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1화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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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서장 ­ 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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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사(血史)가 있었다.

혈마 단천화.

혈천교의 아홉 번째 교주이자 온갖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른 그 죄인이 일으킨인재(人災)였다.

그의 패악질에 무림맹이 나섰다.

정파 무림의 기둥인 구파일방은 그를 베겠다 천명하며 문파의 문을 활짝 열었다.

무림에서 가장 강성하다 불리는 다섯 가문, 오대세가는 저들의 무력과 자금력을 동원해 혈천교를 찾아 나섰다.

그런 그들의 선두에 선 이들이 있었다.

사성육왕(四??王).

백도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는 십대 고수인 그들은, 가진 모든 힘을 다한 끝에 5년이라는 전쟁에 걸쳐 혈마의 목을 베어냈다.

서걱­.

거대하고 어두운 대전.

무언가가 베어 넘겨지는 소리 뒤로 ‘툭’하고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혈마 단천화의 머리였다.

“…끝이구나.”

그 머리를 바라보던 이가 말했다.

새하얀 백의에 그것과 같이 새하얀 머리와 수염을 가진 신선 같은 노인.

검성(??) 목선오가 내뱉은 말에 자리한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새하얀 그의 검 끝을 타고 흐르는 마귀의 피가 있었다.

그것이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며 이는 섬찟한 분위기가 있었다.

하나, 그것에 두려움을 품는 이는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추악한 악업이 끝난 순간이었으니, 자리한 이들이 품을 것은 기쁨이면 족한 것이었다.

와중, 검성은 쓰러진 혈마의 몸뚱어리를 뒤로 굳게 닫혀있는 쪽문을 바라봤다.

‘저곳을 지키려 했다.’

혈마와 직접 맞붙은 그이기에 아는 것이 있었다.

혈마는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다는 것.

그저 등 뒤에 있는 것을 내어줄 수 없다는 듯 마기를 끌어 올리며 발악했다는 것.

그렇기에, 자신이 그를 이길 수 있었다는 것.

검성의 눈이 좁아졌다.

저곳에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가 그런 행위를 한 것인지, 그에 대한 궁금증이 차오른 까닭이었다.

철퍽­.

검성이 바닥에 고인 핏물을 밟자, 등 뒤에 서 있던 이가 물었다.

“형님? 어딜 가시오.”

말을 내뱉은 이는 누가 봐도 상거지라 말할 추레한 몰골의 중년.

하나 평범한 거지였다면 이 자리에 서 있지도 않았으리라.

걸왕(?王) 마일석.

그는 정파의 기둥이라 불리는 구파일방 중에서도 개방의 방주 자리에 앉아있는 이였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오마.”

“으응? 그런 것이면 같이 가지. 이 아우가 친히 보필해드리겠소.”

“고맙기도 해라.”

검성이 농담조로 답하자 걸왕이 껄껄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혈마의 피로 얼룩진 대전을 지나 쪽문으로.

그 앞에선 검성이 검을 치켜들어 문을 베어내자, 그제야 안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검성의 표정이 굳었다.

“…아이구나.”

쪽문 뒤로 있는 것은 강보에 싸인 채 제단 위로 누워있는 갓난아이였다.

그 난리통 속에서도 깨지 않은 것인지, 아이는 고이 잠들어 있었다.

‘혈마의 아이인가.’

검성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런 패악질을 저지른 마귀조차 제 아이는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하에 떠올린 생각이었고, 이내 스러진 생각이었다.

‘…아니다. 세상 어떤 부모가 제 자식을 제단 위에 얹어두겠는가.’

이곳은 명백한 제단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진동하는 것은 분명 혈향(血?)이었다.

검성은 어렵지 않게 이 제단의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술(??).’

아마 이 아이를 어떤 사술에 이용하려 한 것일 터.

검성은 분노했다.

그리하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제단에 다가섰다.

그렇게 제단에 다다라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검성은 흠칫 몸을 떨었다.

“형님?”

뒤늦게 따라온 걸왕이 그를 불렀다.

직후 아이를 보곤 똑같이 표정을 굳혔다.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느새 눈을 뜬 아이의 눈동자가 피처럼 붉었던 까닭이다.

걸왕이 낮게 읊조렸다.

“천살성….”

중원에서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뜻하는 바는 그것 하나였다.

천살성.

그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환란에 빠트리는 살귀의 별.

아이는, 그 운명을 이고 있었다.

“죽입시다.”

걸왕은 말했다.

그가 다스리는 것이 개방이기에, 중원 무림의 모든 정보를 취합하는 그이기에 내뱉는 말이었다.

“이 아이가 자라 또 다른 혈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직 갓난아이일 때 죽입시다.”

걸왕은 알았다.

이제까지 이 살귀의 별을 타고 난 이들이 무림에 어떤 환란을 일으켰는지.

저 멀리 신강 너머의 3대 천마(??) 이무백은 서부 무림을 피로 물들였다.

한낱 낭인이었던 검귀(??) 서우진은 남부 무림을 일통하여 흑사련이라는 이름의 사파 무림맹을 만들었다.

마검(??) 오춘은 또 어땠는가. 명가(名家) 오가장에서 태어난 그가 살아생전 이룬 것은 십만의 민초를 베어 넘겼다는 악업이었다.

“형님, 지금 죽여야 하오.”

걸왕의 보챔에 검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도 걸왕의 말에 익히 공감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이 품에 안긴 이것이 갓난아이였기에 망설임이 이는 것이었다.

“…너무 작은 아이구나.”

“형님….”

“보거라. 아직 젖도 채 떼지 못하였을진대, 어찌 보채지도 못하고 있지 않느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이건 살귀요!”

“그 이전에 아이다.”

걸왕의 표정이 굳었다.

검성은 그런 와중에도 슬픈 눈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은 아이가 아니더냐.”

걸왕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아이는 피를 부를 것입니다.”

“무림에 피가 흐르지 않은 날이 있더냐.”

“무림인의 피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귀의 피일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형님! 그 아이가 수천의 양민을 학살할지도 모른단 말이오!”

“수만의 악인을 베어낼 수도 있겠지.”

대화는 좁혀지지 않았다.

검성은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은 아이를 그저 가엾이 여겼고, 걸왕은 이어질 환란을 예고하며 그를 다그쳤다.

이대로 가다간 칼부림이라도 날 상황.

검성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걸왕을 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걸개야.”

“….”

“우리가 무엇을 위해 예까지 온 게냐?”

걸왕은 양주먹을 꽉 쥐며 답했다.

“…혈마를 잡기 위해서 왔소. 그리고 해냈지.”

“무엇을 위해 그리했더냐.”

“무엇을? 당연한 것 아니오! 평화! 협(?)을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잖소!”

“그럼 물으마.”

검성은 슬픈 듯 인상을 늘어트렸다.

그리하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아직 무엇도 되지 않은 아이를 베는 것이 협(?)이더냐?”

덜컥.

걸왕의 움직임이 멎었다.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가, 이내 형편없이 찌푸려졌다.

검성의 말은 이어졌다.

“우리가 검을 든 이유가 다만 그것이더냐? 평화는 목적이다. 이것은 과정이고. 다만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과정에서 떳떳하지 못하다면, 그것을 협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궤변이었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이런 희생 정도는 치르는 것이 당연했다.

하나, 걸왕은 반박하지 못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 이런 입바른 말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검성인 까닭이다.

검성(??) 목선오.

그가 사성육왕 중에서도 가장 높은 좌에 올라 있는 이인 까닭이고, 동시에 정파 무림이 존경하는 위대한 협객인 까닭이다.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고 언제나 협의를 고민하며 위험 앞에서 절대 물러나지 않는, 그렇기에 자신이 형님으로 모신 이가 이런 말을 내뱉는 상황에 걸왕은 차마 반박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걸개야. 나는 그리할 수가 없구나.”

검성의 시선이 아이를 향했다.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도 검성만을 바라보던 아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꺄르르 웃기 시작했다.

검성이 손을 뻗자 그의 검지를 꼬옥 움켜쥐기 시작했다.

걸왕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얼굴 위로 떠오르는 것은 고민이었고, 또한 침통함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걸왕은 한참이나 고민을 이어간 끝에 결국 어깨를 늘어트리며 그리 말했다.

“…형님께선 참으로 비겁하시오.”

헛웃음을 툭툭 흘리며 내뱉는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항복의 의미였다.

검성은 지그시 웃었다.

“고맙구나. 나의 고집을 들어주어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키울 것이다.”

걸왕의 고개가 기울었다.

“형님이 말이오?”

“그래, 내가 살리고자 고집을 부렸으니 이 손으로 키워야 하지 않겠느냐.”

아이는 여전히 검성의 손가락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 입 앞으로 그것을 가져다 대곤 쭙쭙 빨아먹기 시작했다.

검성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 아이에게 협을 이를 것이다. 그리 키워, 제 운명에 저항하는 삶을 살게 할 것이다.”

“참, 형님은 못 말리겠소.”

걸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하는 투는 퉁명스러웠으나, 그것이 그의 기분이 나쁨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반대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살귀가 될 아이조차 저리 희망을 품은 채 바라보는 그를 보며, 걸왕은 자신이 그를 형님으로 모시게 된 이유를 다시 한번 떠올린 것이었다.

‘입바른 소리나 하는 주제에 어떻게든 뱉은 말은 지키시지.’

중원 무림에서 검성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그가 행해온 협행의 무게와도 같았다.

그렇기에 무심코 기대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참으로 어쩌면 검성이 저 아이를 살귀가 아닌 협객으로 키울지도 모른다고.

“목리원(???).”

“예?”

“아이의 이름으로는 그것이 좋겠구나. 나의 성을 따서 목(?)씨로, 이름은 다스릴 리(?)자와 근원 원(?)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제 속에 깃든 근원을 잘 다스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아이로 자라길 비는 것이지.”

검성이 고개를 들어 걸왕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엔 썩 멋들어진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떠하느냐?”

걸왕은 아이를 바라봤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뽀얀 아이.

저 눈동자의 붉은색은 자라며 점차 옅어질 것이다.

또한 아이가 피에 취하지 않는 이상 다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이름대로 자란다면 저 눈동자에서 다시는 붉은 기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좋은 이름인 듯하오.”

걸왕은 웃으며 그리 답했다.

그리곤 조금은 가라앉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형님께선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셨소. 나는 형님을 믿으니 어쩔 수 없이 따르겠지. 하지만 말이오….”

걸왕은 턱짓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저 밖에 있는 이들은 어찌 설득하실 생각이오?”

질문은 문밖 대전에 있을 다른 고수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검성은 곤란한 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이해해주길 바라야지.”

“저 치들이? 절대 불가능하리라 보오. 다른 이는 몰라도 독왕(?王)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당가는 이 전쟁에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으니.”

“그것이 이 아이에게 물을 죄는 아니지 않더냐.”

“적어도 그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분위기는 다시금 날카로워졌다.

검성의 고민은 깊어졌고, 걸왕은 그것을 묵묵히 기다렸다.

그 끝에서 이어진 답은 이전과 같았다.

“역시 그들에게도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이 옳겠구나.”

“형님….”

“내 욕심으로 그들을 기만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더냐.”

검성은 웃으며 제단에서 내려왔다.

이제 그의 품엔 아이가 있었다.

“가자꾸나.”

검성이 문밖을 나섰다.

혈마의 시신을 앞에 둔 채 검성을 기다리던 이들은 그가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보며, 그리고 그가 내뱉은 말을 들으며 각자 다른 표정을 띄워 올렸다.

이날 대전에서 오간 대화는 기록되지 않았다.

중원 무림이 아는 것은 오직 한가지.

혈마가 죽은 날, 정파 무림의 가장 밝은 별이 스스로 그 이름을 포기했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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