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사장 안휘 (7)
* * *
한 식경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제갈산의 눈앞엔 어느새 채비를 마친 여인이 있었다.
“일단 장원을 빠져나가 동생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겠소. 혹 갈 곳은 있소? 먼 친척이라거나….”
“없습니다. 저희 남매는 어린 시절 길가에 버려진 터라.”
“저런.”
여인은 작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패물 몇 가지를 챙겨 나가는 것이니, 이것들을 팔아 다른 곳에서 기반을 마련하면 되겠지요. 대협의 말대로, 어차피 이곳에 남아있어 봐야 그 누구도 저를 반기지 않을 테니.”
그녀의 얼굴 위에 걸린 것은 미소였으나, 그 속에 깃든 것은 슬픔이었다.
제갈산은 잠시 그녀의 말을 곱씹다, 이번엔 다른 질문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두꺼비가 말한 직인은 무엇이오?”
“두꺼… 푸흡!”
여인은 웃음을 토해냈다.
어깨를 잘게 떨며 터져나온 웃음을 수습하다, 이내 숨을 가다듬곤 답을 이었다.
“말 그대로 가주의 직인입니다. 장가장에서 행하는 모든 사업의 승인에 필요한 도장이지요.”
“그것이 없어진 것이오?”
“예, 그리고 들으셨다시피 장로는 저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가지고 있진 않은가 보구려.”
여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책임한 사람이지요. 이리 요절할 것이면 후처리라도 해주고 갈 것을.”
망자가 된 가주를 향한 말이었다.
제갈산은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사이가 그다지 좋진 않으셨나 보구려.”
“좋다 나쁘다 할 것이 있던가요. 서로의 필요에 의한 혼인일진대.”
“필요?”
“가주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외척을 두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굶주리는 동생을 먹일 금전이 필요했지요. 이해관계의 일치였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거참 낭만 없는 이야기구려.”
“낭만이 밥을 먹여주진 않지요.”
제갈산은 피식 웃었다.
“부정은 못 하겠군.”
그리 답하던 중 제갈산은 문득 떠올렸다.
‘닮았구만.’
왜 낮잠 중 그런 꿈을 꾸었나 했더니, 이 여인에게서 어머니와 닮은 점이 몇 가지 보인 이유인 듯하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대범한 점이나, 처한 처지.
그리고 자식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포기하려는 점까지.
여인은 그로 하여금 향수를 느끼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맡겨만 주시지.”
제갈산은 기감을 넓혔다.
‘경계는 그대로인가.’
이제 해가 다 진 시간이다.
아마 곧 인원의 교대가 있을 터.
제갈산은 품 안의 옥돌을 굴렸다.
‘남은 것은 17개.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아껴 쓸 걸 그랬어.’
아슬아슬하다.
약식 진법에 필요한 필수적 재료인 만큼 이 옥돌을 어찌 사용할지가 탈출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대협?”
“잠시.”
제갈산은 눈을 감았다.
‘어디 보자….’
기감을 넓힌 채로 숨을 죽이고 있으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교대조겠지.’
다가온 교대조가 경계조와 붙는다.
직후 무언가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이어 경계조가 자리를 뜬다.
“이제 가면 되겠구려.”
막 경비가 바뀌는 지금이 탈출의 적기였다.
“실례하겠소.”
“네… 꺄앗!”
제갈산이 여인을 들쳐멨다.
여인은 놀란 눈으로 허우적거리다 겨우 제갈산의 품에 바로 자리 잡았다.
“꽉 붙들어 매시오.”
제갈산은 손안에 굴리고 있던 옥돌을 창밖으로 던졌다.
휙!
총 4개. 이번 역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옥돌이 기이한 기파를 터뜨렸다.
‘일각(一?)이다.’
인지를 흐트러뜨리는 진법에, 위력 자체를 증폭시키는 형태로 던진 만큼 진법이 오래 지속되진 않을 터.
제갈산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단전의 내공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타닥.
창틀을 뛰어넘었다.
*
제아무리 평범한 장원이라 하나, 그럼에도 부호의 장원이다.
거기에 제갈산은 힘없는 여인이라는 짐까지 지고 있는 상황.
침입하던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제갈산으로서도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막 진법이 풀린 시각.
어느새 안채를 빠져나가 장원의 외곽으로 빠져나온 제갈산은 후욱 숨을 들이쉬며 걸음을 보챘다.
‘부디 저들이 이변을 눈치채는 것이 늦길.’
그런 바람까지 더하며 이어간 발걸음이었으나, 세상만사가 그렇듯 쉽게 풀리는 일이란 것은 좀처럼 없는 법이었다.
때애앵!
안주인이 사라졌다!
찾아! 찾으란 말이다!
종소리.
이어 들려온 내력까지 실어 내지른 외침에 여인의 몸이 흠칫 떨렸다.
“너무 빨리 들킨 것 같….”
“그렇소. 생각보다 상대 쪽 경계가 삼엄했던 듯하오.”
일류 초입의 책임자가 경계인 잡졸인줄로 알았더니, 무공 외에도 다른 잡기가 있는 듯했다.
“이제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더 빨리 뛰어야지.”
제갈산은 애써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리하며 발걸음을 기이하게 틀었다.
‘여기서 힘을 빼고 싶진 않지만….’
당장 내력을 아끼겠다고 위협을 자처할 수는 없는 법.
제갈산이 바닥을 쓸 듯 발을 긋자, 그 움직임에 따라 주변이 흐릿하게 뒤틀렸다.
보법(??), 천기미리보(?????).
제갈세가의 가주 직계에게만 내려지는 비전 무공 중 하나.
여인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이건….’
신비로운 감각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는 자리만 다른 공간인 듯한 착각이 일었다.
마치 찰랑이는 수면이 그와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듯했다.
타닥.
제갈산의 달음박질에 조급함이 더해졌다.
실제로 제갈산은 무공까지 본격적으로 발휘하며 마음이 급해진 상태였다.
‘보법이 통하는 건 어디까지나 지금이 밤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보법은 진법과 달랐다.
제아무리 세가의 정수가 담긴 무공이라 한들, 근본적인 인지는 뒤틀지 못한다.
마음을 놓고 움직였다간 언제 발각되어 포위될지 모르는 일인 만큼, 내력이 남아있는 지금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심공에 더 집중할 것을.’
괜히 풍족하지 못한 스스로의 내공이 원망스럽다.
제갈산은 항상 띠던 미소까지 지운 채, 더욱이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기를 맞았다.
*
철컥.
장원의 최외곽.
수십에 달하는 인원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 한가운데에 뒷짐을 지고 선 두꺼비 같은 노인, 장로가 끌끌 웃었다.
“이럴 줄 알았다. 이년.”
제갈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염병할.’
포위됐다.
이는 명백한 실책이었다.
아니, 실책이라고도 못 할 일이다.
그저 운이 나빴다.
하필 움직이던 경로에 아직 떠나지 않던 전번초 경계들이 있을 건 뭔가.
“자, 직인은 어디에 있느냐.”
장로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안면을 물들이고 있는 것은 명백한 탐욕.
마치 금은보화를 손에 쥐기 직전의 아이와도 같았다.
여인은 낭패어린 심정을 꾹 눌러낸 채, 장로를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왜 도망치는 게냐? 아니, 말할 필요도 없지! 그 망할 상단 놈들이 직인을 대가로 네년 안전을 보장해주겠다 말한 것 아니냐? 얼마냐, 얼마를 대가로 내걸더냐?!”
“저는 정말 모르…!”
“갈!!!”
장로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아직도! 아직도 거짓말을 해!!! 네년이 속셈을 부리는 것을 이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여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는 이리 노골적으로 분노를 토해내는 장로의 모습에, 분노 따위의 감정보다 먼저 억울함을 느꼈다.
“그저 떠나는 것입니다. 제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조용히 사라지려 하는 것입니다. 한데 어찌 그것조차 못하게 막으십니까. 제가 뭘 그리 잘못해….”
“천출이지 않느냐!”
덜컥.
여인의 몸이 들썩였다.
아니, 그녀를 업고 있던 제갈산의 몸이 들썩인 것이었다.
“천한 피가 다 그렇지! 은혜도 모르는 버러지들! 식량만 축내는 기생충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천치들! 네년 같은 것들이 하는 생각이야 뻔한 게 아니겠느냐!”
억지였다.
장로의 논리는 그리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니, 논리라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감정적인 말이었다.
여인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에게 직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그는 가주의 직인이 사라지며 장가장이 흔들리는, 그리하여 스스로의 위치가 위협받는 현 상황을 탓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허탈하고 또 우스워, 여인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작….’
자신이 저런 노인의 불안감 따위를 피해 도망가야 하는 것에 울분이 터지는 것이었다.
“거참 말을 싹퉁바가지 없게 하시는구려.”
순간, 제갈산이 입을 열었다.
여인은 놀라 숨을 들이키며 제갈산을 바라봤다.
그는 이제까지 내내 보이던 미소를 지운 채 핏발 선 눈으로 장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늙어서 노망이라도 난 것이오? 말하는 본새가 어찌 그리 추악할 수가 있소.”
“네놈은 또 뭬야!”
장로가 발을 굴렀다.
갑작스레 폭언을 쏘아내는 제갈산을 노려보던 장로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그에게 삿대질을 했다.
“상단! 네놈이 상단의 끄나풀이구나! 어쩐지… 그래, 상단 놈이라면 그 경계를 뚫고 안채에 잠입할 만도 하지!”
장로가 크게 웃었다.
“그래, 네놈은 천천히 요리해주마. 장원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 제발 사실을 실토하게 해달라 빌게 만들 것이야!”
“글쎄, 그전에 그쪽 목이 먼저 달아날 것 같은데. 내 깔끔하게 베진 못할 거 같아 미리 사과드리오. 얼굴 가죽이 다 쭈그러들어서 암만 이쁘게 베어도 모양이 안 나올 것 같거든.”
“이놈이…!”
장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갈산은 그를 노려보며 여유로운 척 연기를 했다.
하나, 역시 속은 타들어 가는 상황이었다.
적은 너무 많았고 보법까지 써가며 이곳에 오느라 내공이 모자랐다.
만약 혼자였다면 일 점을 뚫어내 탈출할 수 있었겠지만, 등 뒤엔 아이를 밴 여인이 매달려있는 상황.
‘가문을….’
출신을 밝히면 이 상황은 모면할 수 있다.
하나 그런다 해서 여인을 구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고, 더해 세가의 휘광에 기대는 일은 제갈산에겐 죽기보다 더 싫은 일이었다.
외통수였다.
제갈산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구려. 내가 괜히 헛바람을 넣은 듯해.”
“…아닙니다. 저 노친네 꼴을 보니 안에 있더라도 무사하진 못했을 테지요. 차라리 저항이라도 했으니 다행입니다.”
“아이는….”
“어떻게든 낳아야지요. 제 뱃속에 가주의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 바로 저를 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뭐, 이후는 모르겠지만요.”
“그건 다행이구려.”
짧게 대화가 오간 직후, 장로가 외쳤다.
“쳐라! 치란 말이다! 저 썩을 놈의 다리를 썰어내고 천것을 데려와라!”
장로가 외쳤다.
그와 동시에 무인들이 달려들었다.
금방이라도 제갈산의 신체 어딘가가 썰려나갈 위기의 상황.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빠아아아아악!
묵직한 타격음이었다.
마치 둔기로 내려친 듯한 둔탁한 소음에 무인들과 제갈산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주 짧은 틈이었으나, 동시에 누군가에겐 하품이 나올 정도로 긴 틈이었다.
빠아악!
빠악!
빠아아악!
순간에도 여러 번이 겹쳐 들려오는 타격음.
직후 담벼락 쪽을 지키던 무인들이 일제히 쓰러졌고, 그곳에 한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그곳으로 시선을 향한 제갈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목아우….”
목리원이었다.
검은 복면과 웬 거적떼기로 전신을 가렸지만, 드러난 두 눈만으로도 미모가 뿜어져 나와 제갈산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목리원이 느긋한 걸음으로 제갈산에게 다가갔다.
아주 느릿한 움직임이었음에도, 자리한 이들 중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그만큼이나 무겁고 웅혼했던 까닭이다.
“어떻게….”
제갈산은 물었다.
목리원은 복면 위로 드러난 눈을 정확히 그에게로 향하며, 곱게 미소를 지었다.
“협행을 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 일에 내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오.”
아주 당연한 일을 하고 있다는 듯 내뱉는 답에, 제갈산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참….”
특이해도 이리 특이한 인간이 있을 수 있던가.
그런 생각이나 떠올리던 중, 목리원은 장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들이 악적이오?”
“내 기준에선 그렇네.”
“그럼 악적이겠구려.”
장로는 목리원과 눈이 마주치자 덜덜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무, 무슨….’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장로로서도 느낄 수 있는 기세였다.
그의 기세는 그리도 흉악했다.
“가시오. 여긴 내가 맡지.”
목리원이 검집으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하며 한 발 나서려다 멈췄다.
“아.”
나지막이 내뱉은 말.
목리원은 제갈산을 흘긋 바라보며, 퍽이나 간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소저한텐 비밀이오. 몰래 나온 것이라 들키면 곤란하오.”
복면 아래 목리원의 뺨에 꼬집힌 흉이 있는 것은, 자리한 누구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