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4화 (24/334)

〈 24화 〉 사장 ­ 안휘 (5)

* * *

목리원은 눈앞의 장원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람 열이 한 번에 들어가도 넉넉할 크기의 거대한 정문.

그 위로 걸린 현판엔 정갈하게 ‘장가장(?家?)’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곳은….”

“보이는 데로 장가장이라네. 이 도시의 가장 큰 장원이지.”

“왜 이곳으로 왔소? 협행을 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

“이곳에서 협을 행하는 것이네.”

제갈산은 즐겁다는 듯 혀로 입술을 훑었다.

목리원은 미간을 좁히며 의문을 떠올렸다.

“협이 필요한 장소는 아닌 것 같소만….”

목리원이 아는 협이란 그랬다.

눈앞에 닥친 고난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약자를 돕는 일.

또한 양민을 위협하는 폭력을 대신 막아주는 일.

한데 이곳엔 그런 일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저길 보시오. 장원의 일꾼들은 모두 평온한 얼굴로 움직이고 있소. 풍겨오는 음식 냄새가 군침을 돌게 하는 것이 굶주리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또 느껴지는 살기가 없으니 음흉한 속을 지닌 이들도 없을 것이오. 참으로 평화로운 장소일진대, 제갈형은 어째서 이곳에 협이 필요하다 말하는 것이오?”

“허허, 목아우는 아직 배움이 모자란 듯허이.”

제갈산은 목리원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낄낄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자, 목아우. 협이 꼭 물리적인 고난만을 막는 일이던가?”

“그건 아니지만….”

“그렇지. 다들 저리 평온한 낯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저들도 저마다의 걱정이 있을 수 있는 게 아니겠나. 그뿐이겠나? 우리는 아직 장원의 정문 앞에 있네. 저 안쪽에 있을 사람들의 마음까진 모른다는 말이지. 예를 들면….”

제갈산은 말을 늘어뜨리며 목리원의 기색을 살폈다.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명확한 흥미의 기색.

‘참 순박한 친구란 말이지.’

꽤나 즐거운 ‘협행’이 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제갈산은 말을 이었다.

“…가주를 잃고 시름에 빠진 부인의 마음 같은 것 말일세.”

“…!”

목리원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는 그제야 제갈산이 지난날 언급했던 ‘미망인’과 관련된 일로 자신을 이곳에 불렀음을 깨달았다.

“어, 어허! 제갈형!”

“쉬잇! 소리를 낮추시게! 행인들이 의심스럽게 보지 않는가!”

목리원은 흠칫 몸을 떨다, 전보다 확연히 작아진 목소리로 제갈산에게 속삭였다.

표정엔 배신감이 덕지덕지 묻어있었고 목소리엔 억울함이 가득했다.

“시, 실망이오. 제갈형! 나는 제갈형이 진정 협행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건만…!”

“협행을 하러 온 것이 맞다만?”

“거짓말하지 마시오! 제갈형은 여색에 미쳐 이곳에 온 것이지 않소!”

“어허!”

제갈산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며 목리원을 노려봤다.

“목아우는 내가 여색에 빠져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는가! 이 제갈산을 유부녀라면 끔뻑 죽어 천지분간 못하는 사람으로 본 것이야? 실망이네!”

제갈산이 턱 하고 어깨동무를 풀곤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화가 잔뜩 난듯한 제갈산의 태도에 목리원은 크게 당황하며 변명의 말을 엮었다.

물론, 그런다 해서 마땅한 말이 떠오를 리는 없었다.

‘그, 그럼 뭐란 말이오!’

정황상 근거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이제까지 들어온 그의 행적이나 혀로 입술을 핥으며 즐거워하던 얼굴을 생각하면, 그가 미망인을 유혹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지 않은가.

목리원의 당황이 짙어졌다.

그에 따라 뒤돌아 있는 제갈산의 입꼬리는 쭈욱 솟아오르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은, 지금 그가 웃음을 참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이는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 사람을 잘 못 봤구려! 목아우가 수양현에서 보였다던 협의를 높게 사 권유한 것이건만! 이제 되었네!”

제갈산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목리원은 그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하다 결국 그를 붙잡았다.

“미, 미안하오! 일단 진정하시고….”

“되었네! 나는 더 할 말이 없어!”

“아, 아니오! 내가 잘못했소! 나는 소문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불한당이 아니란 말이오!”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목리원은 이렇게 자신이 불한당으로 낙인찍히는 상황을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도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언제나 사랑받아온 목리원은 타인이 자신에게 원망을 토해내는 상황을 처음 맞닥뜨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제갈산을 그제야 목리원을 흘끔 돌아보며 의심스럽다는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믿어도 되겠나?”

“무, 물론!”

“크흠! 그럼 한 번만 더 믿어보도록 하지.”

목리원의 얼굴이 맑게 갰다.

마치 봄이 피어나는 듯한 화사한 미소였다.

‘과연, 이게 독봉을 녹인 미소로군!’

제갈산은 그런 생각이나 하며, 이제 안도한 듯 숨을 내쉬는 목리원에게 일렀다.

“그럼 이곳에서 소란을 피워주게.”

“…응?”

“소란 좀 피워주게. 나는 아우가 시선을 끄는 동안 안에 잠입할 터이니.”

목리원의 얼굴이 멍해졌다.

*

“아, 아이고오오…! 협객 살려어…!”

장가장의 정문.

목리원은 한껏 붉어진 얼굴로 배를 부여잡으며 어색한 연기를 펼쳤다.

“아이고 나 죽네에…! 배, 배가 고파 죽을 것만 같네에…!”

대체 뭘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색한 연기에 행인들의 시선이 몰렸다.

정문 너머로 있던 장가장 일꾼들의 시선도 몰렸다.

목리원은 수치스러웠지만 참았다.

이것은 자신이 불한당이 아님을 증명하는 과정이니, 또한 결백을 증명하는 일이니 꼭 참아야만 한다고 다짐한 것이었다.

나름의 결연함을 다해 이어간 연기는 실제로 믿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조잡했으나, ‘시선을 끈다’라는 측면에선 엄청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이고오…!”

목리원이 눈을 질끈 감자 고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뽀얀 피부는 햇볕을 반사해 미려한 빛을 냈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손끝은 가련함으로 화해 동정심까지 유발하고 있었다.

제갈산이 이르길, ‘당화서조차 빠져들게 한 외모’가 빛을 발한 것이다.

“극이라도 하고 있는 듯하군.”

“그런가 보오. 세상에, 내 난생 저리 잘난 사람은 또 처음 보는구먼.”

“하아아…. 얘, 저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 오거라. 내 오늘 밤 그와 단둘이 술잔을 기울이고 싶으니.”

목리원의 외모를 보고 감탄하는 사람과 그것에 수긍하는 사람들.

그리고 길을 가다 우연히 그를 보고선 음흉한 생각을 하는 여식까지.

자칫 정절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는 이가 있었다.

쿵.

쿵.

노골적인 분노가 느껴지는 발소리는 다름 아닌 당화서의 것이었다.

“목 소협!”

움찔­.

한창 시선을 끌던 목리원의 몸이 떨렸다.

목리원은 두려움에 물든 눈으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봤다.

“소, 소저….”

“뭐 하시는 겁니까.”

부릅 뜨인 눈이 목리원을 꿰뚫듯 쏘아진다.

억눌린 목소리에선 분노라고 할 것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목리원은 낭패어린 얼굴로 황급히 변명을 짜냈다.

“제, 제갈형이….”

“형?”

“고, 공자가 잠시만 시서….”

“됐습니다.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지요.”

당화서가 목리원의 귀를 턱 붙잡곤 그를 질질 끌고 갔다.

목리원은 애처롭게 휘적거리며 주변에 도움을 구했으나, 당화서의 살기 어린 얼굴에 누구도 다가가지 못했다.

직전 목리원을 보며 음흉한 명령을 내리던 어딘가의 여식은, 당화서와 눈이 마주친 순간 히익 소리를 내며 하인들과 도망쳤다.

목리원의 정절이 오늘도 무사히 지켜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목숨의 무사함과 연결될지는 미지수였다.

*

제갈산은 저 멀리 당화서에게 끌려가는 목리원을 보며 끅끅 웃었다.

‘참 재밌는 친구란 말이야.’

부디 오늘 밤을 무사히 넘어가길 바란다.

‘그럼 나는….’

제갈산은 담을 넘어 장가장 안으로 침입한 후, 호흡을 가다듬으며 기감을 넓혔다.

‘여기까지 지키는 이는 없구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까.

장가장은 평범한 부호의 장원이었으니, 똥간 뒤쪽까지 경비를 세울 정도로 치밀하진 않았다.

제갈산은 풍겨오는 비료 냄새에 코를 틀어막은 채 안채가 있는 방향을 향했다.

‘이쯤일 텐데….’

기둥 뒤에 숨은 제갈산이 안채를 바라봤다.

건물의 모든 입구와 창문은 무인들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건물을 지키는 인력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달리 말하면 그랬다.

‘아주 감옥이 따로 없구나.’

마치 안에 있는 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가두고 있는 듯한 행색이었다.

그들의 신경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내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제갈산은 가라앉은 눈으로 무인들을 살폈다.

‘이류, 이류, 이류, 이류 끝자락, 저기 중앙에 있는 놈은 일류 초입.’

그가 책임자일 터다.

제갈산은 품속에 손을 넣곤 옥돌 몇 개를 쥐어 굴렸다.

그리하며 생각을 이었다.

‘어찌할까….’

사실 이곳까지 잠입한 것으로 절반의 성공을 이루었다 말 할 수 있으나, 제갈산은 겨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용의주도함과 집요함.

그것은 괴룡 제갈산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이었다.

­누님이 잘 지내고 있는지만 확인해 주십시오. 저는 그것이면 됩니다. 그러니 제발….

생각이 이어지며 떠오르는 것은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가 피골이 상접한 모양새로 가진 엽전을 다 털어내는 장면.

‘형장, 아무래도 자네 누님은 잘 지내지 못하는 듯허이.’

속으로 말을 건넨다.

물론 닿지 않을 말이었으나, 제갈산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혹시 모르니 확실히 알아봐 주도록 하겠네.’

제갈산은 품에서 손을 꺼냈다.

그 속에 쥐여 있는 것은 고아하게 빛나는 작은 옥돌 세 개.

‘조용히 가볼까.’

퉁­.

제갈산은 내력을 실어 옥돌을 쏘아냈다.

옥돌은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은밀히 뻗어나갔고, 그 방향은 분명 단번에 쏘아낸 것들임에도 제각기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붕 위로 하나, 기둥 뒤쪽으로 하나, 마지막은 무인의 발아래로.

그러자 이변이 일어났다.

스으으­.

기파가 울렸다.

물론, 제갈산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기파였다.

제갈세가를 오대세가의 한 축에 올려놓은 기교.

그리고 제갈가의 가주 제갈벽에게 진왕(?王)이라는 별호를 달아준 기교.

약식 진법(??)이었다.

‘잘 작동하는구나.’

무인들의 눈빛이 일순 흐리멍텅해지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나, 그들은 이제 제갈산을 볼 수 없을 것이었다.

앞으로 두 시진.

그들의 눈꺼풀 위로 보이는 것은 그저 흘러가는 구름과 기울어가는 태양뿐일 테니.

탓­!

제갈산을 경신법을 발휘해 뛰쳐나가 환기를 위해 열려있는 창으로 쏙 들어갔다.

조용히 내부로 착지한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작은 서고.

제갈산은 무릎을 탁탁 털곤 서고 곳곳을 뒤적였다.

‘보통 이런 곳에 장부가 숨겨져 있단 말이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이어가던 탐색.

하나, 허탕이었다.

장부는커녕 가문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본 서고는 따로 있는 듯하다.

‘에잉….’

제갈산은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트리다, 이내 기운을 차리곤 천장 위로 뛰어올랐다.

그곳의 틈을 비집어 연 후, 먼지가 그득 쌓인 천장 위쪽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먼지 꼴을 보니 암중 호위도 없는 듯하고.’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듯하다.

포복으로 움직여 이곳저곳을 기어 다니길 잠시.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산은 눈을 빛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해, 틈을 슬쩍 벌려 아래를 바라봤다.

그곳에 있는 것은 두꺼비처럼 생긴 노인네와, 정갈한 옷차림으로 그와 마주 앉아있는 가녀린 인상의 여인이었다.

‘오호라….’

제갈산은 기껍다는 듯 여인을 바라봤다.

'미인이구만.'

목표를 찾은 듯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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