 않았음을 꼬집고 있는 것이었으니.
“글쎄,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건 아닐는지.”
“그런가요?”
“그리 말하는 스님께서도 아직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구려.”
혜운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그러다 다시 아래로 쳐지며 얼굴 위로 싱긋 웃는 미소를 그려냈다.
“뭐, 비무대에서 만나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화서는 차오르는 짜증을 억눌렀다.
그녀의 말에 무어라 더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은 실로 반박할 거리가 없었던 까닭이다.
가문을 나와 5년.
당시 일류의 중입에 있던 당화서는 아직도 절정에 다다르지 못했다.
가문의 모든 지원과 교육, 그리고 그 속에서 흡수할 독기를 포기하며 부진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자신을 깔보는 경쟁 상대에게 할 말이 궁한 것은 그녀로서도 답답할 수밖에 없는 법.
‘이래서 마주하기 싫었건만.’
그런 생각이나 떠올리는 당화서에겐 안타까운 일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혜운의 관심이 목리원에게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뒤에 서 계신 시주님은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제가 소개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순간, 당화서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기분을 느꼈다.
그 기색에 따라 부릅 뜬 눈에 실핏줄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저분은 목시주님입니다. 혜운 스님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근래 묵검(??)이라는 별호로 이름을 날리고 계신 분이지요.”
그런 당화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운의 소개가 이어졌고, 혜운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 묵검…!”
주춤.
목리원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초승달모양으로 휘는 그녀의 눈이 너무 무섭다는 생각 탓이었다.
목리원의 본능은 말하고 있었다.
‘아, 안 된다…!’
저 여인은 해로운 여인이라고.
“목 시주님? 이렇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혜운의 미소가 짙어졌다.
퍽이나 요사스러운 미소였다.
‘귀여워라.’
이번엔 꽤나 먹음직스러운 장난감을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혜운은 차오르는 희열에 한껏 즐거운 마음을 떠올렸다.
“내 일행이오.”
당화서의 말은 그런 혜운의 속에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일행 정도가 아닌데?’
꽤나 애틋한 사이로 보인다.
직전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화서의 뒤로 숨던 목리원도 그렇고, 자신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자마자 저리 불같이 화를 내는 당화서도 그렇고.
‘뺏는 재미가 있겠어.’
킥. 웃음이 흘러나왔다.
비구니라는 업을 지고 있음에도 어찌할 수 없는 그녀의 기벽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일행이라…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어도 되겠습니까?”
혜운은 상상했다.
언제나 고고할 줄만 알던 저 당화서가 사내를 뺏기고 지을 표정을.
멀어지는 관계에 안절부절못하며 추하게 무너져내리는 것을.
‘즐거워라….’
역시 산골에 박혀 불공이나 외우는 것보단 이런 것이 훨씬 좋았다.
“소, 소저….”
목리원이 움츠러든 채 당화서에게 도움을 구했다.
당화서는 그 목소리에 이성을 찾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여기서 혜운이 조금만 더 그에게 다가갔다간 주먹을 날릴지도 모를 정도로 당화서는 짜증이 잔뜩 차올라있는 상태였으니.
당화서는 슬쩍 자신의 옷소매를 붙잡는 목리원의 움직임에 마음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으시구려.”
“남이라니요. 그리 섭섭한 말씀을.”
“스님께서 속세의 연에 그리 관심을 가지셔도 되는 줄은 몰랐구려.”
“아직 수행이 모자란 탓이지요. 하나, 어찌하겠습니까.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이라면 차라리 마주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겠지요?”
“글쎄, 변명으로만 들리는구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날카로워져 갔다.
아니, 당화서가 일방적으로 날카롭게 반응했다.
처음에야 이게 무슨 일인가 하던 일운조차 그 기색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경직되는 분위기.
그것에 제갈산이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짓던 와중.
쿠우웅.
연회장의 대문이 열렸다.
*
이변은 순식간이었다.
침묵이 깨진다.
날카롭던 분위기가 그 색을 잃어간다.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몰린다.
“…왔구먼.”
누군가가 못마땅하다는 듯, 질투를 담아 말을 내뱉는다.
저벅.
한 사내가 연회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목아우, 한눈에 봐도 알지 않겠나?”
제갈산의 말.
그것에 목리원 또한 그제까지의 모든 당황을 지워내고 멍하니 입구를 바라봤다.
짙푸른 비단 장포가 휘날린다.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미남자가 굳은 얼굴로 연회장의 중심을 향한다.
그런 중에도 참으로 기이하게만 느껴지는 특징 하나가 목리원의 시선을 확 사로잡고 있었다.
마치 새파란 하늘을 떠올리게 만드는 벽안(??).
바로 그것이었다.
“남궁진천….”
“그래, 저 사내가 바로 남궁형이네.”
남궁진천의 등장은 그것만으로도 충격이었다.
그가 내딛는 걸음엔 이루 무시할 수 없는 중압감이 실려 있었고, 또한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절정의 끝자락.’
그의 나이가 올해로 스물 둘.
당화서와 동갑이라 했다.
한데, 그는 벌써 그 지경까지 가 있는 것이다.
존재감만으로도 공간을 휘어잡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목리원이 생소한 충격에 휩싸여 멍한 얼굴을 만들던 와중, 제갈산이 웃으며 목리원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이번 대의 주인공. 후기지수들의 왕. 검룡. 수많은 칭호가 남궁형을 치장하지만, 그런 별칭들을 모두 제치고서 떠오른 별칭이 있다네.”
그리고 말했다.
“차기 천하제일인.”
“차기 천하제일….”
제갈산은 여전히 낄낄대는 채였다.
“이야, 참으로 부럽지 않나? 태생부터 다르다는 말을 이리도 잘 표현한 사람이 없을 것이란 말일세.”
“태생…?”
“남궁형은 별을 타고났거든.”
그 단어에 목리원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재차 시선은 정확히 그의 푸른 동공을 향했다.
“제왕성(?王?). 남궁형은 이 땅에 난 순간부터 군림의 운명을 약속받은 사내라네.”
순간, 남궁진천이 목리원을 바라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