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17)
갓난아기, 그 안에 들어간 남자.
불결하고 잔인한 뒷골목.
살아남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아이.
성장해 아카데미에 입학한 소년.
팔을 벌려 힘없고 가난한 친구들을 지켜주는, 성자보다 성자 같은 청년.
한날한시에 그 친구들을 모두 잃고 폭주한 용사.
녹슬고 이 빠진 검 한 자루를 들고 적을 찾아 온갖 세계, 다른 차원, 외진 우주를 떠도는 미치광이.
적을 죽이고 또 죽여 신의 벌을 받게 된 죄수.
갓난아기 안에 들어갔던 남자의 모습이 왠지 낯익었다. 그러나 아기에게 들어간 이후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없었다.
마지막에는 벌을 받는 죄수의 인생만 끝없이 이어졌다.
“허어어억-!”
헉! 헉!
이미선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
사내가 제 앞에 있던 물을 건네며 물었다.
단숨에 잔을 비운 이미선은 놀란 가슴부터 진정시켰다.
“잊고 싶어도 못 잊겠는데요? 머리가 터져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걱정 말라. 글로 옮기는 대로 지워질 기억이다.”
“아, 그런가요?”
어찌 불신할 수 있을까.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직접 겪은 입장에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앙을 맹세할 판이다.
눈앞의 남자가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사실에.
“저, 그런데 마신 님? 언제 완성될지는 모르지만 출판 계약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영세 출판사라 사장님이 승인을 해주실지는 모르겠어요.”
이미선은 프로였다.
최면에 걸린 듯 혼란한 와중에도 투철한 직업정신을 발휘했다.
“한 벌이면 된다.”
“에?”
“완성하거든 여기로 보내라.”
남자가 내민 것은 연갈색 가죽이었다.
가죽을 펼치자 안쪽은 은은한 광택의 회색이었는데, 거기에는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분은······.”
지구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손진혁」
“폭주 용사 이야기까지는 그자도 알 것이다. 죄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니 자세히 쓰도록.”
“그럼 앞부분은 제가 몰라도 되지 않나요?”
“원인 없는 결과가 있던가? 이미 아는 이야기라도 다른 이가 들려주는 건 또다른 재미 아닌가?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아, 그렇죠. 맞습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
어디다 뒀더라······. 남자가 품을 뒤적였다.
“출판 계약이라 했지? 내가 계약을 참 좋아한다. 부탁을 하는 입장이니 내가 을이 되어야겠군.”
터엉-.
한참 품을 뒤진 남자가 테이블에 올린 것은 4리터가 넘어 보이는 유리병이었다.
“이게 뭔가요?”
“와인이라고 하는 거다. 삼만 년쯤 되었지.”
3만 년이면 구석기 시대에 만들었다는 소리야?
“맛 좀 보겠나?”
뿽-!
대답도 듣지 않고 마개를 딴 남자가 이번에는 왼손으로 품을 뒤져 잔을 꺼냈다.
‘술병도 그렇고 도대체 저 커다란 게 어디서 나오는 거야?’
이쪽저쪽 기웃거리는 이미선의 궁금증을 이해한다는 듯 웃을 뿐, 남자는 말없이 와인을 따랐다.
이미선의 눈과 입이 동시에 커졌다.
명함을 구경할 때와는 또 다른 신비였으니. 잔을 채우는 영롱한 보랏빛 액체는 포도주가 아니라 보석 같았고, 쏟아지는 와인이 물결치며 퍼뜨리는 은은한 푸른 빛은 이제껏 보지 못한 장관을 연출했다.
“크리스털 잔이다. 아주 귀하지.”
잔 때문에 놀란 게 아닌데.
남자는 잔을 하나 더 꺼내 제 잔도 채웠다.
“그대의 집필과, 건강과, 밤낮없는 짝짓기를 위해 건배하지.”
“예?”
“그냥 해.”
“예.”
태앵-.
잔을 기울이려 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입으로 흘러들어오는 환상, 입에 머금고 혀를 굴려 보려 했으나 제멋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기이한 움직임.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 이건······.”
“내가 다 안다. 맛이 좋지.”
“술이 아닌 것 같아요.”
“아껴 마시도록. 이 세상에는 한 병뿐이니.”
그리 말한 남자가 아직 많이 남은 제 잔을 내밀었다.
넙죽 받아든 이미선이 쭈욱 들이켰다.
“감사합니다.”
“내 세계에 많이 있다.”
“정말요? 몇 병 더 주시면-. 아이고.”
이미선은 다급히 제 입을 막았다.
맛에 반한 나머지 염치없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오라. 집필을 마치면 내 세계에 초대하지. 이것으로 계약 체결이다.”
“정말인가요?”
“나는 본체로서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그곳에는 아픔도 없을 것이며, 내 세계에서는 늙지도 않을 것이며, 원한다면 플레이보이국 모델족 수컷도 만들어 주겠다.”
“예? 플레이국 뭐요?”
“그런 게 있느니.”
“마신 님이 사시는 나라인가요?”
“내가 사는 세계는 아타락시아, 내 이름 아타락실을 딴 곳이다.”
“아······. 아타락시아라면 들어본 것도 같고.”
“들어봤더라도 다른 곳일 거다. 초대받고 싶다면 반지를 간직하고 살아라. 반지가 계약을 증명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술기운 때문은 아닐 것이다.
와인을 마시기 전부터 머리가 붕 뜨고 꿈속을 거니는 듯했으니.
눈을 질끈 감고 강하게 머리를 저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테이블에 커다란 와인병과 크리스털 잔 두 개, 그리고 남자가 꼈던 반지 중 하나였을 것이 분명한 비취색 반지가 남아있었다.
자신을 아타락실이라고 밝힌 남자는 향기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독한 술인가? 달달했는데 이상하게 몽롱하네.”
이제 다른 소원을 이루러 가볼까. 남겨진 음성만 실바람이 되어 사무실을 휘돌았다.
***
여전히 무더운 9월.
일찍 수업을 마친 손유진은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운동장을 걸었다.
“유진이는 추석에 뭐 할 거야? 진혁 오빠 오시겠지?”
“응. 오빠랑 라면도 끓여 먹고, 바다도 가고, 윷놀이도 하고-, 뒷산에서 개암도 찾을 거야. 이번엔 수정 언니도 온대. 수정 언니한테 대학교 얘기도 물어 봐야지이-.”
“대단한 거 할 줄 알았는데 유진이도 별거 없구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어어-.”
“수정 언니라는 분이 진혁 오빠 여자친구지? 그 언니도 엄청 유명하던데?”
“어휴-, 그놈의 연예가요중계가 다 떠벌려서 그래애-.”
“아, 뭐래애-.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 미니 홈피에 다 걸렸거든요?”
하긴.
손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라서 사인이나 사진 촬영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밥을 먹다가도 찍어줬으니까.
엄마가 그러시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오빠를 더 좋아하는 거라고 했다.
친구들과 종알종알 수다를 떨며 천천히 걷는데, 2학년 후배가 먼지를 날리며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언니들! 후문으로 가요! 학교 정문에 이상한 아저씨 있어요!”
“또?”
“바바리맨인가 봐.”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데 여자중학교라서 더욱 극성이다.
손유진이 씩씩하게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도 유진이가 쫓으려나 보다!”
“가보자!”
손유진 파티의 바바리맨 레이드 개봉박두.
남자를 발견한 손유진은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섰다.
“어라라? 헤헤. 저 아저씨는 바바리맨이 아니야.”
정문에 손유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의문의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유진아, 아는 아저씨야?”
“누구야, 누구?”
“변태는 아닌 것 같은데?”
활짝 핀 꽃처럼 환하게 웃는 손유진의 눈에 금세 물이 차올랐다.
“도깨비 아저씨······.”
손유진을 만나기 위해 인간의 몸을 만들어 멀리까지 와준 키다리 아저씨.
그가 손유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많이 컸구나.”
“안녕, 아저씨······.”
손유진은 그제야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선글라스 너머, 우주를 담은 눈동자가 마주 웃었다.
“아저씨랑 콜라 마시러 갈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이 반짝였지만 손유진은 울지 않았다.
대신 활짝 웃었다.
“네!”
*
정문 앞 가게에서 콜라를 구입해 운동장 가장자리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손유진의 하교 시간에 맞춰 찾아온 강헌창과 정상태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손유진을 두구 엘릴이 말렸다.
“그냥 두어라. 나도 아는 놈들이다. 저들은 나를 보았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할 게다.”
“저도요? 저도 기억 못 하게 되나요?”
“그렇진 않을 거다. 영혼으로 이어진 이들은 잊어도 다시 기억해내고, 헤어져도 언젠가 반드시 만나는 법이니. 그래서 내가 찾아오지 않았느냐.”
두구 엘릴은 오래 머물 수 없다는 말로 아쉬움을 에둘렀다.
“사니얼 장군이는 왔느냐?”
“추석 때 오빠랑 같이 온대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서 찾아 나서지도 못하고 많이 애먹었어요. 오빠도 일이 손에 안 잡혔대요. 장군이도 아저씨가 지켜주셨어요?”
“뭔가를 지키는 건 스스로의 의지뿐이다. 나는 간절한 이들을 도울 뿐이지.”
진인사대천명인 건가요, 손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니얼들에게 이걸 먹이거라.”
두구 엘릴이 건넨 것은 염소똥만 한 환약 한 주먹이었다.
킁킁-.
약간 구린내가 풍기는 것이, 냄새만 보아서는 개들 취향에 제격일 듯했다.
“이게 뭔데요오?”
“소원.”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했지만 수수께끼처럼 구는 건 여전했다.
그래도 나쁜 존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상사가 시키는 일 때문에 악역을 자처하기도 하지만, 이 도깨비 아저씨는 만물을 사랑하고, 작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고, 사소한 것에 신기해하는 선량한 존재라고 했다. 애틀랜타에 있을 때 해준 이야기로는 그랬다.
“꼭 먹일게요.”
“이 녀석도 받아라.”
이 녀석?
두구 엘릴이 재킷을 벌려 품을 뒤졌다.
얘가 또 어디 숨었나. 그리 중얼거리며 옆구리, 겨드랑이를 열심히 뒤진 끝에 뭔가를 꺼냈다.
끼잉-.
강아지.
코와 눈두덩이 새까맣고 털은 누렁이보다 짙은 갈색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믹스견처럼 보이는 강아지였지만 손유진은 견종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선물이다.”
“오와아-! 너무 귀여워엉-.”
손유진은 강아지를 볼에도 대어보고, 킁킁 냄새도 맡았다.
끼잉끼잉- 헤헥-.
강아지도 손유진이 마음에 드는지 방정맞게 꼬리를 흔들고, 턱을 핥았다.
“까아-, 간지러워-.”
강아지였던 홍시, 검마를 쓰다듬던 행복한 기억이 살아났다.
“그놈을 찾느라 애 좀 먹었지.”
손유진은 크게 놀라 두구 엘릴을 돌아보았다.
“혹시 얘 천마예요?”
“오냐. 너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더구나. 거절했다면 억지로 데려오지 않았을 거다. 사니얼들이 제법 낭만을 아는 세상이야.”
은총을 남발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이적이니 걱정 말라고.
“천마야, 반가워-. 아저씨 감사합니다.”
“녀석도 너만큼 살 것이다.”
두구 엘릴은 어디 가려운 사람처럼 옆구리를 뒤졌다.
“뭐 하세요? 알러지 같은 거 있어요?”
“줄 것이 더 있느니. 아, 주머니에 넣었군.”
재킷 주머니에서 투명한 정육면체 케이스가 나왔다. 그 안에 분홍 리본이 묶인 청록색 알이 들어 있었다.
이제는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겠다.
케이스를 받아든 손유진이 물었다.
“행운이도 오래 살아요?”
“독수리보다 오래 살 것이다.”
손유진은 숙인 고개를 바로 들지 못했다.
케이스를 보는 것인지, 땅을 보는 것인지 애매했다.
“행복하지만 불공평해요.”
“사니얼과 알을 선물 받은 게 말이냐?”
“네.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전혀 평범하지 않네요.”
“아이여, 생각해 보아라.”
손유진이 고개를 돌려 두구 엘릴을 바라보았다.
우주가 담긴 눈동자에 손유진의 얼굴이 비쳤다.
“넘치는 권능으로 영혼 두어 개쯤 다스리는 것이 대수겠느냐?”
“음······, 그건 좀 어려운 말이네요.”
“나를 알고, 나와 마주 보고, 나와 대화하는 것이 더 큰 특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느냐?”
두구 엘릴이 천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를 아는 것이야말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 그에 비하면 이런 선물쯤, 은하계를 통째로 지배하는 것만큼이나 볼품없지. 너는 소실되었던 내 감정을 다시 살린 인간. 이깟 대수롭지 않은 일을 특혜로 여기지 말라.”
아, 그렇구나. 그제야 손유진이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저씨를 만난 일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했지.”
“헤헤, 네.”
“나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냄새도, 음성도, 모습도 없기에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저는 기억하는걸요. 그것도 특별대우겠죠?”
“그래, 맞다. 이제 네 이야기를 들려다오. 네 목소리로 듣는 이야기는 멀리서 지켜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를 것 같구나.”
학교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가족 이야기. 손유진은 두구 엘릴이 듣고 싶어 하는 일상을 들려주었다.
“우리 학교 선배들은요, 다리 굵다고 놀림을 받았대요. 학교가 높은 지대에 있어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구요오-. 그런데 체육교육이 강화되면서 그런 말이 사라진 걸 보면 역시 운동 부족이었나 봐요.”
“동네 친구 중에 김호진이라는 남자애가 있어요. 걔가 어느 날 ‘손유진이는 어떤 눔이랑 결혼헐라나?’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우리 오빠 같은 사람’. 그랬더니 이 녀석이 글쎄- ‘이이-, 시집은 다 갔구머언-.’ 이러는 거 아니겠어요? 참 나-! 막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 생각해보니까 맞는 말이라서 그냥 웃어버렸어요. 우리 오빠 같은 남자가 또 있겠어요?”
“우리 아빠는 방귀를 너무 자주 뀌어요. 어릴 때는 재밌었는데 이제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게 돼요. 정원이 애기 때는 아빠 뒤에서 놀다가 거품 물고 기절해서 제가 손을 쓴 적도 있었어요.”
“제 꿈은 공학자예요. 우리 아빠 회사든, 오빠네 회사든 가서 커어-다란 우주선을 만들어서 두구 아저씨 계신 곳에도 가보고, 또 은정 언니가 봤다는 외계인을 만나서 그 언니 소원을 들어주려고요. 그 언니 소원이 뭔지 아세요? 외계인한테 똥침하는 거래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외계인은 옷을 안 입어서 멱살을 잡지 못한다나 어쩐다나-.”
재잘재잘 떠드는 여자아이를 보는 두구 엘릴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행복하게, 재미있게 사는구나.
네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내 행복도 차오른다. 두구 엘릴은 손유진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어 눈빛으로만 말했다.
이윽고 두구 엘릴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존재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다 되었구나.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그 반지에 대고 소원을 빌어 보거라.”
그러나 알고 있다. 너는 그저 날 기억하기 위해서만 반지를 간직할 테지······.
두구 엘릴의 음성은 어느덧 바람이 되어 흘렀다.
“네. 그냥 평범하게 살려고요.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찾아오시면 정말 좋겠어요.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꼭 그렇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계약하지. 반지가 계약을 증명한다.
두구 엘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바람이 불었다.
“약속이 아니고요?”
같은 말이란다.
“히히-. 네. 기다릴게요.”
그자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구나. 우리만의 비밀이라고 해두자. 그자도 모르는 일이 있는 게 사는 재미가 있지 않겠니?
“헤헤-. 맞아요. 비밀로 할게요.”
그자의 소원, 너의 소원, 사니얼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잠시나마 내 거대한 힘을 가둘 몸을 빚었다.
허나 나는 아직도 이렇게나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하여 깨닫는 것이 늦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나의 만족을 위한 수고였음을······.
“누구든 좋으면 됐죠 헤헤-. 오빠가 그랬어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은 나쁜 말이지만 실제로 모두가 좋은 것이야말로-.”
손유진은 말을 멈추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던 바람에서 먼지 냄새가 나기 시작한 탓이다.
“아, 가셨구나. 헤에-. 아저씨 안녀엉-.”
해맑게 웃으며 허공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알이 든 케이스를 가방에 넣고, 제 무릎에 얌전히 앉아 꼬리를 흔드는 천마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끼잉-. 헤헥-.
“옳지 예쁘다, 우리 천마.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자.”
헤헤헥-.
곧 추석이 되면 오빠와 장군이가 돌아오고 수정 언니네 가족도 온다.
동네 오빠들, 언니들의 푼수 짓도 볼 수 있을 테지.
손유진은 이제 오빠가 한 말을 완벽히 이해한다.
- “집에 갈 때가 제일 행복해. 막상 가면 책이나 보고, 낮잠을 자며 시간을 허비하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는 세상 누구도 부럽지가 않아. 그건 오빠가 더 어릴 때, 가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엄마, 아빠가 기다리시고, 장군이가 마중 나오고, 꼬물이 유진이가 오빠를 보며 웃었으니까. 오빠에게는 지금도 그때가 가장 행복한 기억이야.”
운동에 지쳐서, 대회가 힘들어서, 홀로 지내는 서울 생활이 외로워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오빠는 가족이 모여 있는 그림, 함께 어울려 웃는 사진을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거라고 했다.
“천마야, 이제 집에 갈까?”
헤헥-. 끼잉-.
천마가 꼬리를 빙빙 돌렸다.
좋다는 뜻인가 봐.
벤치에서 일어나서, 한 손에는 천마를 든 채 한쪽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외치는 거다.
“에헤헤-! 출바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