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334화 (334/338)

시작 (15)

***

대학생의 방학은 길다.

그러나 진혁과 홍수정의 아름다운 밤에 비하면, 어떤 휴가도 초라하고 무의미한 시간에 지나지 않으리.

“내일 엄마랑 아빠 오셔서 가야 해요. 우리 수혁이도 누나 찾는다는데 가서 기다려야지. 아이구구 삭신이야-. 온몸을 얻어맞은 것 같애.”

으흐흥-. 얻어맞기는 했지. 입술에.

진혁은 주책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입을 꾹 닫았다.

“데려다줄게.”

“피- 차도 없으면서? 지하 주차장에 내 차 있는데 뭐하러요. 나오지 마요.”

홍수정에게 절대복종하는 진혁이었으나, 바래다주지 않은 것으로 모자라 문 앞에서 배웅하는 불충을 저지를 순 없었다. 홍수정의 노예니까.

두 청춘은 지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도 꼬옥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 붙어 있었다고 이렇게 보내기가 싫으냐······.”

“여기 들어와서 살까 봐요.”

“나는 좋아.”

“피-. 그랬다가는 우리 엄마가 나 머리 빡빡 밀어버릴걸?”

“그렇게 엄하신 분은 아니지 않나?”

삭발은 도 넘었는데.

“엄하지는 않은데 이상한 데서 발끈해요. 자기 딸이 더 젊고 예뻐써 짜증난대.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람.”

그렇게 말한 홍수정이 약간 꺼벙한 얼굴을 만들었다. 유세라가 쿠키를 먹으며 드라마를 볼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히히히힉-.

빙구 웃음을 터뜨린 진혁은 홍수정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가했다.

익살스럽고 사랑스러운 개구쟁이.

어두운 그늘 없이 늘 밝기만 해서 기특하고 감사한 영혼.

어디선가 읽었던, 서럽도록 눈부시다는 표현이 절절히 와닿았다.

‘보내기 싫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했다.

“어이구-. 나 도망가는 거 아니에요. 울지 마요.”

“울기는 누가.”

“헤헤-. 잘생긴 얼굴 울상 됐잖아. 너무 아쉬워하는 거 같아서요. 갈게요.”

진혁의 심장은 사랑에 빠져 말랑해졌고, 진혁의 심장을 쟁취한 홍수정은 더욱 강해졌다. 모르는 이들 눈에는 여린 남자와 강한 여자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무릇 연인이란 그런 변화의 과정을 거쳐 서로 균형을 맞추는 게 아닐까.

크와아아아웅-.

지하주차장에 굉음을 남긴 빨간색 스포츠카가 사라진 후에도, 남겨진 진혁은 손 흔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뒤로 두 대의 쿠페가 따라 붙었다. 밖에도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 쿠페가 있겠지. 그나저나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어야 할 텐데. SSS의 사생활 보호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고용주 홍기준의 지시가 어떤지 모르니 걱정이 된다.

‘뭐, 걸리면 책임져야지. 기꺼이.’

설마 홍기준 아저씨가 죽이기야 하겠어?

생의 의욕이 누구보다 강했지만 최근 들어 유난히 강해진 진혁이었다.

눈앞에 환상이 펼쳐졌다.

빨간색 스포츠카가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은 환상.

미쳐도 단단히 미친 듯했다.

‘수정이가 모는 차가 35억 짜리라고 했던가?’

그래서 홍수정 전담 경호팀도 고성능 차량을 사용 중이다.

‘나도 차나 한 대 살까······.’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떨어지는 순간이 이렇게 아릴 줄 몰랐다.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건 운동선수로서의 신체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인간관계도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 애정도가 상승하고, 그때마다 커가는 감정만큼 의지하게 되고, 소유욕도 강해지는 거겠지.

그래도 떠나는 모습이 유쾌해서, 행복한 얼굴로 떠나서 다행이다.

‘그새 보고 싶네.’

차가 없으니 그게 안 된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는 갈 곳이 딱히 없어서, 이번에는 쿼드론이 있어서 차가 필요없다.

여행 갈 때는 홍수정의 차를 이용 중인데, 그 또한 과거와 같았다.

서로 다른 두 삶에도 공통점이 이렇게나 많네.

‘나는 결국 너와 사랑할 운명이었나 봐.’

*

겨우 며칠을 머물렀을 뿐인데 홍수정의 빈 자리가 너무 컸다.

홀로 잠드는 일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래도 행복하다.’

진혁은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달라진 공기를 실감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나 간다.】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다.】

‘준비하던 일이 있다더니 다 마친 모양이야.’

【역시 영민하군.】

‘무슨 일인데?’

【그대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다.】

‘이미 들어줬잖아.’

【기록해두었다. 그대의 소원.】

‘내 소원? 뭔데?’

【비밀이다.】

‘아오 궁금해 죽겠네.’

【걱정 말라. 궁금해도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겨우 호기심 따위는 심장으로 가는 혈류와 에너지를 빼앗지 못하기 때문인데-.】

얘 또 이상한 소리 하네.

‘이 세상은 앞으로도 괜찮은 거지?’

【아마도.】

‘어떻게 된 게 속 시원히 말해주는 게 하나도 없냐.’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수수께끼에서 시작하지. 우주의 탄생도 수수께끼 아니던가? 그러나 수수께끼의 답을 아는 것이 항상 행복한 일은 아니다.】

얘 또 어려운 말 하네.

‘아무튼 석방을 축하는 한다.’

【갸아브 외페-, 에르아뵈 덴 툴로쏘.】

그대의 앞길에 툴로쏘의 은총 있으라.

*

홍수정이 없으니 기상 시간이 귀신같이 돌아왔다.

몸에 밴 습관은 시계보다 정확해서, 겨우 1분 더 자고도 화들짝 놀랐다.

「05:01」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귀신보다 더 무서운 문자가 와 있었다.

유진이: 「장군이가 안 보여요.」

아직 새벽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집에 전화를 걸었다.

***

히에엑-.

덥다.

- “장군아, 엉아 회사 갔다가 다음 주에 또 올게.”

으르-.

손왕왕 이 새끼가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았다.

변했어. 이렇게 약속을 개밥 처먹듯 하던 새끼는 아니었는데.

헤르윽-.

고 새끼 고거,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뒈진 거 아녀? 그렇다면 큰일인데.

손징징을 데리고 복숭아를 따는 손멍멍에게 물어봤지만 대답해주지 않았다.

왈! 왈왈!

아저씨! 손왕왕 왜 안 와요?

“으앗! 깜짝이야! 장군이 너 인마, 왜 짖고 그러냐!”

아니 시발 개가 짖지 그럼 집 짓냐?

개한테 짖는다고 지랄하면 어쩌라는 거여어?

말문이 막혀 꼬리만 흔들게 되잖아요.

머엉-.

손왕왕이 보고 싶다.

싸가지없네, 개도 안 주고 혼자 다 처먹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장군이에게 최고의 친구인데 말여어. 짖는다고 개지랄도 않고.

오지 않을 때는 찾아가면 된다.

장군이는 똑똑한 개라서 그런 것도 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

월-.

얘들아, 나는 손왕왕 품에서 잠들련다. 뒤를 부탁한다.

흐르르르-.

끼이이이-.

푸르르르르-.

슬퍼하지 마라.

세상에 안 죽는 개는 없다.

장군이는 현명한 개라서 그런 것도 안다.

손앵앵이 만져준 덕분에 건강하게 살았다.

그거면 됐지.

그래도 세상에, 광마 할멈보다 먼저 이승 하직하게 될 줄이야.

으르- 월!.

홍시가 못난 인간 놈들을 잘 보살펴라!

젊은 홍시에게 대장 자리를 넘겼다. 광마 할매는 순해 빠져서 대장의 그릇이 못 되기 때문이다. 장군이는 전략적 사고가 가능한 개라서 그런 결정도 내릴 줄 안다.

끼잉-.

마지막 인사를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월-.

홍시야, 검마랑 너는 남매니까 둘이 짝지어라.

원래 지체 높은 개는 권력 그- 아무튼 그렇게 하는 거다.

그리고 연하 수캐가 좋은 거여 인마아-.

평생을 함께한 거대한 도토리나무에도 거름을 주었다. 찍-.

천옹옹 영감은 얘를 신갈나무라고 부르더라고? 상수리나무랑 조금 다른 거래.

행운이가 잠든 나무도 찾아갔다.

행운아, 누나 간다. 찍-.

끼이잉-.

뽀미야, 장군이 간다. 독수공방 잘할 수 있지?

딴 암캐 만나면 개 패듯 패줄 거야.

으르-.

도꾸 있느냐? 나 없다고 우리 애들한테 덤비지 마라.

컹-!

아, 도꾸 딸이구나. 도꾸는 죽었대.

어쩐지 젊더라니. 똑같이 못생겨서 헷갈렸네.

킁킁-.

천마야, 곧 만나자.

천마총에도 들르고, 두더집에도 인사를 남겼다.

모두 그리울 거야.

그래도 손왕왕이 제일 그립다.

손멍멍, 한앵앵, 손앵앵, 손징징, 장쟁쟁, 천옹옹, 아휴- 인간이 개떼처럼 많아서 인사하다가 늙어죽겠네.

인간놈들의 손을 열심히 핥아주고, 잠든 틈에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몇 번 다녀본 곳이니까 찾아갈 수 있을 거다.

장군이는 두려움을 모르는 용감한 개다.

귀신을 봐도, 개도둑을 맞닥뜨려도 꼬리를 흔들지.

게다가 죽어가는 마당에 무서울 게 뭐가 있겠냐고요.

헤헤헥-.

낮에는 더위를 피해 풀숲이나 나무 밑에서 잤다.

웅덩이에 고인 물로 갈증을 해결하고, 야음을 틈타 열심히 달렸다.

장군이 달리기 속도라면 며칠 걸리지 않을 거야.

장군이는 계산적인 개라서 그런 것도 안다.

빠아아아앙-!

워워월!

아휴-, 놀라 뒈질 뻔했네! 이런 시바견 같은 새꺄!

자동차라는 녀석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랄하는 바람에 잠시 눈이 멀었다.

그래도 저 불빛을 따라 가야 한다.

장군이는 눈이 점점 안 보이거든.

유쟁쟁이라는 의사 오빠 말로는 백내장이라나 뭐라나.

소내장, 돼지내장은 맛있는데 백내장은 무슨 맛이냐.

뽀미가 눈깔을 핥아줬지만 별맛이 나지 않는다더라.

그렇다면 백내장은 맛대가리 없는 내장이다. 먹으면 눈이 머는 내장이지.

장군이는 미식견이라서 그런 것도 안다.

하아-. 주워 먹은 게 너무 많아서 뭘 잘못 먹어 이런 지랄병에 걸린 건지 모르겠다.

장군이더러 똥개라고 하던 박왈왈이라는 늙은이는 죽었는지 못본지 꽤 됐다.

뭐, 다들 그렇게 한세상 살다가 뒈지는 거지.

그것이 생명의 숙명이니라-. 엣헴.

그래서 장군이는 슬프지 않다.

자동차 불빛을 별빛 삼아, 깔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며칠을 달리고 달렸다.

가끔 도로도 가로지르고, 다리도 몇 개 건넜다.

살쾡이나 족제비 따위가 덤빈 날도 있었지만 가뿐하게 물리쳤다.

하아-, 시바. 세상 참 좋아졌다.

두내리였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야.

어디 감히 근본도 없는 새끼들이 지체 높은 장군이한테 이빨을 드러내?

헤헤헥-.

개눈깔이 맛탱이가 간 것일까, 앞이 점점 캄캄해졌다.

자동차 불빛도 잘 보이지 않았다.

킁킁-.

그래도 바람에 실려 오는 손왕왕 냄새에 의지해 달리고 또 달렸다.

장군이는 개코라서 냄새만으로도 방향 탐지 및 유지를 할 수 있다. 군견 출신인 천마 영감도 장군이 개코는 인정하는 부분이었지.

쿠웅-!

깨갱-!

여기저기 부딪치는 일이 늘었다.

대가리가 찢어진 모양이다.

피가 떨어져서 날름날름 핥아먹었더니 힘이 솟았다. 역시 장군이 입맛에는 날로 먹는 게 최고야.

헤휴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낮에도 쉬지 않고 달리고, 힘에 부치면 천천히 걸었다.

멈추면 그 순간 죽는 거다.

인간놈들이 장군이 앞을 막는 일은 없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하등한 동물이라도 지체 높은 장군이는 알아보는구나.

헤흐윽-.

아, 아직 더 가야 하는데 심장이 미친 벼룩처럼 툭툭- 널뛰기한다.

잠이 온다······.

물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어느 강 위 다리가 아닐까. 사람 발소리도 들리지 않고 자동차 소리도 저 멀리에 있다. 사용하지 않는 다리구나.

물 냄새······.

손왕왕이 아이였을 때는 매일 물 냄새를 맡으며 기다렸다.

나비를 쫓고, 돌멩이를 들춰 가재를 잡아먹고, 물방개도 뒤집어놓고 구경했다.

멍-.

즐겁고 행복한 기억이다.

그리고 아이를 만나면 집까지 경주를 했지.

장군이는 훨씬 빨리 달릴 수 있었지만 아이가 처질까 봐 일부러 천천히 달렸다. 숨차하면서도 환하게 웃던 아이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끼이이잉-.

시발 것.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하니 제구실 못하는 눈깔이 뜨거워졌다.

그때는 집도 작았고, 먹는 것도 부실하고, 인간놈들도 별로 살지 않는 동네였다.

지금의 개친구들도 없었다.

그래도 아이가 있어서 행복했다.

손왕왕은 장군이의 전부였다.

손왕왕 덕분에 서울 구경도 했지. 장군이는 두내리에서 시골 개 출신으로 유일하게 서울 땅을 밟아보았다.

뽀미도 만나고 홍시도 낳고, 행복한 삶이었다.

아, 그 새끼들 생각하니 괜히 떠나왔나 살짝 후회가-.

헥!

아니야!

그래도 손왕왕을 보고 싶어서 떠나온 길, 후회는 없다.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물 냄새. 다리 위.

하늘에 붕 떠서 죽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네.

언제 죽냐······.

좋은 걸 많이 주워 먹으면 죽는 데도 오래 걸린다는 천옹옹 영감 말이 사실이구나.

크응크응-.

바람 냄새로 봐서는 그새 밤이 된 모양이다.

하루 종일, 한자리에 누워 숨만 쉰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장군이는 죽으면 밤하늘의 별이 될 거야.

장군은 스타래. 스타는 별이라는 뜻이라고 손앵앵이 알려줬어.

그럼 맞잖아. 별.

장군이는 학구적이고 서정적인 개라서 그런 것도 안다.

야, 아니 시발 근데 진짜 이거 왜케 안 죽냐.

어어-? 심장이 느려지고 가슴이 크게 들썩인다.

얘들아-. 장군이 드디어 가려나 보다!

잘 있어라, 개새끼들아!

“사니얼아, 이렇게 만나는구나.”

뭐여, 이 새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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