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이장 강호초출, 그리고 요녀 (8)
* * *
찰나가 무한히 늘어난다.
목리원에겐 그리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검이 인간의 살갗과 그 아래 근육을.
이어 뼈를 헤집는 감각을 느낀 순간, 정상범위를 벗어나 가속한 대사가 그런 현상을 만든 것이었다.
한껏 좁혀진 목리원의 동공이 허공에 피어난 선혈을 응시했다.
그러자 이는 반응이 있었다.
쿵.
심장이 뛰었다.
검 끝은 뒤늦게서야 떨린다.
호흡은 가빠지고 등골엔 전류가 짜르르 울린다.
살심을 억제해라.
‘억제.’
억제해야 할 감각들이었다.
외면하고 짓이겨 존재를 부정해야 할 감각들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달콤한 감각들이었다.
“끄읍…!”
억눌린 표산의 신음에 목리원은 쾌감을 느꼈다.
사고는 빠르게 튀어 다음을 상상했다.
방금 베어낸 것은 소태도를 들고 있던 손목.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표산의 마지막 무장이니, 그는 더 이상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을 터였다.
발목을 베어 바닥으로 처박아 종아리 한가운데를 찌른 후 허벅지 쪽으로 그어 올리면 도주 역시 불가능해질 터.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펄떡거리기에 바빠질 것이다.
다음은?
아, 팔꿈치 뒤쪽을 찔러 헤집은 후 한창 몸부림치고 있을 때 어깨부터 끊어내면 될 터다.
이미 팔 아래는 사라져 없을 테지만, 그는 팔꿈치가 타들어 가는 듯한 환통을 느낄 테니 또한 가련하게 비명을 토해내 줄 것이다.
사고가 무한히 확장된다.
상대에게 고통을 줄 방법이 무한하게 떠올랐다 사라진다.
찰나였다.
이 모든 상념은 베어낸 손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바닥으로 가라앉기도 전의 짧은 순간 완성된 것이었다.
투두둑.
바닥을 두드리는 핏물이 목리원의 고막을 울렸다.
목리원은 그 순간에서야 이성을 잡을 수 있었다.
“아….”
숨이 턱 틀어막힌다.
그 짧은 순간, 무력화된 인간을 보며 자신이 느낀 욕구가 어떤 형태인지를 알게 되니 낭패 어린 심정이 떠오른다.
‘…억제해라.’
그리 되뇌며 아를 악물었다.
떨리는 검 끝을 바로 다잡고 표산을 노려봤다.
이를 악 문 채 마찬가지로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
그의 눈엔 아직 절망이 깃들지 않았다.
‘나는 무인이다.’
또한 협객일지니, 적을 앞에 두고 행할 것은 쾌락을 우선한 망상 따위가 아닌 적법한 결투여야 할 것이다.
목리원은 그런 생을 떠올리며 검을 뻗었다.
그를 무력화하기 위한 최후의 검초였다.
하나,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느라 집중이 끊어진 초식에는 분명 빈틈이 존재했다.
표산은 그것을 느꼈다.
하여 아직 남아있는 다른 손에 암청색의 기를 씌운 후, 목리원의 검면을 후려쳤다.
쩌어엉!
온 공간에 다 울려 퍼지는 굉음 뒤로 드러난 결과는 당연하게도 목리원의 열세.
그의 검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진 무학적 재능을 둘째치고, 순수하게 내공과 내공으로 맞붙으면 아직 절정의 초입인 목리원과 절정의 끄트머리에 있는 표산의 공력엔 그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열이 뒤바뀐 후 처음으로 드러난 목리원의 빈틈.
표산은 몸을 회전시켜 발을 뻗었다.
‘허리.’
목리원은 그것을 느끼고 빠르게 손을 휘저었다.
턱 하고 붙잡히는 것은 날카롭게 쏘아지던 표산의 발목.
이 또한, 그의 재능이 본능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상대를 손아귀로 사로잡는 반격기.
금나수(??手)의 묘리를 이용한 것이다.
목리원은 손목을 뒤틀어 표산의 발목을 꺾었다.
힘이 가해지는 방향은 그의 발목 관절이 가동할 수 있는 범위 밖.
뿌득.
표산의 발목이 짓이겨졌다.
“끄아아아악!”
최후의 발악은 그리 끝이 났다.
표산은 갑작스레 터져 나온 통증에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엎어졌다.
발목이 죄다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에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하나, 그런 와중에도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어떻게 쏘아내는 모든 공격이 읽힌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 사내는 겨우 성인의 문턱에 걸쳐있는 풋내기고 자신은 숱한 강호의 풍파를 맞아온 고수일진대.
지금 이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저 사내여야 할진대.
“흐읍…!”
사내는 그저 흉신악살처럼 찌푸려진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이오!”
목리원이 외쳤다.
표산은 핏발 선 눈으로 그것을 노려봤다.
묵색의 기파를 줄줄 흘려내며 검을 주워 드는 모습은.
공력을 열세를 뒤집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승리한 사내가 보여주고 있는 풍경은.
‘재능…!’
이 불공평하기 그지없는 강호의 민낯이었다.
인간은 이다지도 간사한 동물이라.
패배가 확정된 순간 표산이 떠올린 것은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죄악감도 무인으로서의 수치심도 아닌, 바로 그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뿌드득.
표산은 핏물이 짓이겨져 나올 정도로 강하게 이를 갈며 목리원을 노려봤다.
목리원은 이제야 진정되기 시작하는 기벽에 숨을 내쉬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공간.
그곳에 다른 목소리가 끼였다.
“소협…?”
화서의 목소리였다.
*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또한 화서로선 평생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었다.
‘표산이….’
졌다.
언제나 음울한 눈으로 자신을 나락으로 이끌던, 절대 스러지지 않을 것 같던 그림자의 조각이 처량하게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 앞으로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아직 진정되지 않은 호흡.
몸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핏물들.
그리고 묵색의 기파.
화서는 그제야 그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알았다.
‘…절정.’
절정지경의 무인.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그럼에도 현실로 자리한 풍경 속에서 그는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이 이미 초인의 경지에 이른 무인임을.
“…소저.”
흠칫.
화서의 어깨가 떨렸다.
시선은 멍하게 목리원을 향했다.
“내가 뭐랬소.”
전투의 여운을 지우지 못한 것인지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그의 낯빛은, 화서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조금씩 헤퍼져 여느 때와 같은 미소로 화하고 있었다.
“질 것 같지 않다니까.”
어여쁘고 맑은 미소였다.
화서는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협객은 악적에게 지지 않소. 이는 강호협객전의 제 1장에 나오는 검협의 대사요.
실로, 그는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그것이 화서로 하여금 마음이 젖어 드는 듯한 감정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이제 소저를 괴롭히는 것은 없소.”
목이 메어 왔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도, 그가 떠나고 고민을 떠올리던 순간도, 이곳에 찾아오고자 마음먹은 순간도.
그저 승리가 아닌 발악을 바랐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그는 당당했다.
“…그런 듯합니다.”
화서는 애써 웃었다.
목리원의 기파가 잦아들었다.
화서는 걸음의 옮겨 그의 앞으로, 또한 표산의 앞으로 다가왔다.
표산은 왈칵 일그러진 얼굴로 화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가씨. 이대로 끝날 것….”
“소협.”
“음?”
“제 아이들과 일륜회의 잔당을 정리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는 이 자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표산의 말을 끊은 화서가 그리 말하자,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그녀의 말이라서가 아니라, 지금 마주하고 있는 얼굴이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어 방해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탓이었다.
목리원이 멀어졌다.
화서는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표산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자네도 사람이긴 한가 보군. 이렇게 추하게 쓰러져있는 꼴을 보니 말이야.”
말을 내뱉는 화서의 얼굴 위로 떠올라 있는 것은, 허탈함과 원망이었다.
*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기억이 있었다.
“아가, 너는 다음 세대의 주인이 될 것이다.”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아린 순간이 있었다.
“이 할애비가 꼭 그리 만들어주마. 꼭, 너를 천하제일로 만들어주마.”
화서는 밀폐된 공간이 싫었다.
촛불 몇 개에 시야를 의존해야 하는 어두운 공간이 싫었다.
그리고 숨이 턱턱 막히는 악취가 싫었다.
어쩌면 그런 성향이 그녀로 하여금 기루의 루주라는 일을 하게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루주는 언제나 기루의 최상층에서 온 도시를 내려다보니, 태양빛을 가릴 그 어떤 장애물도 가지지 않으니, 또한 온통 분냄새와 술냄새가 가득찬 공간이라 코가 마비되어 오니.
그랬기에 그녀가 그런 일을 하고자 마음먹은 것일 터다.
“아가야. 아느냐? 그날의 혈사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단다. 혈마를 무찌르고 강호 무림을 구한 영웅이 되었으나, 겨우 그 위명 하나를 얻고자 수많은 것을 잃어야 했지.”
“조부님….”
“강호는 비정하다. 또한 변덕스럽다. 우리는 이리 위대한 위명을 얻었으나, 동시에 그것을 지킬 힘이 없다면 언제고 스러져 버릴 위기에 있는 것이야.”
“저 너무 아프….”
“그러니 네가 일으켜 세워야 한다.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음을.”
아집이라 말할 수도, 광기라고 말할 수도 있는 눈빛을 화서는 알고 있었다.
“…이 사천당문(四川?門)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임을, 네가 증명해야 한단다.”
늙고 병든 노인의 미몽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화서는 알고 있었다.
*
화서는 무릎을 꿇고 손을 뻗었다.
그것을 쓰러져 쌕쌕 숨을 내쉬는 표산의 가슴 위로 얹었다.
“가주께선 정정하신가?”
“그런 질문이 입에서 나오시오?”
“그럼, 그래도 피붙이인 것을.”
“염치도 없으시오…!”
표산의 눈이 번들거렸다.
화서는 그 눈빛을 바로 마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내 묻고 싶었던 말이 있어서, 그것을 어찌 건네야 할까 고민했다.
하나, 암만해도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을 빌어 나오는 것은 결국, 원망이었다.
“너는 내가 가엾지 않더냐?”
“가여워? 아가씨께서 어찌 가여울 수가 있는 것이오? 그런 특혜를 받아놓고 어찌 원망을 토할 수가 있는 것이오?”
닿지 않을 원망이었다.
화서는 쓰게 웃었다.
그런 중에도 표산은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도 아시지 않소. 아가씨가 받은 대법은 강호의 수많은 무인이 꿈에도 그리지 못하는 것임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감사해야 하오! 당신은 그것으로….”
“유년기를 잃었지.”
“그것을 잃고 만독불침(??不?)을 얻었소!”
표산이 비명을 내질렀다.
턱턱 넘어갈 듯한 숨으로 발악하듯 내뱉은 말은 화서의 가슴에 깊게 박히고 있었다.
하나 표산으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재능.
그리고 환경.
무인으로서의 화서는, 사천당가의 후계 당화서는 그 모든 것을 가진 이였다.
최고의 무공을 최고의 스승에게 배울 기회가 있었으며, 온갖 영약들을 원하는 시기에 섭취할 수 있었고 누군가는 꿈에나 그리던 경지를 숨 쉬듯 실천할 수 있는 이였다.
한데도 아직 저런 투정이나 부리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만독불침이오! 다른 것도 아닌 만독불침이란 말이오! 당가의 모든 독을… 아니! 이 강호에 존재하는 모든 독을 그 몸 안에 가둘 수 있는 천고의 대법이란 말이오! 한데 그것을 내려주신 가주께 어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오!”
“거듭 말하여, 나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아니! 원해야 하오!”
“내 몸속에 피가 아닌 독을 흐르게 한 이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냐?”
“그럼! 당연하지!”
화서는 더 이상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너무 오랜 도주였을까.
그제야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 까닭이다.
‘…그래, 그런 곳이었지.’
사천당문은 무정했다.
피붙이에게조차 무정했다.
그들은 언제나 결과만을 바랐다.
“졸렬한 가문이야.”
“뭣이?”
“그렇지 않느냐. 가문의 방침조차 은혜는 두 배로, 원수는 열 배로. 그래 놓고 한다는 짓은 사파나 다름없는 비인도적인 대법 따위니. 이게 졸렬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 졸렬한 것이겠느냐.”
표산의 얼구 위로 노골적인 분노가 떠올랐다.
오로지 충성밖에 모르는 이 우둔한 무인은 가문을 부정할 줄 모르기에, 화서는 그런 무인에게 설득을 더하지 않았다.
그저 행동을 더 했다.
사아아.
화서의 손등 위로 암녹빛이 감돌았다.
일류의 끝자락.
기파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기 시작한 그녀였기에 보일 수 있는 기교였다.
“축복이라 말했느냐? 감사해야 한다 말했느냐?”
“무, 무슨….”
“그럼 겪어보거라. 내가 매 순간 어떤 고통 속에 살고 있는지를.”
암녹색의 기파가 표산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꺼흡…!”
표산은 찢어질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신음을 토해냈다.
“꺼헉…!”
가슴 어림부터 혈관을 통해 퍼져나가는 것은 분명한 독기(??).
뜨겁고 욱신거리고 따가운 통증이 온 사고를 다 찢어발기고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독기가 퍼져나가는 순간, 온 전신이 마비된 까닭이다.
“죽지는 않을 터다. 그런 독은 아니니. 아마 내일쯤이면 독기가 다 가실 테니 버텨보거라.”
화서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리 말했다.
이어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먼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기감을 벼리면 들려오는 흑도들의 비명소리가 있었다.
분명 목리원과 수족들이 일륜회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겠지.
“저 멍청한 사내가 한 말이 있단다.”
“꺼흡, 끄으윽…!”
“죄를 짓지 않은 이는 도망칠 필요가 없다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악인일지라고. 그러니,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고.”
표산의 답을 기대하고 건네는 말은 아니었다.
화서는 그저 싱숭생숭한 이 마음을 토해낼 때가 없어, 그리고 내뱉은 결심을 확고히 하고 싶어 말을 이었다.
“가주께 그리 이르거라.”
화서는 언제나처럼 고아한 인상으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 당화서가, 더 이상 당신을 피해 숨지 않겠다고.”
일평생을 두려워했다.
또한 도망쳐왔다.
그럼에도 바뀌는 것은 없어, 자신은 아직 진탕 속에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헛된 낭만이나 좇는다고 말한들, 이상이나 꿈꾼다고 말한들, 그럼에도 화서는 그런 이상을 꿈꾸고 싶은 이유가 생겼다.
“진정 협이 존재한다면, 벌을 받는 것은 가주겠지.”
어리숙한 낭만일지라, 그것이 협일지라.
그렇기에 자신과 어울릴지라.
화서는 길고 길었던 세월 끝에 자신을 괴롭힌 악몽과 마주할 준비를 끝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