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18)
***
추석 연휴를 앞둔 밤에도 적지 않은 직원이 남아 여의도 연구소를 환하게 밝혔다.
군경용 최첨단 방탄복, 소방관을 위한 방화 장비와 방독면, 보다 안전한 쿼드론을 위한 안전장치, 육상은 물론이고 축구와 야구, 다른 모든 스포츠에 필요한 기능성 신발과 운동복, 그리고 여전히 개발 중인 스피어 캡슐 등등.
수치로 집계하자면 130여 개가 넘는 세인의 미래 먹거리가 웅크린 곳은 밤과 휴일을 몰랐다.
자기만의 세계 구현이라는 헤어나오지 못하는 흥에 취한 이들. 그런 일 중독자들에게 연휴란, 보다 조용하고 집중이 용이한 환경에서 자기만의 업무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기회의 다른 말이었다.
무인 보안 시스템이 가동 중이었지만 당직 SSS 요원들이 번갈아 근무를 서며 더욱 물 샐 틈 없는 보안태세를 갖출 것이다.
소속된 기업이 세계를 선도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구내식당 조리원들도 그들을 위해 밤새 불을 밝힐 것이 분명했다.
옥탑저택에도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직원들은 늦은 시간에도 일하는데 혼자 쉬기 미안했던 진혁은 운동을 마친 후 사무실로 복귀하려 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 해맑은 홍수정 때문에.
“어머님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이렇게 자주 와? 내일 아침에 시골 내려가야 하잖아.”
“헤헤-. 못 참아서 왔어요.”
홍수정은 점점 유세라화 되어갔다.
진혁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른스러워졌던 면모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보는 게 맞으려나.
그래도 적극적인 홍수정 덕분에 진혁의 애정전선은 한여름 오후만큼이나 화창하고 뜨거웠다.
늘 뜨거워서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운동과 업무를 게을리하거나, 기록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손진혁은 프로 중의 프로였으니까.
이세계에서 학습한 다양한 스킬로 다른 분야에서도 프로에 등극했지.
“뭐, 뭐, 뭘 못 참는- 그게 뭐야아-.”
“에헤-. 보고 싶은 걸 못 참는다는 소리죠. 이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그냥 내추럴하게 어어? 어디 가요? 이리 안 와?”
“네에-, 갑니다아-.”
은근슬쩍 주방으로 가려던 진혁은 쪼르르 달려갔다. 그 모습이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쇠구슬 같다.
‘수정이가 부르는데 와야지.’
소파에 얌전히 앉자, 바짝 붙어 앉은 홍수정이 주섬주섬 백을 뒤졌다.
“짜잔-! 헤에-.”
홍수정은 해님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진혁의 손을 끌어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오빠가 준 용돈 모아 산 거예요. 돈이라고 같은 돈이 아니니까.”
“나 이런 거 처음 껴 봐.”
“꼭 해보고 싶었어요. 불편하면 빼도 돼요.”
“안 뺄 거야.”
기본은 백금 같았다.
금빛으로 문양이 들어갔는데, 중앙에는 천일염 알갱이 크기의 붉은 보석도 박혀 있었다.
루비.
“뭐 해요? 나도 끼워줘야지.”
“으응-.”
반지를 받아든 진혁은 홍수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역죄인 자세로.
“아하하-! 그게 뭐야아-.”
“수정이 앞에서만 꿇을 거야.”
“그래도 죄지은 사람처럼 꿇으니까 이상해. 하나는 세워야죠.”
“아, 그런가?”
하나는 이미 서 있는데 아, 이게 아니고.
언제 해봤어야지.
“그 손가락 아니에요.”
아, 뽀큐 손가락에 끼우는 게 아닌가 봐.
언제 커플링을 껴봤어야 말이지.
“혜정이네서 자고 내일 아침에 오빠 만나서 같이 간다고 말해뒀어요.”
“혜정이? 내가 만난 친구 중에는 그런 친구 없었잖아.”
“이히힉-. 그런 친구 없으니까 외박해도 안 걸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도구 없이 범행을 저지르면 무죄라는 뜻인가?
“우리 엄마가 아빠랑 연애할 때 할아버지한테 자주 썼던 방법인데 한 번도 안 걸렸대요.”
글쎄다.
과연 들통나지 않은 걸까?
할아버지가 모른 척해주셨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데.
“그래도 엄마한테 거짓말하는 건 좀-.”
“오빠는 우리 엄마가 중요해요, 내가 중요해요?”
짐짓 삐친 척, 홍수정이 팔짱을 꼈다.
“둘 다 중요하지.”
“아, 그런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 어머님이 나한테는 아주 남도 아니잖아. 당연히 수정이가 중요하지만 그런 질문은 좀 비겁하다.”
스읍-. 이게 아닌데. 홍수정이 옆머리를 긁었다.
이럴 땐 작전 변경이다.
“오빠, 많이 피곤해요?”
“아니.”
홍수정과 함께 있으면 몇 배로 체력이 달리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그게 손진혁이라는 남자다.
“시골 가면 둘이서만 붙어 있기 힘들잖아요.”
“수정이 말은 항상 옳습니다요.”
시작하는 청춘에게 서로를 향한 욕망과 부모에 대한 죄책감 중 무엇이 더 무거울까. 대답은 뻔했다. 죄의식이라는 옷을 훌훌 벗어버리면 강한 욕망만 남는다.
커플링까지 맞추고 더욱 타오르기 시작한 두 청춘이 환한 거실을 더욱 화려하게 수놓았다.
훕쩝쩝-.
진혁의 발치에서 개껌을 뜯던 장군이는 못 볼 꼴 봤다는 듯 현관으로 사라졌다.
으르-.
잡것들이 또 식사를 시작했어.
*
키유우우웅-.
아침을 알리는 날카로운 엔진음에 진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기장님 오셨나? 시골 가자고 시동 거시나 보다.’
눈부신 햇볕에 얼굴이 제멋대로 실룩였고, 소파에서 실신하듯 잠든 터라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얘는 불편하지도 않은가.’
홍수정은 징역 오빠에게 안겨 잠들어 있었다. 처음 만나 잠들었던 15년 전 그 밤처럼.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착의 여부겠지.
카아-.
침을 흘리는 버릇도 여전했지만 수족구병은 아닌 듯했다.
‘얼마나 편하면 옷도 안 입고 자냐. 아닌가? 고단해서 그런 건가?’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소파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담요를 둘러주었다. 그때, 멀리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띠-띠-디디-.
‘으응? 띠디디디-?’
가택 침입?
디리릭-.
도어록 해제.
파일럿은 도어록 비밀번호를 모른다.
조금이나마 남았던 잠기운이 화들짝 달아났다.
진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진혁이 비밀번호를 알려준 사람은 가족을 제외하면 단 한 명.
거기에 쿼드론을 타고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으아아아아!’
조오오오-때따!
부랴부랴 홍수정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수, 수, 수정아-. 정신 차려 봐.”
“우웅······. 더 자요오-. 엄마는 몰라요오-.”
“아빠는 알아! 오셨어!”
엄마도 쿼드론에 타고 계실 거라구!
“히이익!”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경악하기는 홍수정도 마찬가지여서, 옷도 걸치지 못하고 허둥지둥했다.
철컥-.
‘끄아아아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현관에서 거실까지 오는 경로는 한 번 꺾어진 복도 형태에,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다. 홍기준의 걸음이면 10보 정도일까.
방이나 욕실로 피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했고, 피하다가는 통로에 들어선 사람 눈에 띌 확률이 200%였다. 다 자란 여인으로, 아빠에게 도망치는 나신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
홍수정은 재빨리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남은 일은 진혁의 몫이었다.
재빨리 옷가지를 소파 밑으로 밀어 넣고, 곧 들이닥칠 사람의 시야로부터 홍수정을 보호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
‘아차!’
바지는 입어야지.
‘끄아아윽-! 지퍼에 꼈어.’
덜렁이 녀석이 알몸으로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고 반응한 데다, 팬티까지 걸칠 시간이 부족해 허둥대다 벌어진 참사였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급히 티셔츠를 입어 가렸다.
현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호호-, 장군이 오랜만이네. 지낼만하니? 옳지, 그래, 그래. 착하다, 우리 장군이.”
헤헤헥-.
그나마 장군이가 있어 시간을 벌어주는구나.
장군이야말로 정말 최고의 친구 아니냐.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알고 시골에서 찾아온 모양새잖아.
마침내 홍기준이 거실에 들어섰다.
“회자, 아, 아버님 오셨어요오-.”
진혁은 어느 때보다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래. 비행기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나오지 않기에 자는 줄 알고 들어와 봤다. 이제 일어난 건가?”
“아, 네. 제가 늦잠을 자서요. 죄송합니다.”
진혁은 차려 자세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한 손은 아랫배에 올린 채.
“아니다. 쉬는 날 늦잠도 자고 해야 독소가 빠지는 거지.”
“아, 시골에 같이 가자고 하시려고 오신- 건가요?”
슬쩍 눈동자를 굴리자, 반대편 채광창 너머 이착륙장에 두 대의 쿼드론이 사이좋게 앉은 모습이 보였다.
‘젠장. 착륙하는 소리와 시동 거는 소리도 구분 못하다니. 너무 나태해졌다.’
홍기준의 낯빛이 썩 좋지 않았기에 진혁은 묵직한 바위에 가슴을 깔린 듯 숨이 막혔다.
“여기서 수정이 올 때까지 함께 기다렸다가 오면 같이 갈 생각이었다······.”
홍기준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이 진혁을 질식시켰다.
누가 봐도 딸의 흔적을 찾는 눈빛 아닌가.
‘-이었다, 생각이었다······.’
눈치채셨겠구나.
아, 현관에 신발도 있지. 신발장에 넣어두려 했는데 장군이가 지랄해서 그냥 둔 게 꼬리를 남긴 셈이 되었다. 최고의 친구라는 말 잠정 취소.
‘아아아-, 부끄럽고, 죄송하고······.’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할까, 아직 모르실 수도 있으니 조용히 있을까.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티셔츠 앞자락만 만지작거리려니 홍기준이 걸음을 옮겼다.
“양키들이 요즘 신경을 건드려서 상의할 것도 있었다.”
“군비 확장 때문에 그러시는 거겠죠?”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들어볼까?”
그리 말하면서도 홍기준은 뒷짐 쥔 채 안방 문을 힐긋거리고, 주방을 기웃댔다. 욕실 문도 슬그머니 열었다가 닫았다.
진혁은 똥줄이 탔다.
저건 대놓고 내 딸 어디 숨겼냐고 시위하는 모습 아닌가.
“그냥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뭘 말인가?”
“수정- 아아, 미국이요.”
“그냥 두어라?”
홍기준이 탐색을 멈추고 진혁을 보았다.
“어차피 우리 세인을 향한 것도 아닌 아랍권을 향한 무장인 데다, 저들의 무기 기술이 우리보다 몇십 년은 뒤처졌으니 우리를 노린다 해도 걱정할 건 없다고 봅니다. 그냥 세계의 경찰이라는 착각 속에 살도록 두시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 아닙니까. 우리에게 위협이 닥치지 않는 한, 한발 물러서 있는 것도······.”
히야-, 우리 오빠 멋지다. 속닥속닥-.
어디선가 아기 고양이 껄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의 대답을 들은 홍기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웃고 있었으나 그 눈빛이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음. 여유가 많이 생겼구나. 너그러운 생각도 여전하고. 뭔가 변화의 계기를 만난 사람 같아.”
“든. 든. 하게 제 편이 되어주신 덕분입니다.”
내 편이 되어라, 얍!
변화의 계기를 눈치채지 말지어다!
“자네는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우리 먼저 가지 뭐. 다른 식구들 기다리게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아, 네. 그럼 준비되는 대로 저도-, 예. 가겠습니다.”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린 홍기준이 이내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늦지 마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 자네보다 어른들이다.”
홍기준의 차가운 음성을 들은 경험은 몇 번 있지만, 그 얼음장이 진혁을 향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홍기준의 목소리는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어른들은 핑계다. 수정이 때문에 생긴 배신감이겠지. 지금이라도 석고대죄를-. 아니야. 수정이한테만 무릎 꿇기로 약속했어.’
성인이라 해도 아직 어린 금지옥엽인데 얼마나 화가 치미겠냐고.
진혁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홍기준이라지만, 진혁이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화가 날 노릇이다. 그런데도 당장 따귀를 올리지 않는 것만으로 홍기준은 신사 중의 신사라 할 수 있었다.
거실을 벗어나던 홍기준이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수정이도 오빠랑 같이 올 거지?”
“응, 아빠. 히익-!”
해맑게 대답하던 커튼이 움찔 놀랐고, 진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야, 인마······.’
화창해서, 커튼이 해맑아서, 추석 연휴 첫날이라서. 더 난처한 아침이었다.
하아-. 저것들을 죽일 수도 없고. 괘씸한 놈들.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라도 줄 것이지······. 보고하지 않은 SSS 놈들도 갈아치워야겠고······. 놈들이 보고만 했어도 충격이 덜했을 텐데······. 유세라가 알면 뭐라고 하려나. 홍기준의 중얼거림이 복도에 꼬리를 늘어뜨렸다.
철컥-.
현관문을 연 홍기준이 한마디를 더 남겼다. 이를 악문 채였다.
“수정이 엄마에게는 비밀로 해주마.”
“감사합니다, 아버님!”
쿠웅-!
거인이 찍어누른 듯, 진혁의 무릎이 저절로 접혔다.
차라리 가족의 원수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무사가 더 당당해 보일 터였다.
***
“까아아아아-! 오빠, 저것 좀 봐요! 기러기 떼가 날아가요!”
“으응-. 멋있네······.”
근데 그거 까마귀 떼야.
이 근방을 지날 때면 보이는 터줏대감들.
홍수정은 아빠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서 홍기준의 배신감은 더 클 것이다.
아무튼, 아빠를 친구처럼 여기니 현행범으로 걸리고도 저리 해맑은 거겠지.
‘하휴-. 해고당하는 거 아닐까?’
집에 가는 길이 감옥에 끌려가는 기분을 느껴본 게 언제였더라?
꼬맹이 홍수정에게 뽀뽀를 당했던 날이 마지막이었나?
‘와씨. 그때도 이 자식이었네?’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진혁이 난처한 순간마다 홍수정이 있었다.
쿼드론이 선사하는 탁 트인 시야를 즐기던 홍수정이 째릿한 시선을 느끼고는 진혁을 보았다.
“왜요, 오빠아-?”
헤에-.
‘정말 이쁘다. 우리 수정이.’
븅신.
그래도 항상 진혁의 편이 되어준 녀석을 미워할 수는 없지.
홍수정의 손을 꼬옥 잡았다.
“사랑해요, 홍수정.”
“히히-. 알아요. 근데 왜 존댓말?”
“그냥 그렇게 나왔어.”
왜 존댓말이 나왔을까.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
“히히-. 좋아라.”
유세라화. 좀 되면 어떠냐.
철없고 덜렁대도 좋으니 영원히 행복하고 영원히 해맑아라 이 녀석아.
큐우우우우웅-.
천천히 날아 시속 300km.
쿼드론이 삽교호 방조제 상공을 갈랐다.
“까아아아-! 오빠 저것 좀 봐요! 바다가 반짝여요!”
그건 담수호야.
“진짜, 진짜 눈부시다아-.”
“수정이가 세상에서 가장 눈부셔.”
기장님, 좀 천천히 갑시다······.
집이 가까워진다 생각하니 무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