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삼장 동행, 귀곡 (4)
* * *
두 사람은 소녀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걸었다.
발자국 따위의 흔적조차 희미했고, 그 앞으로 보이는 것은 울창한 숲이었으나 그럼에도 걸었다.
그리고, 강시를 만났다.
자박.
말라비틀어진 수풀 위를 통통 뛰어다니는 것은 분명 이곳에 살았던 이들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의 복장은 혈천교나 무림맹의 무인이라기엔 너무나도 남루하고 볼품없었던 탓이다.
“정말 강시구려.”
목리원은 쓰게 웃었다.
그는 피독주까지 뱉어내고 한 손에는 검을 쥐며 당화서에게 말했다.
“고집을 부려 미안하오.”
“되었습니다. 끝까지 말리지 않은 것은 저 또한 목 소협의 말에 일리가 있다 판단한 이유이니.”
당화서는 그리 말하며 웃었다.
자신의 말이 맞았고 결국 또 적을 맞닥뜨리게 되었으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일이 아닙니까. 이곳에 길을 잃은 아이는 없었던 것이니.”
목리원은 당화서의 말에 감동을 느꼈다.
그리하여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다, 이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빠져계시오. 홀로 하겠소.”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만큼 수가 많지도 않소. 또한 강해 보이지도 않소.”
강시는 총 15구.
움직임은 직선적이고 둔하여 이류의 무인만 왔어도 상대가 가능해 보일 정도였다.
참, 언젠가 들었던 목선오의 말대로.
“양민이지 않소. 이제 편히 쉬게 해드려야지.”
그들은 너무나도 약한 자들이었다.
*
서걱.
목리원은 가장 앞서 달려오던 강시의 목을 베었다.
그 어떤 기교도 초식도 없는 단순한 가로 베기였다.
그럼에도 강시의 목은 깔끔하게 썰렸다.
이어지는 등 뒤를 노려오는 공격.
이 역시 목리원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몸을 뒤틀어 목을 베었다.
서걱.
목리원의 표정은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어딘가 슬픈 기색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이유는 하나.
그가 검을 배운 후 최초로,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싸우며 처음으로.
‘…없구나.’
싸우는 상대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들이 살기를 잘 숨긴다 따위의 말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들에게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반경에 들어온 상대에게 달려드는, 그리하며 무너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누구의 의도인지는 몰랐다.
왜 이들이 이곳에 방치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목리원은 그것이 슬펐다.
…그리 가여운 이들일 진대도, 세상은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법이더구나.
목선오의 말대로, 그들의 비명이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슬펐다.
서걱.
마지막 강시의 목이 떨어졌다.
목리원은 숨을 가다듬었다.
땀 한 방울조차 흘릴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량의 차이.
모든 일을 끝낸 목리원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숙였다.
스르르 눈을 감고 속으로 말을 전했다.
‘이젠 쉬시오.’
묵념이었다.
이제 와 침묵만이 남은 수풀 속.
목리원은 한참이나 묵념을 이어가다 눈을 떴다.
‘스승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리하며, 그 언젠가부터 속에 자리했던 의문에 답을 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을 확고한 답이었다.
협객은 왜 무인이어야 하는 것인가.
‘약자의 목소리는 닿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한 협인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한 협이다.’
그리하여, 나아갈 길은.
‘힘이 없어 스러지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적어지도록.’
역시 협이었다.
*
당화서는 모든 과정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이렇게 쉬워도 될까 싶을 정도로 쉬이 끝난 상황에 내뱉을 말조차 떠오르지 않아 그저 목리원이 묵념하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풀썩.
목리원이 옆으로 쓰러졌다.
“…소협!”
당화서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안색이 새하얬다.
숨은 턱턱 걸리는 형태로 내뱉고 있었고, 눈썹 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중, 당화서는 뒤늦게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기억해냈다.
‘피독주!’
전투가 있고부터 지금까지, 목리원이 피독주를 물지 않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피독주를 물지 않은 목리원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까지 동시에 힐난하는 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잔혈곡은 독기와 사기로 범벅된 땅이다.
제아무리 절정의 무인인 목리원이라 하나 맨몸으로 버티긴 힘든 장소란 말이다.
이것은 명백한 중독 증세.
당화서의 손이 그의 봇짐을 향했다.
일단 새로운 피독주라도 물려 추가적인 중독을 막기 위한 것.
하나, 봇짐을 뒤적이던 당화서의 표정은 빠른 속도로 바로 구겨지기 시작했다.
‘없다.’
직전까지 물고 있던 게 마지막 피독주였던 듯했다.
‘숨겼어?’
자신한테 그 사실을 숨긴 것이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돌아갈 때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억지를 부린 것이겠지.
독기가 몸에 퍼지는 것보다 이 일을 더 중요하다 여긴 것이겠지.
미련하고 멍청한, 그렇기에 그다운 선택이었으나.
‘썩을…!’
최악의 선택이었다.
당화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주변을 둘러본다.
이곳은 잔혈곡 한가운데.
경신법까지 펼치며 달려도 반나절은 더 움직여야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외부와 거리가 있었다.
당장 달려 나가는 게 옳았으나, 그때까지 목리원이 버틴다는 보장이 없었다.
목숨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기가 장기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면 생길 후유증이 문제였다.
당화서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소협의 독기, 잔혈곡의 탈출, 그리고 정양.’
정양 문제는 인면지주의 내단을 먹이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니 독기와 탈출만을 고려하는 게 옳은 선택.
독기의 진행을 최대한 늦춰야 할 것이다.
그리하며 목리원을 업어 들고 이곳을 빠져나가야겠지.
당화서는 침착하게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그리하며 목리원의 뺨을 짝짝 갈겼다.
“목 소협!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으음….”
눈꺼풀을 뒤집으니 반쯤 풀린 동공이 보인다.
그 와중에도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직 완전히 이성을 잃진 않은 모양.
“잘 들으십시오. 지금부터 소협의 독기를 제가 빨아들일 것입니다. 이동도 알아서 할 테니 소협은 한 가지만 신경 쓰십시오.”
당화서는 품속에서 비수 하나를 꺼내 목리원의 왼쪽 검지를 찔렀다.
방울방울 져 조금씩 새어 나오는 선혈.
당화서는 그것을 확인하고서 말을 이었다.
“지금 상처를 낸 쪽으로 독기를 몰아넣으십시오. 정신을 잃지 않으셔야 합니다. 알겠으면 눈을 두 번 깜빡이십시오!”
고함에 가까운 소리로 건넨 말.
목리원은 끔뻑끔뻑 답을 전했다.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목리원을 들처업었다.
그리고 한쪽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른 후, 상처 낸 그의 검지를 입에 물었다.
“그름 들릅느드!”
당화서의 전신에서 흐린 암녹색의 기파가 퍼져나가 다리에 몰렸다.
직후.
타앗!
당화서의 신영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
얼굴이 다 따가울 정도로 강한 바람.
이리저리 휘날리며 뺨을 착착 때리는 부드러운 머리칼.
그리고 왼쪽 검지 끝에서 느껴지는 말캉하고 따뜻한 감촉.
“쭙.”
목리원은 멍한 정신으로 그것들을 되새겼다.
눈은 여전히 반쯤 감겨 있었다.
속은 울렁거리고 호흡은 힘들었다.
머리도 지끈지끈 울리는 것이 생전 이렇게까지 아파본 일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
‘독기….’
독기를 몰아내야 한다.
목리원 스스로가 낸 판단이 아니라, 그리 멍한 와중 당화서가 전한 말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거짓말까지 해가며 강시와 싸웠으니, 이 말조차 듣지 않으면 당화서에게 크게 혼날 것이란 생각에 한 행동인 것이다.
다행인 일이었다.
목리원의 난폭하기 그지없는 기운은 이리 독기에 범벅이 된 와중에도 꾸역꾸역 혈도를 내달리고 있었으니.
내력이 단전에서 흘러나와 혈도를 따라 솟아오른다.
그리고 몸에 퍼진 독기를 잔뜩 머금은 채 허리, 가슴, 어깨, 팔을 통해 검지 끝으로 몰린다.
그러자.
“쭙.”
따끔한 기운과 함께 축축하고 따스한 살덩이 같은 것이 검지를 감쌌다.
멍한 와중에도 목리원은 생각했다.
왜인지 간질간질하고 기분이 좋은 감각이라고.
몸 상태가 이리 좋지 않은 것만 빼면 너무 편하고 따스한 것 같다고.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부드러운 머리칼에선 자신의 것과는 다른 냄새가 났다.
누군가가 자신을 꼭 끌어안는 느낌에 긴장이 풀리는 것 같다.
목리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한창 편안함을 만끽하던 중, 그제야 알게 된 것이 있는 까닭이다.
‘소저의 냄새.’
당화서와 함께 있으면 항상 은은하게 풍겨오던 단내.
그것이 그녀의 체향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피어난 미소였다.
“쭙.”
또 들려오는 소리와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
그것이 목리원이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조금씩 속이 편해지는 기분에, 목리원은 그만 잠에 빠져들었다.
*
잔혈곡이 끝나는 냇가.
그곳엔 땀에 절어있는 한 여인과 바닥에 고이 누워있는 사내가 있었다.
여인은 호흡도 정리하지 못한 채 사내의 안색을 살폈다.
냇가의 물을 떠서 그의 입안으로 흘려주기도 하고, 천 쪼가리 따위로 얼굴의 땀을 닦아주기도 하다 겨우 긴장이 풀린 듯 몸을 늘어트렸다.
숨을 돌린 여인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분노.
하나, 그 기색이 사내를 해치려는 꼴은 아니었다.
여인은 제 오른손을 들어 사내의 뺨 위로 얹더니 그대로 강하게 꼬집어 늘리기 시작했다.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는 게 혼을 내는 것 같기도 한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계속 잠에 빠져있었다.
그 모든 것을 먼 자리에서 바라보던 이가 있었다.
일찍이 잔혈곡의 마을에서 목리원과 당화서가 봤던 바로 그 소녀였다.
“끌끌, 고놈 참 잘도 자는구나.”
웃음소리는 꼭 노인들이 낼 법한 그런 형태.
들썩이는 어깨는 그녀의 기분이 얼마나 기꺼운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찌익.
소녀가 얼굴 위로 손을 얹어 가죽을 벗었다.
그러자 그 아래로 소담한 인상을 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자, 챙겨두거라.”
노인은 제 옆을 지키던 복면인에게 가죽, 인피면구(人???)를 건넸다.
사내는 그것을 받아들며 노인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무엇이 말이냐.”
“인면지주를 잃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강시도….”
“되었다. 애초에 몸보신이나 해볼까 하고 키운 인면지주였고 강시 또한 치우기가 귀찮아 놔둔 것이었으니. 대신 재밌는 걸 보았지 않느냐.”
노인은 그리 말하며 따스한 눈으로 먼 곳의 목리원을 바라봤다.
“목가 놈이 꼭 지같은 걸 만들어놨어.”
복면인은 노인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예, 검성께서 또 대단한 일을 하신 듯합니다.”
“검성은 무슨.”
노인이 피식 웃었다.
“그냥 철딱서니 없는 노인네지.”
노인은 뿌드득하고 허리를 편 후, 뒷짐을 지며 돌아섰다.
“가자꾸나, 확인했으니 되었다.”
“그 말씀은….”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복면인은 그 말에 목리원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통과인가.’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그만큼 그가 특별하다고 해야 할까.
복면인은 알았다.
지금 뒷짐을 진 채 떠나는 노인의 기준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녀가 얼마나 두려운 사람인지.
살성(??) 염소소.
사성육왕에 이름을 올린 정파 무림의 십대 고수 중 하나.
야음을 틈타 악한 이를 벌하는, 살수라는 업을 인 채로 협객으로 추앙받는 어두운 별.
혈사가 끝나던 날, 천살성을 이고 난 저 사내의 명운을 결정하던 열 명 중 하나였다.
이 아이가 클 때까지 지켜보도록 하지. 강호에 나온 이 아이의 싹수가 까매 보이면 내가 직접 목숨을 거두겠네.
그날의 염소소가 내뱉었던 말.
이리 돌아서는 것을 보면 저 목리원이란 사내가 그녀의 마음에 든 것일 터다.
“뭐하는 게냐? 어서 안 오구?”
“가겠습니다.”
전해지는 독촉에 복면인은 떠오른 생각을 지워내며 염소소의 뒤를 따랐다.
걸음이 이어졌다.
인면지주가 있는 동굴의 입구에서 한참이나 기어 올라가면 보이는 틈새.
그곳을 빠져나와 또 숲길을 건너면 보이는 안개를 헤치면 나오는 곳이 있었다.
살곡(??).
이 강호의 가장 어두운 별은, 오늘도 독기 어린 땅의 뒤편에 숨어 먹잇감을 고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