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5화 (25/334)

〈 25화 〉 사장 ­ 안휘 (6)

* * *

“수작 부리지 말거라. 네년이 가지고 있지 않다면 대체 직인이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이냐!”

“저는 진실로 모릅니다. 가주께선 제게 그 어떤 말도 남기….”

“헛소리!”

노인의 고성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가녀린 인상의 여인은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그 분노에 맞섰다.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지요.”

“많지! 천것 주제에 우연히 가주의 눈에 들어 그 자리를 차지한 것 아니냐. 이제 가주도 없으니 이 장가장이 다 네년 손에 들어온 것 같겠지! 그 직인만 없으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는 걸 모를 줄 알았더냐!”

여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분한 듯 꽉 쥐어지는 주먹은 그녀가 저 말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나, 여인은 주눅 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는 듯, 노인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모릅니다.”

“이년이…!”

노인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화를 삭히려는 듯 호흡을 가다듬고, 그러다 비릿한 웃음을 띄워 올렸다.

“…그래,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꾸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인을 바라보는 눈에 깃든 것은 경멸과 증오.

그는 쯧 하고 혀를 차곤 방을 나섰다.

쿵­.

문이 거세게 닫히자 여인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숨을 내쉬었다.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비수로 꽂혀 가슴이 미어졌으나, 기댈 곳조차 없어 힘에 겨웠으나 여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괜찮다. 익숙하다.’

이런 대접은 익숙했던 까닭이다.

천민의 몸으로 이 장가장에 들어선 날부터 내내 각오한 순간인 까닭이다.

여인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삼켜내곤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허어… 그리 눈물을 보이면 곤란하오만. 내가 여인의 눈물은 그냥 넘기지 못하거든.”

낮선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여인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족제비같은 인상으로 웃고 있는 젊은 사내.

여인의 얼굴 위로 당혹이 떠올랐다.

“누, 누구… 여봐…!”

“쉿­.”

사내, 제갈산이 검지를 입 앞으로 가져다 댔다.

그리하며 품에서 낡은 서신 하나를 꺼냈다.

“서신을 전하러 왔소. 당신 동생이 보낸.”

여인의 움직임이 멎었다.

눈은 그가 내뱉은 말에 큼지막하게 커지고 있었다.

“동생분이 글을 모르더구려. 하여 동생분께서 한 말을 옆에서 받아적었소. 하니 필체는 신경 쓰지 말고 읽어보시오.”

수상한 사내였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일 확률이 아주 높다고 여인은 생각했다.

한데도 그녀는 멍하니 제게 드리워진 서신을 받았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아 보고픈 심정이라 봐야 할 것이었다.

“부탁받은 일은 누님이 무탈히 지내고 있는지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소만….”

제갈산은 서신을 펼치는 순간부터 숨을 ‘흡’ 하고 참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일렁이는 눈망울에 고인 것은 필히 슬픔이라 말해야 할 것이었다.

“…아무래도 잘 지내진 못하시는 듯하군.”

“….”

여인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서신을 읽어내렸다.

나는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

남편을 잃어 많이 슬프겠지만 꼭 이겨내 달라는 말.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단 하나뿐인 혈육의 걱정 어린 진심은, 타인의 필체로 적혔음에도 여인의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동생이 맞군요.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하는 게.”

“음?”

“잘 못 지내고 있겠지요. 제가 매달 부치던 서신이 없어졌으니까요.”

자조 섞인 말에 제갈산은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그가 만났던 사내는 참으로 비루한 꼴을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침묵은 곧 긍정이리라.

여인은 서신이 다 구겨질 정도로 강하게 그것을 붙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동생의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탁 하나를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오?”

“동생에게 제가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이 금품을….”

여인이 농을 열어 옥가락지와 금붙이 몇 가지를 쥐어 내밀었다.

“…이것을 동생에게 전해주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흐음… 왜 직접 나가지 않는 것이오?”

“장로와의 대화를 듣고 계셨던 줄로 압니다. 또한 오시면서 보셨겠지요. 제가 이곳에 갇혀있는 것을.”

제갈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흔한 이야기지.’

천출로 정실이 된 여인이 가문의 핍박을 받는 것도, 미망인이 되어 자리를 위협받는 것도.

그렇게 옥살이와도 같은 생활을 하는 것도.

어디에나 있을 일이었다.

제갈산의 시선이 그녀의 배를 향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배는 작게 부풀어 있었다.

‘홀몸이 아닌 건가.’

과연, 지킬 것이 있는 여인이라는 말이렷다.

“이리 소리소문없이 움직이신 것을 보면 필히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계신 분이시겠지요?”

“글쎄, 그건 그렇다 치고 내 뭘 믿고 그것을 맡기는 것이오. 내가 그것을 들고 도망가면 어쩌시려고.”

“그리 값비싼 의복을 입고 계신 분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일을 하시겠습니까.”

여인의 시선이 제갈산의 옷을 향했다.

제갈산은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뒤통수를 긁었다.

“옷도 갈아입고 올 걸 그랬구먼.”

“무리한 부탁인 줄은 알지만….”

“되었소.”

제갈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이곳까지 들어온 것도 그냥 가기 마음이 불편해 한 일이었으니 기꺼이 도움을 드리겠소.”

“아, 감사…!”

“단.”

제갈산은 허리를 숙여 여인과 눈을 맞췄다.

그리하며 물었다.

“저녁까지만 생각해주시오. 이곳에서 버티는 것이 과연 아이를 위한 일인 것인지.”

여인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제갈산은 그것에 머쓱한 듯 웃었다.

'오지랖이지.'

그것을 알면서도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인들을 보면 떠오르는 이가 있었던 까닭이다.

"내가 당신의 아이라면 말이오. 어미가 자신을 위해 핍박 당하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을 것 같구려."

“그게 무스….”

“고민할 시간을 드리겠소. 대충 두 시진 정도. 해가 지면 돌아오겠소.”

제갈산은 그리 말하고 홀연히 몸을 감췄다.

여인은 덩그러니 방에 남겨져 그의 말을 곱씹었다.

*

“산아.”

몽롱한 와중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갈산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유년기를 내내 지내 온 세가의 안채.

잘 가꾸어진 나무들과 그 사이의 연못 앞에는 제갈산이 평생을 그리워할 여인이 있었다.

“산아!”

“어머니….”

다시는 볼 수 없는 어머니였다.

쭉 찢어진 눈과 여우 같은 인상.

하나, 그런 인상과는 다르게 대쪽 같은 성격을 가졌던 호인.

그녀가 화난 듯 발을 쿵쿵 구르며 다가왔다.

그리고 제갈산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

제갈산은 귀가 잡아당겨지는 순간 떠오르는 발꿈치로, 그럼에도 여전한 그녀와의 키 차이에 자신이 아이의 몸을 하고 있는 것을 자각했다.

‘꿈이구나.’

꿈속의 어머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어미가 똥간에는 그만 가라고 몇 번을 얘기해!”

이마에 핏대까지 솟아있는 것이 여간 화난 게 아닌 듯했다.

한데, 그리 화난 얼굴임에도 제갈산은 그것을 본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웃어?! 웃어어어어!!!”

“끄흡! 어, 어머니이이이익!!!”

참으로 실감 나는 꿈이었다.

통증이 느껴지진 않았음에도 입이 절로 비명을 토해내는 게 꼭 그런 기분을 들게 했다.

“그놈의 똥간은 왜 맨날 뒤적거리는 거야아앗!!!”

제갈산은 이것이 어느 날의 기억인지를 알았다.

한창 강호협객전에 빠져 있던 6세의 기억이다.

4장의 주인공인 인협이 사파의 암살자들을 피해 똥간에 몸을 파묻는 장면을 너무 감명 깊게 읽어 어머니의 속을 썩였던, 그런 날의 기억이었다.

“자, 잘못….”

“한 줄 알아야지! 아니, 잘못하지를 말았어야지!”

제갈산은 잘못했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웃었다.

‘아.’

너무나도 행복한 순간으로의 회귀였다.

이것이 꿈인줄을 알면서도 깨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드는, 그런 회귀였다.

제갈산은 눈물이 고인 얼굴로 웃으며 어머니를 바라봤다.

천한 출신으로 제갈가의 안주인이 된 여인.

그럼에도 언제나 당당했던 여인.

…그리고 독에 절어 명을 달리하던 그 날까지도 따스했던 여인.

“내가 너 때문에 못 산다! 장로들이 너만 보면 뭐라 말하는 줄 아느냐? 똥간공자다. 똥간공자!”

너무나도 사랑했던 모친의 목소리가 귓가를 후벼 판다.

그녀가 귀를 잡아당기던 손을 놓곤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굽혔다.

“얘, 산아. 응? 내가 그놈의 강호협객전인지 뭔지를 다 불태워야 정신을 차리겠니?”

“죄송….”

“협객은 좋다. 좋은데, 왜 그 멋있는 장면들 다 두고 똥간에 그리 집착해? 그 뭐냐, 검협이니 그런 걸 좋아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검협은 안 멋진….”

“이놈의 주둥이를 그냥!”

제갈산의 어머니가 그의 주둥이를 꼭 꼬집었다.

마치 오리주둥이처럼 쭉 튀어나온 입술에,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됐다. 내가 뭔 말을 하겠니.”

항상 이러했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나서 그를 혼쭐내다가도 몇 차례 대화를 하다 보면 화를 다 누그러뜨리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제갈산은 그것이 너무 좋아, 따라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왜!”

“감사합니다.”

제갈산의 어머니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제갈산은 그 기색에 어린 날의 자신이 얼마나 사고뭉치였는지를 떠올리곤 낄낄 웃으며 이어 말했다.

“종종 나와주십시오.”

너무나도 달콤한 꿈이었다.

하나, 그렇기에 더 빠져선 안 되는 꿈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사람이었고,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자신이 나아가는 것일 테니.

­스스로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어주렴.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런 부탁을 하던 사람이었으니.

“제가 참으로….”

제갈산을 입 안에 말을 머금었다.

그것을 꼭꼭 씹어 잘게 부수곤, 곱게 뭉쳐 입 밖으로 내뱉었다.

“…참으로, 사랑합니다.”

풍경이 흐려졌다.

*

제갈산은 안채의 지붕 위에서 눈을 떴다.

눈을 끔뻑거리다, 이내 피식 헛웃음을 흘리곤 주변에 흩뿌려두었던 옥돌을 수습했다.

일순 주변이 흐려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음….’

그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그리운 얼굴을 마주한 것에 기꺼운 마음이 들어 그 여운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하늘은 어느새 불그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다.

제갈산은 미리 언질해 두었던 두 시진이 다 되어감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가볼까.’

답을 들을 시간이었다.

*

“마음은 정하셨소?”

여인은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상하고 또 수상하다.

하나, 그럼에도 여인은 그에게 기대를 걸게 되는 자신을 숨길 수 없었다.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해보시오.”

“왜 이렇게까지 도우려 하시는 겁니까.”

여인은 표정을 굳힌 채 제갈산과 눈을 맞췄다.

여전히 가녀린 인상이었으나, 그런 중에도 떠오른 표정에 따라 눈빛만큼은 결연히 빛나고 있었다.

“이유가 필요하오?”

“제겐 필요합니다.”

여인은 무릎 위로 올려두었던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보답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리 장가장의 안주인 자리에 있다곤 하나, 막상 제가 쥐고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홀로 남아 버티던, 대협의 말대로 이곳을 탈출해 도망치던 대협이 얻을 것은 없단 말입니다.”

“알고 있소.”

“그러니 답해주십시오. 왜 그걸 알고 있음에도 돕고자 하는 것입니까.”

질문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이성이었다.

배 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기제였다.

그의 의도도 모른 채 이리 따라나서는 것은, 그저 기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아이의 안전을 도마 위에 올려두는 행위였다.

제갈산은 물끄럼 여인을 바라봤다.

긴장된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뜯어보고, 그런 후에야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냥 하는 것이오.”

“…네?”

“그냥 그러고 싶어서 하는 것이오.”

여인의 얼굴이 멍해졌다.

제갈산은 그 꼴이 꽤나 유쾌하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이어 말했다.

“나는 여인이 우는 꼴을 잘 못 보는 사람이거든.”

특히나 어머니가 될 이가 우는 꼴은 보지 못한다.

슬퍼하는 여인을 외면해선 스스로에게 당당해지지 못한다.

그의 협의(??)는, 그런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존재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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