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사장 안휘 (3)
* * *
괴룡(??) 제갈산.
이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후기지수.
이름 그대로 제갈세가의 적자로 태어난 이이며 동시에 그 별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괴상한 행보로 강호의 시선을 끄는 이였다.
대체 얼마나 기이한 일을 하기에 괴룡이란 별호까지 붙었느냐.
그리 묻는다면 길을 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도 그 답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일화가 몇가지 있었다.
거지의 옷을 빌려 입어 길에서 동냥을 한 일.
지역 유지의 장원에 머슴으로 들어가 똥간 속을 헤엄친 일.
그리고 흑도의 가장 강성한 세력 중 하나인 흑원회(??會) 회주의 아내에게 청혼한 일까지.
그는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치광이의 행보를 이어온 사람인 것이다.
물론, 그 모든 사실을 알지 못하는 목리원에게 제갈산이 가지는 의미는 하나였다.
“이리 빨리 들킬 줄은 몰랐지만… 뭐, 이렇게 된 거 다시 인사드리지. 제갈산이라 하오. 형장이 바로 그 묵검 대협이 맞소?”
“제, 제, 제갈…!”
제갈세가의 적자.
무림맹의 두뇌라 불리는 그 진왕(?王)의 아들.
목리원의 얼굴 위로 동경과 설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그 묵검이오! 제갈가의 협사를 뵈어 영광이오!”
목리원이 과장된 움직임으로 포권을 취했다.
당화서는 그의 행동에 한숨을 푹 내쉬었고, 제갈산은 껄껄 웃음을 토해냈다.
“소협, 그만하시고 앉으시지요. 그리 예의를 차려줄 필요 없습니다.”
“어이쿠, 누님도 참 정 없으시오. 어디보자… 우리가 거의 6년 만에 만나는 것 아니오?”
“그리 그리워 할 만큼 사이가 좋았던 기억은 없는데. 왜, 또 속에 독이라도 쑤셔 박아줘야 입을 다물겠느냐?”
제갈산이 과장되게 겁먹은 척을 했다.
목리원은 그때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당화서의 출신을 떠올렸다.
‘아! 소저도 오대세가의 일원이셨지!’
사천당문은 엄연한 오대세가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가문이다.
그런 만큼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할 터.
자신에겐 언제나 친절했던 그녀가 새삼 멀게만 느껴지는 기분에 목리원이 쭈뼛대자, 당화서는 그의 팔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예, 당황스러우시겠지요. 저놈과는 지난날 몇 번 본 인연입니다만 거기까지입니다. 소협께서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인간이에요.”
안심을 시키는 말.
이는 제갈산에겐 생소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광경이었다.
‘호오….’
저 독봉(??)이 타인에게 이리 살갑게 굴던 적이 있던가.
언제나 고고하고 날이 서 있어 곁에 그 누구도 두지 않던 그녀가 아닌가.
제갈산의 속에 희열이 떠올랐다.
온 세상이 아는 그의 기벽, ‘호기심’에 의한 것이었다.
제갈산은 목리원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 호기심이 많은 인간이다.
아니, 떠오른 호기심을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발악하는 성정을 고려하면 목리원보다 악질적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사실 그가 보인 기이한 행보도 그가 떠오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면 설명이 가능하지 않겠나.
지금만 봐도 그렇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10여년이 넘게 봐온 당화서라는 인간의 새로운 면모는, 제갈산의 그런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보기만 했겠소? 누님과는 그간 몇 차례나 뜨거운 만남을….”
“몇 번 용봉지회에서 만나 비무를 했지요. 저놈 주둥아리가 너무 가벼워 매를 든 일이 기억이 납니다.”
당화서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목리원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분위기를 파악하고자 애썼다.
‘소저께선 제갈 공자를 썩 좋아하지 않으시는구나.’
사실 목리원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그에 대한 것을 많이 알지 못하지만, 제갈산은 다짜고짜 미간에 젓가락을 던진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고 자신을 무시하는 당화서를 원망하지 않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호인이라 할 인간이 아닌가.
‘음, 소저께서 나를 걱정해 제갈 공자와 거리를 벌린 것일 수도 있겠어.’
외부에 비치는 자신은 출신 문파도 없는 낭인이니, 혹시 명문가인 그가 자신을 해코지할까 걱정 중일 수도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강호협객전 4장, 인협의 일대기를 보면 그의 비루한 출신 탓에 명문가의 철부지들이 덤벼드는 일도 있지 않던가.
‘소저도 참 괜한 걱정을 했군!’
목리원은 자신이 그런 일에 상처받을 정도로 마음이 여리지 않음을 당화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반갑소! 소저의 오랜 지인을 만났다니 이 어찌 뜻밖의 행운이 아닐 수 없구려! 이 목리원, 오늘은 제갈 공자와 교분을 나눌 수 있게 되어 영….”
“헛소리 그만하고 가지요.”
“으어어어어?”
당화서가 벌떡 일어나 목리원을 끌고 나갔다.
목리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 남은 제갈산과 당화서를 번갈아 봤다.
제갈산은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목리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
“…그런 인간입니다. 아시겠지요? 그놈이랑 가까이 지내다간 소협께서도 나쁜 물이 들 수가 있어요.”
“그, 그런….”
객잔에서 빠져나와 도착한 숙소.
목리원은 당화서가 말해준 제갈산의 기행에 경악을 표했다.
“어, 어떻게 유부녀에게 청혼을….”
다른 것보다 충격적인 게 바로 그 일이었다.
거지를 흉내 낸 일이나 똥간을 헤엄친 일, 그리고 알몸으로 거리를 내달린 일은 그냥 이상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끝날 일이지만 저것은 도의에 어긋난 일이 아닌가.
“차, 참으로 나쁜 사람이었구려…!”
목리원의 얼굴에 부정적인 기색이 떠올랐다.
당화서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솔직한 말로 당화서는 제갈산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어디서 어떤 기행을 펼치던, 자신만 엮이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이고 있는 탓이다.
하나 목리원이 그 사이에 끼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워낙 백지 같은 사람이니 나쁜 일을 배울 수도 있다.’
당화서는 이리 착한 목리원이 제갈산에게 물들길 바라지 않았다.
“그놈은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소협을 또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땐 꼭 그에게서 도망쳐 제게 일러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알겠소! 내 꼭 그리하겠소!”
목리원이 결연하게 답했다.
하나, 안타깝게도 그의 결심이 빛을 발하는 일은 없었다.
*
당화서가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며 떠나간 와중.
목리원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죽엽청을 꼴깍꼴깍 마셨다.
“대협, 그리 말을 무시하면 너무 섭섭하오.”
맞은편엔 어찌 안 것인지 당화서가 떠나자마자 찾아온 제갈산이 있었다.
그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위적인 슬픔을 띄워 올리며 목리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소, 소면이 아주 일품이군!”
“그래서 말이오. 누님과는 어찌 만나신 것이오?”
“죽엽청도 아주 달구나! 어쩌면 오늘은 취해버릴지도 모르겠어!”
“응? 일륜회를 단신으로 해치운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아, 아아…! 주도에 너무 심취한 것인가! 머리가 어지럽고 귀가 안 들리는구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웃기지도 않는 연기를 하는 목리원의 모습에 제갈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거참 재밌는 사람일세.’
대체 어떤 매력이 있어 그 당화서를 녹인 것인가 했는데, 과연 저 거리의 이야기꾼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스운 면모가 보였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이리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에 죄책감까지 보이니 괴롭혀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 아닌가.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겠고….’
파악이 쉬운 유형.
즉, 꽤 재밌는 장난감이라는 뜻이었다.
제갈산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웃음을 꾹 눌러내며 재차 말을 이었다.
“허어… 이리 침통할 수가. 마침 강호를 들썩이게 한 고수를 만나 설렌 가슴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구려. 내 오늘 밤은 밤새 강호의 도리에 대해 담소를 나눌 친우를 만나는가 했건만….”
“으읏…!”
목리원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토해냈다.
‘가, 강호의 도리…!’
이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단어인가.
이 얼마나 입을 근질근질하게 만드는 단어인가.
당장이라도 눈을 뜨고 싶었다.
제갈가의 적자와 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뜨거운 토론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소저의 말이….’
“아쉽구나. 아쉬워! 내 이곳에 오기 전 만났던 기연에 대한 이야기를 풀 상대가 필요했거늘…!”
“기연 말이오?!”
기연은 못참겠다.
“오, 드디어 답해주시는구려.”
“기연! 무슨 기연이오?! 절벽? 아니면 은거기인? 그도 아니면 혹 산을 타다 천년하수오라도 발견한 것이오?!”
목리원의 머릿속엔 이미 당화서의 충고가 싹 지워져 있었다.
떠올리는 것은 오직 하나, 제갈산이 만난 기연.
제갈산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목리원의 모습에 씨익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그의 옆자리였다.
탁!
목리원과 어깨동무를 하며 그는 말했다.
“자자, 혹 그 전에 이 이야기부터 들어보시겠소? 이곳 마을의 한 미망인에 대한 것인데 말이오….”
흠칫.
목리원은 몸을 떨었다.
갑자기 나오는 ‘미망인’이라는 단어에 뒤늦게 당화서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놈이 흑원회주의 아내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무슨 들꽃 천 송이를 모아 커다란 다발로 만들어 건넸다고 하더군요.
목리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 어허! 무슨 그런 망측한 말을…!”
“미망인이 망측하오? 설마… 목 대협은 남편을 잃은 여인을 그런 시선으로…!”
“아, 아니오! 나는 그럼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이게 무슨 큰일 날 말인가.
목리원은 속에 제갈산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제, 제갈 공자!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참 간사하오! 남편이 있는 여인에게 흑심을 품은 것은 당신이지 않소!”
객잔의 시선이 몰렸다.
제갈산은 유쾌함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삐죽삐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
“으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내 소저에게 이미 다 들은 참이오! 제갈 공자가 유부녀에게 청혼한 일을!”
세상에, 그 소문이 진짜였나보구먼!
괴룡이 정말 유부녀에게 청혼을 했단 말인가? 그것도 흑도의 여인한테?
이럴 수가! 어찌 그런….
객잔의 손님들은 제갈산을 보며 숙덕댔다.
하나 제갈산은 그런 말들에 흔들릴 정도로 가죽이 얇은 사람이 아니었다.
“잘못되었소?”
“그럼! 한참이나 잘못되었지!”
“이상하구려. 나는 고통받는 여인을 구원해주기 위해 그리한 것인데, 왜 이상하다는 말이오?”
“으, 음?”
“그렇지 않소. 흑원회주의 악랄함이 어디 보통 수준이었소?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나는 흑원회주의 포악함에 시름시름 앓는 그녀를 돕고자 했을 뿐이오.”
제갈산이 목리원을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대협, 묻겠소. 악한 사내에게 볼모로 잡혀 매일 고통 속에 사는 연약한 여인을 구하는 일이면 협행이 아니오? 설령 내 평판에 문제가 생긴다 한들, 그 일로 더 이상 아내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 흑원회주가 그녀를 팽했다면 그녀를 자유롭게 했으니 옳은 일은 한 것이지 않소?”
“어, 어…?”
“불한당이라는 평판을 듣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여인을 외면하는 것이 어찌 협이란 말이오?”
목리원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드, 듣고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마냥 이야기만 들었을 때완 다르게, 그 내막을 알게 되니 도리어 제갈산이 엄청난 협객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 내가 잘못 안 것인가!'
…아니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제갈산이 지어낸 이야기였다.
제갈산은 그냥 유부녀가 좋았다.
“대답해보시오. 목 대협은 본인의 평판을 신경 쓰느라 약자를 외면하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사람을 재단하는….”
제갈산의 얼굴 위로 실망감이 떠올랐다.
“…‘가짜 협객’이시오?”
쿵!
목리원은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손이 벌벌 떨리고 눈물이 팽 도는 기분이었다.
‘내, 내가…!’
시야가 좁았던 것인가.
타인의 이야기만 듣고 선입견에 빠져 있는 불한당이었던 것인가.
“아, 아니오….”
목리원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갈산은 그 모습에 더 이상 웃음을 참기 힘들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 말… 푸흡, 말해보시오! 목 대협, 아니. 형장은 나를 무엇으로 본…!”
빠아아악!!!
“…억!”
“지랄을 하는 구나! 목 소협! 제가 이 인간이랑 말 섞지 말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볼일을 마친 당화서가 돌아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