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7화 (27/334)

〈 27화 〉 사장 ­ 안휘 (8)

* * *

“그럼 부탁하겠네.”

그 말을 남긴 제갈산이 뚫려있는 담벼락 쪽으로 넘어갔다.

멍하니 서 있던 장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흉신악살과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쪼, 쫓아! 가서 잡아 오란 말이….”

“안 되오.”

멈칫­.

몸을 움직이려던 이들이 멈춰 섰다.

목리원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당신들은 저들을 쫓을 수 없소. 내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오.”

서늘한 통보였다.

내공 한 줌 싣지 않은 말이었음에도, 자리한 이들은 그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장로는 코앞에서 목표를 놓친 것에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 게냐…!”

“모르오.”

“그럼 빠지….”

“하지만.”

목리원은 그리 단서를 달고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나는 출신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를 의로운 이라 여기지 않소. 그 명령을 따르는 이를 의로운이라 여기지 않소. 또한, 슬퍼하는 여인을 핍박하는 이를 의로운이라 여기지 않소.”

말이 이어질수록 목리원의 기도가 날카로워졌다.

“그런 이유로, 나는 당신들을 악적이라 보오.”

장로는 이어지는 말에 뿌득뿌득 이를 갈며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도저히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 상황.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방해꾼.

이 모든 것이 장로의 속에 떠오른 분노와 뒤섞이며 썩 그럴싸한 추측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스스로의 기준에서나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개소리! 의는 무슨! 네놈도 한 패였던 게야! 아니, 필시 한 패일 테다! 그 찢어 죽일 상단의 개새끼인 것을 모를 줄 알더냐!!!”

삿대질까지 이어가며 하는 외침 속에 깃든 것은 저열하기 그지없는 자기합리화였다.

목리원은 미간을 좁혔다.

“상단?”

“모른 체 하지 마라! 저 망할 계집도, 주둥아리만 산 놈도, 네놈도! 모두 ‘천하상단’의 발닦개가 아니더냐!!!”

“그게 무슨….”

“가아아아알­!”

장로의 뺨이 푸들푸들 떨렸다.

목리원은 일그러진 그의 표정 속에서 증오를 읽어낼 수 있었다.

‘천하상단.’

목리원도 아는 상단이었다.

아무렴, 일전 잔혈곡의 바로 앞마을에서 마구간의 말을 모두 쓸어간 상단이 바로 그곳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강호를 나오고 벌써 두 번.

안 좋은 사건으로 연속해 얽히게 되니, 목리원의 속에 상단에 대한 괜한 거부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찢어 죽일 상단 놈아. 얼마나 더 가져야 속이 시원해지겠느냐? 응? 대체 얼마나 더 욕심을 부려야 만족하겠느냔 말이다!”

“나는 그곳 소속이 아니….”

목리원은 하려던 말을 멈췄다.

‘…아니, 굳이 정체를 밝힐 이유는 없겠지.’

목리원은 바보가 아니었다.

상대가 오해해주는데 굳이 해명할 이유가 없음을 잘 아는 것이다.

“…알아서 생각하시오.”

그의 말에 장로는 그제야 희열이 묻어나는 얼굴로 낄낄 웃었다.

“역시! 역시 그랬어! 이게 다 상단 놈들의 음모였던 게야!”

얼핏 광인의 것으로도 보이는 미소였다.

“쳐라아아아­!”

장로가 크게 외치자 무인들이 쏘아져 나왔다.

목리원은 작게 숨을 내뱉곤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빠아아악­!

세 방향에서 찔러 들어오는 세 명의 검수를 단번에 후려갈기고, 이어 포위된 위치에서 빠져나가 대열의 측면을 무너뜨리며 목리원은 생각했다.

‘검을 뽑을 필요도 없겠군.’

살기조차 흔들리는 나약한 무인들.

노망난 늙은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발작하는 두꺼비.

목리원에게 이들은, 악적이라는 말조차 아까운 소인들이었다.

*

제갈산은 여인을 등에 업은 채 한참을 내달렸다.

발걸음엔 더 이상 내공이 실려있지 않았고, 호흡은 한참 전에나 흐트러졌으나 그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목리원이 그 많던 무인들 사이를 파고들어 만들어준 기회가 아니던가.

괜히 불안해하며 뒤를 돌아보거나, 안심하며 잠시 쉬어가는 등의 여유를 부릴 틈이 없는 것이었다.

풍경이 바뀌어 갔다.

장가장에서 거리로, 거리에서 또 다른 거리로.

그렇게 도시의 가장 남루한 구석으로.

제갈산은 판자를 대충 때워 만든 비루먹을 거리에 도착하고서야 겨우 걸음을 멈췄다.

“…도착이구려.”

“….”

여인은 입술을 앙 깨물며 거리를 바라봤다.

어두운 골목이었으나 그럼에도 고향이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그리고 하나뿐인 가족이 있는.

신기한 일이었다.

이곳에 좋은 기억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을진대, 이리 마주하니 안락함이라고 해야 할 묘한 기분이 떠올라버리는 것이다.

“감… 사….”

여인은 그제야 실감했다.

살을 에는 추위보다도 더욱 싸늘했던 시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곁에 그 누구도 없다는, 사무치는 외로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비록 휘황찬란하지 않을지언정 따스함은 남아있던 곳으로 자신이 돌아왔음을.

“감, 사합….”

“아직 감사는 이르오.”

제갈산은 목덜미로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모른 체 하며 싱긋 웃었다.

“자, 갑시다. 동생이 기다리고 있지 않소.”

그리 말하고 천천히 여인을 내려줬다.

여인은 잠시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다, 이내 제갈산이 내어준 팔에 몸을 기대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누님!”

“창아!”

남매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여인이 창이라 부른 앳된 기가 남아있는 청년은 여인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그녀를 끌어안았다.

여인은 달려오는 청년의 모습에 더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끌어안았다.

“아니, 누님. 어찌 여기까지… 아, 대협!”

“사흘만이구려?”

“대협이 여기 계시다는 것은….”

“장가장에 다녀왔소. 부탁받은 대로 누님분을 뵈러 갔는데, 아무래도 잘 지내시진 못하는 것 같아 이리 오지랖을 부려봤소.”

청년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는 제갈산과 누이를 번갈아 보다, 뒤늦게야 제갈산의 말뜻을 깨닫고 탄식을 흘렸다.

그러고선 누이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누님, 고생하셨습니다.”

“흐으으….”

“대협께도 감사….”

“되었소. 그냥 내켜서 한 일일 뿐이니. 그보다 그쪽 누이나 좀 어찌 해보시오. 계속 저러다간 내일 눈이 팅팅 불어 버릴 것이오.”

제갈산이 장난스레 말했다.

청년은 그 말에 뒤늦게야 푸흡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누님. 어서 뚝 그쳐보십시오. 대협께서도 그만 울라 하시잖습니까.”

“흐으으….”

여인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아직 쏟아낼 그리움이 많아, 그간 참아온 울분을 다 쏟아내려는 듯 그녀는 계속해 울었다.

여인이 울음을 그친 것은 청년의 옷섬이 그녀의 눈물과 콧물로 다 더럽혀진 이후였다.

*

주먹으로 벽을 치면 무너질 것 같은 판잣집 안.

제갈산은 그 가운데 앉아 나란히 앉은 남매를 바라봤다.

“이리 보니 꼭 닮으셨구려. 누가 봐도 남매라 할 만하오.”

그의 말에 청년은 웃었고, 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야 자신의 추태를 인지한 것이었다.

“못난 꼴을 보여 죄송….”

“거 왜 또 죄송하고 그러시오. 좋은 날이지 않소.”

여인은 피식 웃었다.

‘좋은 날….’

지금 이 순간을 그것보다 잘 표현할 방법은 없으리란 생각 탓이었다.

아무렴, 그렇지 않나.

진정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호화로운 식탁이나 값비싼 보화들이 아닌, 곁을 지켜주는 따스한 가족인 것이다.

“이제 어떡하실 것이오?”

제갈산의 물음에 여인은 작게 웃으며 손을 배 아래로 가져다 댔다.

“날이 밝기 전에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안휘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기반을 다지고 싶습니다.”

청년은 여인이 배를 쓰다듬는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다.

여인 또한 그런 시선을 눈치채고 웃었다.

“창아, 네가 삼촌이 되는 것이다.”

“이게….”

“같이 가자꾸나. 이젠, 정말 굶주리지 않고 잘 살 수 있을 게야.”

“…누님, 하지만 저희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배운 게 하나도 없는 것을요.”

“포목점은 어떠하냐.”

“예?”

“포목점 말이다. 내 그곳에서 지내며 비단을 보는 눈 정도는 익혔으니 걱정일랑 말거라.”

제갈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청년과 이제야 환히 웃는 여인을 그저 바라봤다.

그리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역시….’

그녀는 미인이었다.

웃는 모습이 훨씬 아름다운.

“나는 이제 가보겠소.”

제갈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매는 화들짝 놀러 그를 따라 일어서려 했고, 제갈산은 손사래를 치며 그것을 제지했다.

“나는 되었으니 회포나 푸시오. 남매가 함께 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그렇소.”

“하나….”

“괜찮대도.”

제갈산이 킥킥 웃자 여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말도 슬슬 귀에 딱지가 앉으려 하는구먼.”

“하나, 그럼에도 감사합니다.”

“그마….”

“…홍선.”

여인, 홍선의 말에 제갈산의 움직임이 멎었다.

홍선은 드디어 자신을 바로 바라보는 제갈산을 보며,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홍선입니다. 동생의 이름은 홍창이고. 부디 저희 이름을 기억해주시겠습니까?”

홍선.

홍창.

제갈산은 그 이름들을 마음에 새겼다.

하나, 이제까지 그랬듯 그는 이 이름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고 꺼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과거에 구한 이들을 추억하며 멈춰 설 시간이 없는 이었으니.

다만 묻어두고 나아가리라.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멋진 이름이구려. 내 꼭 기억하도록 하지.”

제갈산이 등을 돌렸다.

남매는 그 모습에 아쉬움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말 보답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남매는 자신들에게 온 것이 누군가는 평생 한 번도 겪지 못할 행운임을 알았다.

하여 어떻게든 보답하고자 그리 물었으나, 제갈산은 역시 완고했다.

아니, 이번만은 그 완고함에 재치를 더했다.

“하면 말이오.”

제갈산은 고개만 돌려 남매를 바라봤다.

이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좋은 어머니가 되어주시오. 나는 그것이면 될 것 같소.”

그 말을 끝으로, 제갈산은 거리를 나섰다.

*

새벽이 밝았다.

어떤 남매가 야음을 틈타 도시를 빠져나간 새벽이었고, 슬퍼하는 여인의 입가에 미소를 띄워준 두 사내의 눈가에 눈물이 매달린 새벽이었다.

“참 큰일 하셨습니다?”

막 장사를 시작한 객잔 안.

바닥에 무릎 꿇은 두 사내는 서늘한 당화서의 목소리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목리원의 양 뺨은 꼬집힌 흉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제갈산의 정수리엔 볼록한 혹이 올라와 있었다.

“벙어리라도 되십니까? 왜 말을 못 하십니까?”

당화서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발끝을 까딱이며 두 사내를 채근했다.

그러자, 목리원이 슬쩍 의견을 말했다.

“혀, 협을 행하고 왔….”

“목 소협은 거짓말을 협이라 이르십니까?”

목리원의 입이 꾹 다물렸다.

실로 그랬다.

오늘은 일찍 자겠다고 방에 들어가 놓고 몰래 탈출한 것이니, 목리원은 입이 열 개라도 그녀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없는 것은, 지금 두 사내에게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대단들 하십니다. 이 이른 새벽에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십니까? 세상에, 장가장에 괴한이 들었다지 뭡니까. 장가장의 무인과 장로들이 괴한에게 두드려맞고 앓는다지 뭡니까.”

척­!

당화서가 검지로 객잔 밖을 가리켰다.

“도시의 출입구에 검문이 있습니다. 장가장의 무인들이 괴한들을 찾아내겠다고 아주 난리를 치고 있더군요. 다들 몸에 부목을 댄 채로 말입니다.”

두 사내의 몸이 움찔 떨렸다.

당화서는 그 꼴에 뒷골이 확 당겨오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목 소협이 한 일이니 나쁜 일은 아닐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을 벌일 거면 뒷수습 정도는 생각하셨어야지요.”

“죄송….”

“사과나 할 거면 입 다무십시오.”

“….”

당화서는 슬슬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에 손을 댔다.

‘썩을 검문.’

곤란했다.

장가장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장원이었고, 그런 만큼 도시에 끼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

자신과 제갈산이 있으니 세가의 이름으로 검문을 뚫을 수는 있겠으나, 그 과정에서의 갈등이나 이후의 수습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속이 뒤집히는 것이다.

“흐으…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한탄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목리원은 그저 고개를 깊이 숙였고, 제갈산은 슬금슬금 그녀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그… 누님?”

“헛소리면 이번엔 주둥아리를 찢어주마.”

“…헛소리는 아니고, 제가 좀 좋은 생각이 있어서 그렇소만.”

당화서의 시선이 제갈산을 향했다.

핏발까지 서서 째려보는 눈엔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를 슥삭 해버릴 듯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제갈산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을 더했다.

‘잘못하면 진짜 죽는다.’

독에 절여져서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 한 번뿐인 기회를 잘 이용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순간, 목리원과 제갈산의 시선이 부딪쳤다.

목리원은 기대감이 묻어나는 얼굴로 제갈산을 바라봤고, 제갈산은 나만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고개를 돌려 당화서에게 말했다.

“변장, 변장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어떻소?”

당화서의 오른쪽 눈썹이 위로 들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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