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3화 (23/334)

〈 23화 〉 사장 ­ 안휘 (4)

* * *

당화서는 목리원을 잡아끌고 객잔을 나섰다.

두 사람의 뒤에는 싱글벙글한 얼굴의 제갈산이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묵묵히 걷던 당화서의 표정이 구겨졌다.

“꺼지거라. 따라오지 말고.”

“따라가긴, 나도 이 방향으로 가야 해서 온 건데.”

“그럼 먼저 가거라.”

“에이, 굳이 따로 갈 필요가 있소? 누님도 참 섭섭하게 말씀하시는구려.”

당화서의 고개가 제갈산을 향했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은 목리원이 다 기겁할 정도로 사나웠으나, 제갈산은 그 와중에도 웃는 상이었다.

“소, 소저…. 일단 이것 좀 놓고….”

“목 소협은 가만히 있으십시오! 돌아가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

목리원은 울상을 지었다.

제갈산은 두 사람의 만담에 또 끅끅 웃음을 참았다.

‘이거야 원.’

연인 사이인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닌 듯했다.

굳이 따지자면….

‘그래, 딱 모자(?子)관계가 이렇겠구나.’

어쩌다 저런 관계가 된 것일까.

저 둘은 어떤 이유로 함께 다니고 있으며, 당화서는 왜 어울리지도 않는 보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순간에도 수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간다.

하나, 그런 호기심이 떠오르고 스러지는 와중에도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감상이 있었다.

‘모자….’

당화서가 자리에 서서 목리원의 귀를 잡아당긴다.

길 한복판에서 열을 올리며 이어가는 잔소리에 목리원은 얼굴은 거무죽죽해진다.

제갈산은 그 광경 속에서 그리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산아! 똥간은 그만 좀 가라고 하지 않았니! 왜 어미 말을 안 듣는 게야!

이젠 들을 수 없는 목소리라, 그리고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목소리라 제갈산은 쓰게 웃었다.

직후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곤 장난스레 말했다.

“거 목 대협께 너무 깐깐하시구려. 목 대협도 다 큰 성인이 아니오? 그렇게 기를 죽이면 어떡하오.”

“제, 제갈 공자!”

목리원이 화들짝 놀라며 제갈산을 제지했다.

당화서가 잔소리를 할 때 반박하면 일어나는 일을 너무 잘 알았던 까닭이다.

“그, 그마안….”

“목 대협도 자기주장을 확실히 해야지.누님께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라면 뛰어내릴 것이오?”

목리원은 눈을 깜빡였다.

‘음, 소저가 한 말이면 이유가 있을 텐데.’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하는 목리원의 모습에 제갈산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당화서는 코웃음을 치며 제갈산에게 재차 일렀다.

“남 일에 관심이 많구나. 네 갈 길이나 가지 그러느냐?”

당화서는 목리원이 자신을 편들자 기가 살아난 상태였다.

‘이건 뭐, 내 편이 없구나.’

제갈산은 우습지도 않은 상황에 킥킥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소. 그럼 오늘은 이만 가지. 목 대협, 내일 또 봅시다.”

제갈산이 포권을 취했다.

목리원은 당화서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 따라 포권을 취했다.

암만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었다.

“내일 보….”

“보기만 하십시오.”

목리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당화서는 휘적휘적 떠나는 제갈산의 뒷모습을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

목리원에겐 안타깝게도, 당화서가 잔소리를 까먹은 일 따윈 생기지 않았다.

정신이 쏙 빠져나가는 잔소리에 목리원은 생각했다.

‘서, 섭혼술이다. 이건 섭혼술이야!’

이것은 사람의 혼을 파괴하는 악독한 술법일 터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리 가슴 깊이 박힐 리가 없지 않은가.

“아시겠습니까! 제갈산은 분명 목 소협에게 악영향을 끼칠 겁니다! 저는 목 소협이 그놈 같은 뺀질이가 되지 않기를 바라요!”

목리원은 그 말에 움찔 손끝을 떨었다.

‘뺀질이….’

제갈산을 떠올렸다.

족제비 같은 인상에 하는 말도 능글맞은 사람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뺀질이’라는 단어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목리원은 소신껏 의견을 냈다.

“그, 그건… 아니라 보오.”

“뭐요?!”

“제갈 공자가 뺀질이는 아니었소….”

당화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에 대해 알아도 자신이 훨씬 잘 아는 게 당연할 텐데, 목리원이 이런 말을 하니 답답함이 치미는 것이다.

하나, 이는 당화서의 편견이 그녀의 시야를 가리는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지금 더 옳은 말을 하는 쪽은 제갈산이라는 인간에 대해 그 무엇도 알지 못해 순수하게 그를 바라볼 수 있는 목리원이었다.

“제갈 공자는 부지런한 사람이오. 그의 손에 배긴 굳은살이나 걸음걸이는… 또 무공을 발할 때 보였던 반응은 꾸준한 수련이 없으면 보일 수 없을 종류였소.”

“억지로 시켜서 한 것이겠지요. 그 떠돌길 좋아하는 인간이 집을 나와서 제대로 수련이나 했겠습니까?”

“확실히 했소.”

“…?”

“그는 오늘 아침에도 수련을 했소. 아니, 우리를 만나기 전까지도 수련을 했소. 나는 알 수 있소.”

목리원은 무재다.

그에겐 인체와 무공에 관한 사항이라면 남들보다 한참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는 것이다.

제갈산이 보였던 호흡, 근육의 움직임, 그리고 걸음걸이에서 묻어나는 떨림은 그가 오늘까지도 처절하게 수련한 증거라는 것을.

“음, 취향이 고약한 사내인 것은 맞으나. 나는 그가 뺀질이라곤 생각하지 않소.”

목리원은 그리 말하고 뿌듯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제갈산의 말대로, 자신의 의견을 성인 남자답게 잘 말했다는 생각 탓이었다.

당화서는 가만히 목리원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고 보면….’

목리원은 그의 모든 행실을 다 듣고도 그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리 괴롭힘을 당하고도 그에 대한 호감을 지닌 듯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악인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열불을 내는 목리원이 말이다.

목리원이 유일하게 꺼려한 것은 유부녀에게 청혼한 그의 과거.

그것조차 도의적인 문제만을 따져 꺼려하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당화서는 빠르게 고민을 이었다.

타인의 말과 충고에서 스스로의 단점을 찾아낼 줄 아는 것은 그녀의 여러 장점 중 하나였다.

“…확실히 뺀질이는 아닐 수도 있겠지요.”

당화서는 이내 인정했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그가 수련에 한해서는 부지런할 수도 있음을.

하지만.

“그래도 그가 목 소협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은 확실합니다.”

“으음…?”

“저는 목소협이 길가는 유부녀를 보고 침을 흘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 무슨! 나는 그런 파렴치한이 아니오!”

“저랑 한방에서 잔다는 말에 음흉한 얼굴을 해놓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당화서가 째려보자 목리원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 그건 오해할 만했소…!”

“퍽이나 그렇겠습니다.”

목리원은 정말 억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화서 같은 미인이 한방에서 잠을 청할 것이라 말하면 자신이 아니어도 모두 그런 상상을 할 것이 당연한 까닭이다.

또한 목리원은 확신했다.

저 소림사의 고승들이라도 그녀가 마음먹고 유혹하면 심장을 부여잡을 것이라고.

억울하고도 너무 억울해 속이 꽉 막혔다.

괜히 심술이 나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치민다.

목리원은 그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소, 소저가 너무 이쁜 게 잘못이오!”

“어이구 그러… 예?”

당화서의 얼굴이 멍해졌다.

“소저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생각이 난 것이지 않소! 나는 잘못한 게 아니오! 세상 누구를 데려와도 나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란 말이오!”

이 인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당화서의 정신은 지금 갑작스레 터져나온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그러지고 있었다.

“아니, 자, 잠시….”

“이건 소저 잘못이오! 소저는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을 했소!”

쿵­!

목리원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당화서는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눈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 이게 뭔….’

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설마 잔소리를 듣기 싫다고 애교를 부리는 건가? 따위의 것들 말이다.

‘아니.’

목리원은 그런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즉,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은.

‘지, 진심….’

그걸 깨닫자 열시가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왜인지 뺨이 확 뜨거워져 불에라도 댄 것 같았다.

그런 중에도 목리원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인정하시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소! 사전 설명이 없었던 소저의 잘못이었단 말이오!”

“아, 알겠으니까. 그만…!”

“도망치지 마시오!”

툭­!

두 사람의 발끝이 부딪쳤다.

벽에 막혀 더 뒤로 물러설 곳이 없던 당화서는 코앞까지 드리워진 목리원의 얼굴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을 느꼈다.

‘미, 미친…!’

억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잘생겼다.

저리 딱 표정을 굳히고 있으니 평소의 멍청한 인상도 옅어져 그의 미형이 더욱 부각 되고 있었다.

분명 산골짜기에서 험하게 살아왔다 들었는데, 그의 피부는 햇볕에 탄 기색이 없는 뽀얀 색에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속눈썹은 어찌나 긴지 그 아래 눈에 아련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어여쁘게 솟은 콧대나 그 아래 입술까지의 선은 세상 요사스러운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당화서의 눈이 핑핑 돌았다.

그간 굳이 인식하지 않으려 했던 그의 얼굴을 바로 마주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발악해봐야 그도 결국 여인.

미남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동물인 것이다.

이지가 흐려진 당화서가 한 선택은, 참으로 무인다웠다.

“떠, 떨어지십시오!”

빠아악­!

“커흡…!”

당화서가 발악하듯 뻗은 주먹이 목리원의 명치에 제대로 꽂혔다.

목리원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화서를 바라봤다.

‘아차…!’

당화서는 뒤늦게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목리원에게 사과했다.

목리원은 이 일로 제갈산과의 교분을 허락받았다.

*

“그래서! 이 목리원이 제갈 공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오!”

“허….”

이전 날 만났던 객잔.

오늘도 당화서가 자리를 비운 틈에 목리원을 찾아온 제갈산은 헛웃음을 흘렸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제갈산은 목리원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얼굴.’

얼굴이 무기였다.

저 얼굴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무기였다.

과거 남궁진천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당화서다.

그렇기에 제갈산은 그가 남성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남궁형조차 모자랐던 것인가!’

당화서의 기준이 대체 얼마나 높은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이제야 감이 잡혔다.

눈앞의 이 사내 정도는 되어야 그 독봉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겠지.

‘세상에.’

너무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제갈산이 끅끅 웃었다.

목리원은 왜 제갈산이 웃는지도 모르고, 그가 웃으니 마냥 따라 웃었다.

“하, 하여튼!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음?”

“기연, 기연 말이오! 제갈 공자가 만났다던 기연은 무엇이오?”

목리원의 눈은 애달픈 기대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제갈산은 그 기색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유쾌함을 드러냈다.

“그냥 제갈형이라 부르시오. 내가 올해로 스물이니 그편이 편하지 않겠소?”

“형님이라…!”

목리원은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 말인즉슨, 의형제가 되자는 말이오?”

목리원의 속에서 형 아우 하며 교분을 나누는 관계는 하나였다.

바로 목선오와 마일석.

함께 강호를 주행하며 온갖 협행을 이뤄온 그런 관계 말이다.

자신도 드디어 그런 친우를 찾았다는 것에 기대감이 잔뜩 차올라 묻자, 제갈산은 눈을 끔뻑이다 그만 폭소를 터뜨렸다.

“아암! 못할 건 뭐요! 내 그럼 앞으로 목아우라 부르겠네!”

“알겠소! 나도 제갈형이라 부르겠소!”

목리원은 분주하게 잔 두 개를 챙겨와 죽엽청을 따랐다.

그리하고 한 잔을 제갈산에게 건넸다.

“기념이오! 제갈형도 한 잔 드시오!”

“좋지. 좋아. 그 전에 말일세.”

제갈산은 씨익 웃으며 목리원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리곤 전날과 같이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이었다.

“목아우. 우리 의형제가 된 날을 기념해서 해야 할 것이 있지 않나?”

“음? 해야 할 일 말이오?”

“협행.”

쿵­!

목리원의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 위론 벅차오르는 감동이 가득했다.

“혀, 협행…!”

“그래, 협행 말일세.”

“가지! 가야지! 어서 가야지!”

목리원이 벌떡 일어났다.

제갈산은 폭소를 터뜨리며 목리원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암! 어서 가보지!”

그리 말하곤 목리원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객잔을 나섰다.

“어디로 가는 것이오?”

기대감이 가득한 물음.

그것에 제갈산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좋은 곳.”

목리원은 몰랐다.

이 길 끝에 있는 것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장원이며, 그곳엔 전날 제갈산이 언급한 ‘미망인’이 살고 있다는 것을.

괴룡 제갈산은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떻게든 해내는 집요한 사내라는 것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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